제 92화: 괴물

“응? 할 일? 다 끝난 거 아냐? 뭐가 남았는데?”
“카오룽 지부 보스 첸 웬이라는 녀석의 비자금이 여기 홍콩에 있더라고. 흐흐.”
【 판다 호텔 서쪽 3킬로미터 지점 건물 지하에 첸 웬의 비밀금고가 있습니다. 】
GPS 홀로그램이 뜨고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녀석들이 모조리 궤멸된 상태에다 어느 누구도 신경쓰지 못할 텐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겠어?”
“이야, 진짜야? 하여튼, 수혁, 재주도 좋아. 그런 정보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하하.”
“내가 정보분석 전문가잖아? 이걸 모르고 지나치면 섭섭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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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 호텔 서쪽 3킬로미터 지점, 오래된 건물.
외관이 평범하고 낡아 보인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법한 곳.
어둠이 깔린 밤, 셋이서 아무도 없는 틈을 타 건물로 접근했다.
수혁이 빠르게 건물 뒤쪽의 문을 따고 안으로 진입했다.
곧바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지하는 어둡고 좁은 통로로 이어져 있다.
얼핏 보면 마치 폐건물 진입로처럼 보인다.
제로가 경비 시스템이 설치되어 있는지 파악했다.
예상대로 아무런 시스템도 없다.
대단한 평범함으로 위장해서 감춘 자신감인가?
첸 웬은 별도의 보안시스템조차 일부러 만들지 않은 것 같다.
"확인 완료. 대단하군. 아무런 보안 시스템도 없어."
제임스는 입구에 도착하자, 곧바로 금고 문 앞에 설치된 간단한 잠금장치를 해제하기 위해 준비했다.
수혁과 제로가 주변을 살피는 동안, 제임스는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으로 금고의 암호 해제 장치를 조작했다.
잠금장치가 클릭 소리와 함께 풀리자, 두꺼운 금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디 보자.
현금이 5천만불 정도.
금괴와 보석이 2천만불 정도.
해외 비자금 계좌가 많구나. 2억 5천만불.
“현금과 금괴는 어디 보관하지? 홍콩에도 사설 금고 시설이 있나?”
“응, 상당히 많다고 하던데? 홍콩이 전통적으로 국제적인 금융 허브니까 그런가봐.”
“다른 곳과 비교해서 어떤데?”
“말카 아밋 볼트라는 데는 지하 깊은 곳에 설치되어 있다더라고. 물리적인 접근을 차단해 버리는 거야. 브링스(Brinks)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안 서비스 제공업첸데, 여기서도 운영중이고.”
“말카 아밋 볼트? 그건 어디에 있는 거야?”
“도심에 위치한 건물의 지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특히, 보안 시스템이 엄청나다고 들었어. 문 하나하나가 방탄으로 되어 있고, 출입할 때마다 지문 인식, 안구 스캔 같은 첨단 보안 기술이 적용되지."
"그럼 은행 금고보다 더 철저한 건가?"
"그렇지. 은행 금고도 안전하긴 하지만, Malca-Amit은 고액 자산가들이나 예술품 수집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 더욱 철저한 보안 시스템을 갖추고 있대. 금고 내의 공기와 온도까지 조절해서 예술품 같은 민감한 자산까지 보관할 수 있게 했나봐."
"그렇군. 물리적 보안과 함께 환경 관리까지 신경 쓰는 곳이라면, 그곳에 보관된 물건들자체가 정말 대단하겠구나."
"그래서 범죄 조직들도 Malca-Amit 같은 곳을 타깃으로 삼는 건 생각도 못 할 정도라고 하더라. 물리적 보안만으로도 거의 무적이고, 누가 언제 출입했는지 모두 기록에 남으니까."
"그런 금고가 홍콩 한복판에 있다는 게 신기하네."
“거기 맡기는 작업은 내가 제임스랑 알아서 처리할께.”
“오케이, 그렇게 하자.”
현금과 귀금속을 보관하는 장소도 일본에 이어 태국과 홍콩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일본의 사설 금고도 제로에게 알려주고 같이 관리하도록 했다.
**
제로는 수혁을 생각할 때마다 ‘놀랍다’는 단어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수혁과 지금까지 수차례에 걸쳐 작업을 함께 했지만, 자금 추적 능력은 그야말로 ‘괴물’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뭐랄까?
탁월한 분석력과 속도가 핵심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빠르고 정확한 결과를 도출한다.
‘사람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모르겠지만, 자금 흐름을 파악하고 숨겨진 비자금 위치까지 찾아내는 데는, 그야말로 귀신이다.
또한, 수혁의 직관적 통찰력이 제로를 놀라게 한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놓치는 작은 단서들을 아주 날카롭게 포착해낸다.
그래서 그런지, 자산을 은닉하는 범죄자들의 수법을 빠르게 간파한다.
단순한 정보 수집에 그치지 않고, 이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거대한 비밀 자산 네트워크를 해체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예술적이기까지 하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범죄 조직의 약점을 찾아내 녀석들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리는 데 초점을 맞추는 전략가적 능력을 보여준다.
제로는 이제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수혁과 일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신뢰와 자부심을 가지게 되니, 함께 하는 마음이 깊어지는 것이다.
뭐, 이러나 저러나 괴물 임에 틀림없다.
**
국정원 2차장에 새로 부임한 천성민.
최근에 임명된 차장들 중에서 그래도 합리적인 편이라 인정받는 인물이다.
천성민은 다름 아닌 박성수 지부장과 진동준 사범과 특수부대 동기.
전임자였던 전재민 차장이 갑자기 구속된 상태라, 부랴부랴 부임했다.
며칠 동안, 상황 파악을 위해 최근에 진행된 건들을 하나씩 살펴보는 중이다.
그러다 우연히, 강수혁이란 이름을 발견했다.
‘응? 강수혁이 우리 작전 파일에? 왜 이름이 올라가 있는 거야?’
전재민이 비공식 작전에 대해 승인을 했다고?
이와 관련하여 작전을 기안하고 수행한 직원이 누구냐···
김동현?
예전에 정민규 차장 똘마니라 불리던 녀석 아닌가?
이 친구는 마음이 그렇게 독하질 못해서 단점 아닌가?
상관이 뭘 하라고 하면, 곧이곧대로 듣는 스타일이고 말이지.
그러니까 정민규가 그렇게 휘두르고 살았겠지.
불러서 한 번 물어볼까?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김동현이라고 합니다.”
“응, 그래. 이리 와서 앉지. 최근에 진행된 서류 보니까, 강수혁이라고 나오던데? 무슨 작전을 진행한 건가? 여기 파일에 내용은 기록이 안 되어 있어서 말이야.”
“네? 강수혁이요? 아, 그거는, 음,, 전재민 차장님께서 지시하신 비공식적인 작전이었···”
“비공식 작전? 그게 뭔데?”
“아, 어,, 그게.. 사실은 임의 동행 형식으로 데려와 몇 가지 물어보려고 했던 거라서···”
“임의동행? 납치 말하는 거 아냐?”
“눼? 납치···요? 아, 아닙니다. 그냥···”
“에이, 프로끼리 왜 그래? 다 알고 있는 걸 가지고.”
“아,,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뭘 알아보려고 한거야? 강수혁에게서?”
“그게, 예전에 대현그룹 오너들 죽음이 강수혁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거 같고, 정 민규 차장님 심장마비도 그 사람과 관련이 되어 있는 거 같아서··· 그리고, 최근에 그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 규모가 굉장히 급격히 커지고 있는 거 같아서···”
“분명한 어떤 증거라도 포착한 게 있었나 보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있었으면, 아예 경찰을 앞세워 체포를 했겠죠. 그냥 의심이 가서···”
“그래? 임의동행이니 가자고 말은 해봤어? 납치 시도때 상황이 어땠나?”
“어,, 그게,, 다섯명이 갔는데··· 일방적으로 당했습니다. 모두들 몇 주 동안 병원에 입원했었습니다.”
“뭐? 으하하하하. 하긴, 그럴만도 하겠네.”
“눼? 아니, 그게 무슨 말씀··· 이십니까?”
“강수혁, 자네가 아무리 조사해도 아무것도 나오질 않지?”
“네, 뭐, 그렇습니다. 특히, 해외에서의 7년 동안은 전혀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말이야. 자네는 상대방이 누군지도 모르고, 돈키호테처럼 풍차에 덤빈 거 아니냔 말이지. 하하하하.”
“네? 풍차요? 강수혁이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음,, 이걸 말해 줘야 자네가 더 이상 집적거리지 않겠구만. 강수혁이는 CIA 비밀 요원이야. 자네도 알파팀이라고 들어본 적 있지? 예전에 전설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크로노스 조직 작살냈던 팀 말이야. 그 알파팀 핵심이 강수혁이야.”
“네~에? 알파팀이요? 정말입니까? 아니, 그런 사람이 왜··· 한국에 있습니까?”
“강수혁이 아버지가 강철수라는 사람이야. 강철수 이사는 대현그룹 최회장에게 비자금 조성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살해당했지. 강도 살인으로 포장되어서 말이야.”
“눼에? 최회장에게 당했다고요?”
“그래. 그걸 직접 사주한 게 정민규 차장과 최회장이야. 얼마 전에 블랙잭 청부조직이 누군가에게 모조리 괴멸당한 건,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아?”
“아, 네. 알고 있습니다. 그 블랙잭 조직원들이 강수혁 아버지와 어머니를 처리했다는 겁니까?”
“그래, 그러니 아주 독한 원한을 품은 강수혁이 돌아온 이후로 대현그룹이 작살난 거야. 그렇다고 강수혁이 했다는 뚜렷한 물증도 없는데, CIA 핵심 자산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음··· 강수혁이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건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지? 그걸 모르고 있으니, 자네가 무모하게 행동한 것 같아서 충고해 주려고 부른 거네.”
“네. 알겠습니다. 그렇잖아도 지난번 전재민 차장님 불법 비리 내용도 사실은 강수혁이 제게 알려준 겁니다. 이후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아예 강수혁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하하, 역시 그랬었군. 나도 대충 짐작만 하고 있었는데. 하여튼, 우리 차원에서 강수혁을 건드리는 건, CIA 심장부인 랭글리를 자살 폭탄으로 공격하겠다는 것과 똑같다고만 생각하면 되니까, 그리 알고 있으라고. 우리가,, 아니지,, 심지어 박세훈 대통령도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만 알고 있어.”
“어,,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네만 알고 있고,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함구할 것. 오케이?”
“넵.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동현은 차장실에서 나오면서, 흘러내린 식은땀을 한~참 닦았다.
후~우~··· 수수께끼가 이제서야 풀린 듯하다.
순식간에 모든 게 맞춰졌다.
어쩐지··· 하필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괴물을 건드려서··· 모조리 죽어버린 셈이다.
김동현이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아~후~, 살 떨려 뒤지겠네.
**
귀국하는 비행기 속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비행기가 천천히 고도를 올리며 홍콩의 고층 빌딩들과 번화한 거리를 지나면, 곧 푸른 바다가 시야를 채운다.
빛을 받으며 반짝이는 물결들은 마치 은빛 거울처럼 반사되어 찬란하게 빛난다.
바다 위에는 작은 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고, 주위로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들이 둥글게 퍼져 나간다.
주룽 반도의 복잡한 거리와 항구도 작아지며 점차 멀리 사라진다.
바다 위로 날아갈수록,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수평선은 끝없이 이어진다.
뒤로는 구름들이 솜사탕처럼 흩어져 있어, 하늘과 바다를 더욱 신비롭게 보이게 한다.
이제, 저 멀리 남해안의 섬들과 해안선이 보이기 시작한다.
섬들은 크고 작은 덩어리로 물 위에 흩어져 있으며, 초록빛 산림이 빽빽하게 뒤덮인 채로 파~란 바다와 서로 대비를 이룬다.
물결이 해안을 부드럽게 때리며, 그 위로 흩어져 나가는 햇빛의 반사는 눈부실 정도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남부의 산맥들은 구름 속에서 아른거리는 실루엣처럼 펼쳐진다.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항구 도시와 마을들이 펼쳐져 있고, 너머로는 강과 평야가 펼쳐져 잔잔한 평화를 느끼게 한다.
풍광을 바라보며 한없이 상념에 잠긴 수혁.
대자연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은 전체적으로 회색 지대가 아닐까?
한쪽은 사랑과 신뢰와 소망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세상.
다른 한쪽은 아주 어둡고 칙칙하게 펼쳐진 암흑의 세계.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회색지대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미로를 헤매는 게, 자신의 삶인 것일까?
합법과 불법을 정하는 경계는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 것일까···?
- 작가의말
오늘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추천과 선작 꾸~욱~!!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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