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0화: 복수

“뭐라고? 박준혁이 탈출했다고?”
박명진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안민기 비서실장의 말을 듣고는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쾅~! 쾅! 쾅!
이마를 찌푸리며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대체 미국 정신병원 놈들은 뭘 하는 거야? 무슨 일을 그따위로 처리한단 말이야! 돈은 그렇게 많이 받아 쳐먹으면서 말이지.”
안민기가 긴장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재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부회장님. 아직 구체적인 탈출 경로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누군가 특수팀을 고용해서 탈출을 도운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명진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방을 가로지르며 씩씩거렸다.
“그 놈을 미국 오지에 가두면 모든 것이 안전할 줄 았았더니··· CCTV 같은 걸로도 파악이 안 된다고?”
“모두들 강도처럼 복면을 쓰고 무장한 상태였답니다.”
박명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안민기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당장 연락해. 미국 쪽 병원 놈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라도 사냥개를 고용해 미국에서 뜨기 전에 찾아내라고. 우리가 들인 비용이 얼만데,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다니!”
"예, 부회장님. 즉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또한 저희 쪽에서도 박준혁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가능한 모든 경로를 추적하겠습니다."
박명진은 한숨을 내쉬며 앉았다.
“환장하겠네. 또 변수가 생기다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해야 한다. 어디로 도망쳤든, 다시는 나를 위협할 수 없도록··· 아예 없애버려.”
안민기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방을 나갔고,
박명진은 깊은 분노 속에 잠겨 있다.
송진우가 자신을 뒤통수 친 것도 그렇고,
박준혁의 탈출도 그렇고.
맘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
**
박명진이 분통을 터뜨리는 그 시각,
박준혁은 이미 한국에 입국한 상태였다.
이수민 과장이 준비를 치밀하게 한 상태여서
준혁의 신분증까지 위조해 놓은 상태로 어렵지 않게 미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에 입국한 바로 그날 밤,
숨쉴 틈 없이 밀어붙였다.
**
한남동 고급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박명진의 저택.
위엄과 권력을 상징하는 듯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높은 철제 대문과 세련된 석조 담벼락이 주위를 감싸고 있고,
문 안쪽으로는 고요하고 정갈한 조경 정원이 펼쳐져 있다.
정원은 계절마다 손질된 나무와 잔디가 조화를 이루며 고급스러움을 더한다.
웅장함에서···
거기 살고 있는 박명진이라는 그릇의 크기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수민과 특수팀원들은 어둠 속에서 신속하고 조용히 접근했다.
박준혁도 그들 뒤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저택 외곽을 둘러싼 경비들은 몇 번의 순찰을 마친 듯 느슨한 상태였다.
팀원이 먼저 경비 한 명에게 다가가 순식간에 기절시켰고,
다른 팀원들이 나머지 두 명의 경비를 손쉽게 제압했다.
경비들이 조용히 처리된 후,
한 팀원이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기 위해 장비를 꺼내 들었다.
전문가다운 손놀림으로
몇 십초 만에 비밀번호 입력 장치를 무력화시키고,
그들은 차분하게 저택 안으로 진입했다.
어두운 복도를 따라
한 발씩 조심스럽게 걸으며 박명진의 침실을 향해 다가갔다.
침실 문 앞에서 잠시 멈춘 이수민은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고,
팀원들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입구 양쪽에 포진했다.
이수민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실 안쪽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던 박명진이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박명진은 벌떡 일어나 침대에 앉은 채
눈을 크게 뜨며 침입자들을 바라보았다.
놀란 기색을 보이는 것도 잠시,
그들 사이에 서 있는 박준혁에게 향하는 순간,
박명진의 얼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으~헉! 준혁아··· 네가 여길 어떻게···?”
박준혁은 싸늘한 눈길로 형을 노려봤다.
“나를 지옥에 빠뜨려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형은 아주 멋진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잘 살고 있었네?”
박명진은 손을 떨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나,
박준혁을 향해 다급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작은 그릇이 잔머리 굴리느라 바쁘기 짝이 없는 표정이다.
“준혁아, 이건··· 오해야. 내가 그럴 생각은 없었어.”
박명진은 두 손을 내저으며 살살 달래듯 말했다.
“이 모든 건 내가 꾸민 게 아니야··· 사실 안민기 실장이 계획한 거야! 그 친구는 항상 너를··· 위험하게 생각했다고. 그래서 네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기획안을 올리고 직접 사람을 써서 실행했던 거야, 난 그런 생각 전혀 없었어!”
박준혁은 그 말에 차가운 비웃음을 날렸다.
눈빛에는 더 이상 형제애나 연민도 없다.
이수민은 냉소적인 시선으로 박명진을 내려다보았다.
“그 말을 믿으리라 생각하십니까, 부회장님? 박실장님을 납치하게 하려고 미국까지 보내놓고 이제 와서 비서실장이 꾸민 일이라니··· 설득력이 전~혀 없군요.”
박명진은 땀을 흘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난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 없었어. 준혁아, 날 믿어줘. 네가 없는 사이 그룹을 지키려고 했을 뿐이야. 내가 널 해칠 이유가 뭐가 있겠니?”
이수민이 박준혁의 손에 권총을 쥐어주었다.
권총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그토록 자신을 처절하게 배신했던 얼굴이···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구역질이 날 지경으로 참기 힘든 상태다.
저런 인간을 형이라 믿고 어릴 때부터 따랐다니···
“형··· 아니지, 박명진씨. 당신이야말로 날 없애고 싶어 했어.”
박준혁은 낮고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다시 돌아오리라고 생각도 못 했겠지? 이젠 내 차례야. 내가 그동안 잃어버린 모든 것, 그리고 네가 내게 가한 모든 배신을 돌려줄 시간이야.”
박명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한 채 창백해진 얼굴로 침묵했다.
박준혁은 차가워진 눈빛으로 총을 든 채 형을 똑바로 응시했다.
침실의 조명은 어둡고,
방 안은 고요히 내려앉은 듯했다.
박명진은 결연한 동생 목소리에
두려움과 경악에 휩싸인 채 멀뚱히 서 있다.
박준혁은 한 걸음씩 천천히 다가가며 말을 꺼냈다.
“박명진씨, 당신이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넣을 줄은 몰랐어. 믿었던 사람에게 이렇게 배신당하면 사람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당신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겠지?”
박명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살살 달래려 했다.
“준혁아··· 아니야, 그럴 생각은 없었어. 오해야, 이 모든 게 오해라고!”
박준혁의 손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말없이 총구를 겨누고,
차분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형을 바라본다.
방 안에는 긴장된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푸슉! 푸슉!
박준혁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겼다.
박명진은 뒤로 휘청이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얼굴에 서린 두려움과 공포의 표정이 사라지기도 전에,
몸이 무기력하게 침대 위로 떨어졌다.
순간,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연기와 함께 퍼져 나가는 약간의 화약 냄새가 방 안에 남았다.
박준혁은 총을 내리며
침대 위에 쓰러진 형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봤다.
차갑고 무표정한 눈빛은 마치 어두운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형의 죽음을 차갑게 담아냈다.
어둠 속에서 박준혁의 얼굴에 가볍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박준혁은 총을 단단히 쥐고 함께 한 걸음씩 침실을 빠져나갔다.
이수민과 팀원들이 박준혁을 호위하고 있었다.
뒤에 남겨진 것은 피가 서서히 번져가는 침대 위의 시체뿐이었다.
뭐가 억울해선지,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
이수민 일행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안민기 실장의 자택도 급습했다.
팀원들은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며 안민기 실장의 자택에 도착했다.
안민기의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간 박준혁.
피곤에 찌든 얼굴로 자신이 죽는 악몽에서 깨어나
물 한잔하고 있던 안민기를 눈앞에서 마주했다.
“허~걱~! 시, 실장님. 여긴 대체 어떻게···”
안민기의 경악과 두려움 어린 눈을 박준혁이 가볍게 흘겨본다.
숨을 몰아쉬며 비겁하게 뒷걸음질 치는 안민기.
박준혁은 싸늘하게 웃으며 총을 겨눴다.
푸슉! 푸슉!
안민기의 머리와 가슴을 관통했다.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게 서서 잠시 흔들리더니,
곧바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박준혁은 냉정한 표정으로 쓰러진 안민기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한마디를 던졌다.
“버러지만도 못한 바퀴벌레 같은 새끼.”
이 말은 마치 끝맺음의 선언 같았고,
방 안은 깊은 정적에 휩싸였다.
박준혁과 이수민 일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착하게 현장을 빠져나갔다.
어둠 속에서 복수는 완성되었고,
그들이 남긴 것은 무너져가는 욕망의 잔해뿐이었다.
**
이수민 과장의 주도면밀함은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팀원들이 떠나자마자
박명진과 안민기의 자택 앞에 트럭이 도착했다.
대여섯 명의 처리반이 내리고 있다.
집으로 들어가 그럴싸한 자살로 위장하기 위함이다.
처리반 트럭은 외관상 평범한 청소대행차처럼 보인다.
트럭에는 로고와 낡은 페인트 자국이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허름한 작업 장비들이 트럭 옆면에 매달려 있어
그 어떤 의심도 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길가에 세워져 있어도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기 쉽고,
청소나 유지보수 작업을 하는 차량으로 보인다.
트럭의 뒷문을 열면,
안쪽에는 각종 특수 장비들이 정리되어 있다.
내부는 일반 청소차와 달리 각종 장비와 소독 장치로 채워져 있고,
고급 방수 캔버스와 특수 세정제가 줄지어 비치되어 있다.
비밀 칸 안에는 혈흔 제거제와, 타이어 자국과 같은 흔적을 없애는 도구들,
그리고 검은 방수포가 가지런히 접혀져 있다.
트럭에는 고정된 작업대와 정밀하게 설치된 조명도 준비되어 있다.
처리반은 이 작업대 위에서 시체를 재빨리 소독하고,
주변의 물건을 재정리하며 신속히 증거를 없애는 데 능숙하다.
벽면에는 자살 위장 작업을 위해 사용되는 장비들이 안전하게 고정되어 있다.
필요시에 어떤 상황에서도 자살로 보이게끔 위장할 수 있는 모든 장비가 준비되어 있다.
트럭 내부의 모든 공간은 은밀하고 효율적인
임시 범죄 현장 청소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리반은 주어진 시간을 절대 초과하지 않도록 신속하고 조용하게 움직인다.
**
다음 날 아침, 뉴스 헤드라인은 박명진 부회장의 자살 소식으로 가득했다.
화면에는 박명진의 고급 저택 외관과
차분한 음악이 깔린 상태에서 기자의 보도가 이어졌다.
"어젯밤, 한남동 자택에서 박명진 부회장이 자살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펀드 사기사건 이후로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회사 관계자는 마지막까지 회사와 투자자들에게 끼친 피해에 대해 깊이 반성하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화면은 박명진의 과거 사진과 성공적인 재벌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추락한 마지막을 조명하며,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함께 사건의 전말을 짧게 요약했다.
하지만 비서실장 안민기에 대한 내용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았다.
보도에서조차 언급되지 않은 채 조용히 사라진 안민기의 존재.
사람들 사이에서 별다른 화제를 모으지도 못했다.
뉴스는 사건의 전말과 박명진의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재벌가의 어두운 추락이라는 주제로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뒤편에서 은밀히 치워진 안민기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과 선작 꾸욱~! 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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