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6화: 그릇의 크기

양재동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형진그룹 본사.
그 자체로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재벌 그룹의 위엄을 상징한다.
70층에 달하는 초고층 빌딩,
유리와 금속으로 이루어진 미래지향적인 외관을 자랑하며,
빛나는 외벽은 마치 현대의 성처럼 고귀함을 뽐낸다.
건물 최상층에 위치한 회장실과 부회장실,
오직 그룹의 최고위층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금단의 공간이다.
본사 전경은 멀리서 봐도 그 크기와 규모에 압도당할 만큼 웅장하다.
넓게 펼쳐진 정문 앞에는 대형 분수가 흐르고,
주위를 감싸는 조경은 최고급 조경사들이 관리하는 정원처럼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최상층 부회장 집무실,
박명진과 형진자산운용 송진우 대표가 뭐가 그리 좋은지 희희낙락하며 이야기 중이다.
“현재까지 모집된 펀드 규모는 어때?”
“생각보다 많이들 몰리고 있는 중이야. 벌써 규모가 5조원으로 늘었지. 하하하하.”
“이야, 그 정도면 엄청난 성공인데? 우리가 성공보수를 20퍼센트 먹도록 되어 있나?”
“그렇지. 기본 보수 1.5퍼센트에 성공보수 20퍼센트. 기본보수만 750억에 해외자원개발이 잘되어 더블이 되면, 1조원이 성공보수가 되는 거야.”
“캬, 그 정도면 내가 회장으로 추대되는데 훼방 놓을 놈들이 없겠군. 으하하하하.”
“1년 뒤에는 네가 회장이 되고, 내게는 부회장 자리를 주는 거 맞지?”
“아, 그럼. 당연하지. 날 회장으로 만든 일등공신인데. 어차피 준혁이도 정신병원에 갇혀버렸으니 말이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 세상이 오는구나. 하하하.”
박명진 부회장.
형진그룹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동생 박준혁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측근을 시켜 미국 내 외딴 정신병원을 찾아내,
박준혁을 그곳에 강제로 입원시켜 버린 인물이다.
부친이자 회장인 박재동은 중환자실에 입원한지 6개월째다.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에게 아직까지 회장 자리를 물려주지 않는 아버지가 원망스럽기 짝이 없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와 어머니는
장남인 자신보다 차남인 박준혁을 더 좋아했다.
마음도 여리고 우유부단한 녀석을
뭐가 좋다고 그리 감싸고 도는 건지···
특히, 어머니 이선화 여사의 준혁에 대한 사랑은 아니꼬울 정도였다.
장남인 자신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은 어머니가 아버지 이상으로 눈엣가시다.
심지어 준혁이 미국에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다음에도
심복을 시켜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다고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우습기 짝이 없다.
어차피 대세는 기울었고,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 굳게 믿고 있다.
박명진은 천성적으로 그런 인간이다.
그릇의 크기는 생각하지 않고,
욕심만 많은 전형적인 인간,
그게 박명진의 본색깔이다.
박명진의 집무실.
단순한 사무공간을 넘어,
재벌가의 권력과 부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집무실의 바닥은 고급스러운 흑단 나무로 제작된 원목이 깔려 있어 부드러운 광택을 뽐내며,
벽면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차가운 우아함을 자아낸다.
벽을 따라 배열된 현대 미술 작품들은
세계적인 경매에서만 거래되는 희귀한 작품들로,
가치가 수십억 원에 달한다.
한강과 남산타워가 동시에 보이는 이 곳에서 박명진은
도시의 흐름을 지켜보며 형진그룹의 미래를 구상(?)한다.
집무실 한쪽 벽면은 대형 미디어 월로 꾸며져 있어,
실시간으로 그룹의 주식 현황,
국제 경제 지표, 뉴스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박명진이 전 세계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결정권을 행사하는 중요한 도구···기는 개뿔, 그냥 멋들어진 장식품이다.
비밀 서재로 이어지는 문은 벽의 일부분처럼 숨겨져 있는데,
서재에는 형진그룹의 중요한 문서들과 비밀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곳엔 박명진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금고와,
그룹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계약서들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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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진그룹 산하 형진자산운용 대표 송진우.
오랜 친구이자 동업자인 박명진 부회장과 함께 해외 자원 개발 펀드를 조성했다.
펀드는 아프리카와 남미 같은 신흥 자원 시장의 유망한 광산 개발 사업에 투자하여 빠른 수익을 내세우고 있다.
유명 경제전문가나 금융전문가들을 동원해
언론과 미디어를 통해 '형진자산운용' 펀드의 안정성과 높은 수익률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펀드 모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
송진우는 각종 투자 설명회를 통해 개인 및 기관 투자자들을 유치했다.
박명진 부회장도 재벌 그룹의 연줄을 이용해 수많은 기업들로부터 투자를 유치했다.
실제로 매 분기별로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익을 제공하면서
펀드의 신뢰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펀드가 성공적인 것처럼 보이자 대형 기관 투자자들까지 몰리며,
펀드는 단기간에 5조 원 규모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를 자축하기 위해 집무실에서 와인을 마시며,
두 사람이 신나게 떠드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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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펀드는 실제로 해외 자원 개발에 투자된 것이 아니다.
신규 투자자로부터 받은 돈을 기존 투자자들에게 이자로 지급하는,
폰지 사기로 운영되고 있는 중이다.
실질적인 해외 자원개발 사업도 없는데···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투자금이 고수익을 내고 있다고 착각하고,
더 많은 자금을 투자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든 펀드 구조를 기획하고 그림을 그린 사람이 송진우 대표와 측근들이다.
그들은 언필칭 금융 전문가들이다.
아주 교묘하게 사기치는 놈들···이, 금융 전문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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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글로벌에서 김민수 상무가 수혁에게 최근의 이슈에 대해 보고하는 중인데,
아주 희한한 이야기를 한다.
이현석 상무와 이준혁 부장도 동석해서 함께 이야기하던 중이었다.
“그러니까, 형진자산운용의 5조짜리 펀드가 폰지 사기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자료들을 면밀히 살펴보니,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섞여 있더라고요. 해외 자원개발을 실제로 진행하는 것처럼 꾸미는 사기 구조는 복잡한 단계와 세밀한 조작을 통해 투자자들을 속이고 자금을 빼돌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허위 자료, 가짜 계약서, 현장 조작 같은 게 필요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신뢰를 쌓고 투자금을 유치한 후 사기를 저지르게 되는 거죠. 해외 자원개발 사기를 실제로 진행하는 것처럼 꾸미는 구체적인 구조도 아주 정밀합니다. 대충 봐서는 파악하기 힘든 구조랄까요?”
“주로 신흥 시장이나 경제적으로 덜 발달된 국가에서의 자원 개발 사업을 표적으로 삼습니다. 특히 금, 은, 희토류, 석유, 천연가스와 같은 고부가가치 자원을 이용해 투자가치를 높입니다.”
“그러고는, 자원 개발 프로젝트에 대한 고급스러운 제안서를 제작합니다. 제안서에는 예상 자원 매장량, 채굴 가능성, 현지 정부와의 계약 체결 여부 등이 포함되죠. 모두 허위 자료나 과장된 정보입니다.”
“실제 자원 채굴 현장처럼 보이도록 일부 현장을 대여하거나 조작도 하죠. 기계와 채굴 장비를 설치해 임시로 운영하는 척하며, 허위 보고서와 사진을 만들어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주는 자료로 활용합니다.”
“심지어 현지 정부나 기업들과 가짜 계약까지 맺는 거죠. 주로 협조적인 현지 업체를 활용하거나 허위로 존재하지 않는 회사와 계약을 맺은 것처럼 꾸밉니다. 계약서에는 자원의 매장량과 향후 개발 계획에 대한 정보를 포함해 투자자들을 안심시킵니다.”
“지질학자나 채굴 전문가들이 작성한 것처럼 보이는 허위 지질 조사 보고서나 자원 매장량 평가서도 준비합니다. 이를 통해 투자자들에게 채굴 잠재력과 이익을 과장합니다.”
“이야, 정말 대단한 인간들이 많네요? 그런 정도의 잔머리면··· 정상적으로 기업 활동을 하더라도 대기업으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죠.”
“뭐, 떼돈을 버는 손쉽고 빠른 길로 가고 싶은 거죠. 개발 프로젝트의 회계 감사를 받는 척하며, 허위 자료를 기반으로 회계 감사 보고서까지 만들죠. 이런 보고서는 재무적 안정성과 투자수익률을 높게 평가받은 것처럼 투자자들을 안심시키는 역할이죠.”
“심지어 유명 언론사와 금융 관련 매체에 가짜 프로젝트 성공 사례를 홍보합니다. 현지에서 자원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언론을 통해 퍼뜨리고, 유명 인사를 내세워 프로젝트의 신뢰성을 높이는 거죠.”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투자 설명회를 개최해 고수익을 약속하며, 성공적인 채굴과 현지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허위 사실을 널리 알립니다.”
“그렇게 해서 어느정도 모집이 되면, 신뢰를 얻기 위해 투자자들에게 일정한 이익을 돌려주기도 하는 거죠. 이후 대형 투자자나 기관 투자자들을 유치해 대규모 자금을 모으는 단계로 가고요. 자원 개발이 완료되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것이라고 유도하여 투자자들이 더 큰 자금을 투입하도록 만듭니다.”
“송진우와 박명진의 관계는 어때요? 송진우가 그림을 그리고 폰지 사기를 주도한다면, 박명진의 협조 없이 불가능하잖아요. 둘이 공범 아닌가요?”
“그게 바로 송진우의 강점으로 보입니다. 박명진의 약점을 제대로 틀어쥔 거죠. 조만간 펀드의 성공에 힘입어 박명진이 회장으로 추대될 걸로 대내외적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공범이라기보다는 이용당한 거다?”
“제가 보기엔 그렇게 보입니다. 박명진이라는 인간이 장남이자 경영권 승계의 일순위자 임에는 틀림없었지만, 박재동 회장은 박명진의 그릇 크기가 너무 작아서 우려를 많이 했다고 들었거든요.”
“그릇의 크기요?”
“네. 박명진의 그릇이 형진 그룹을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다는 의미죠. 박명진의 그릇으로 보면, 비즈니스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차라리, 동생인 박준혁처럼 회사 경영에 관심도 두지 않고 오너가 일가로 즐기면서 살아가는 게 좋았다는 거죠.”
“동생인 박준혁은 마약에 빠져 살지 않았어요?”
“마약에 빠지면 혼자만 피해 보고 말지만, 그릇이 안 되는 사람이 커다란 조직을 감당하면, 수만 혹은 수십만명의 피해자를 속출하게 된다는 거죠.”
“하긴, 그런 관점이 맞겠네요. 송진우와 패거리들이 투자자들과 박명진 몰래 지금 열심히 펀드 자금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겠네요?”
“그럴 걸로 보입니다. 조세 피난처에 다수의 차명 계좌를 개설해 투자금을 은닉하고, 자금을 여러 계좌로 분산해 추적을 어렵게 만들고 있을 거 같습니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해 자금을 복잡하게 이동시키고, 마치 개발 자금이 사용된 것처럼 조작된 회계 장부를 남기겠죠. 자금 세탁을 통해 자산을 여러 국가로 분산시키고요.”
“나중에 자연스레 펀드 자금이 펑크가 나니, 사람들이 알게 되지 않나요? 그렇게 되면, 송진우는 물론이고 박명진도 궁지에 몰리는 거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이 녀석들이 사기 전문가들인 겁니다. 자원개발 프로젝트가 일정 수준 진행된 것처럼 보인 뒤에, 적당한 시점에 가서 현지에 정치적 혼란이나 자연재해 등을 이유로 개발이 중단되었다고 몇 단계에 걸쳐 발표합니다. 이를 통해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할 수 없도록 핑계를 대고 시간을 질~질 끌면서 도망칠 궁리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투자자들에게 자금이 날아갔다는 통보를 하겠네요? 주요 인물들은 미리 준비한 해외 도피 계획을 실행하고 말이죠.”
“맞습니다. 남태평양 어딘가에 숨어서 꼬불친 비자금으로 떵떵거리며 살겠죠. 아주 대단한 크기의 그릇들 아닙니까? 하하하.”
“그거 참··· 그릇의 크기로 반어법적으로 비유하니, 박명진 부회장과 비교되어 그럴싸하네요.”
- 작가의말
새해에도 열심히 달려보겠습니다.
추천과 선작 꾸욱~!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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