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조건이... 뭔데?

12화
어느덧 모든 수업이 끝나가는 오후.
흐읍- 후우-
아카데미 내 한 수련장에서 유리는 무거운 봉을 들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오후 수업에 참여해야 했지만.
-아 맞다. 교수님이 오후 수업은 쉬고 회복에 전념하래. 수업 끝나고도 찾아올 필요 없다고 하셨어.
루미엘라가 전해준 말 덕분에 유리는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 한가로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칼레온 교수의 걱정과 달리 유리의 몸은 이미 멀쩡한 상태였다.
루나와의 수련에서 오늘처럼 쓰러지는 건 일상이기도 했고,
그로 인해 자체적인 회복력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흐읍- 후우-
덕분에 한가로이 운동을 하는 유리는.
무거운 봉을 들었다 내려놓는 똑같은 자세를 수십 차례 반복하며 자신의 근육을 한계까지 쥐어짜 냈다.
후우- 하아-
쿵!
결국, 한계에 다다른 유리의 몸은 더 이상 봉을 붙잡지 못하고 던지듯 내려놓으며 뒤로 주저앉았다.
“하아아- 맛있었다.”
오늘도 보람찬 운동이었다.
“전에는 팔찌 무게 올려 덤벨 들듯이 했었는데, 여긴 천국이네”
별관의 공터에서 단순 무식하게 훈련하던 것과 달리 아카데미의 수련장에는 여러 운동기구가 비치되어 있었다.
물론 가문의 본관 수련실에도 이와 비슷한 수련장이 있다고는 들었었다.
하지만, 기본부터 배우라는 루나의 몽둥이.
아니 루나의 한소리에 유리는 결국 별관에 공터를 구르고 또 굴렀었다.
그렇게 옛 회상과 쥐어짜지는 듯한 근육의 성장(고통)을 만끽하며 잠시 쉬는 중.
“왜 울었던 거지..”
낮에 있던 일이 생각났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냐는 루미엘라의 물음에.
얼떨결에 분위기에 휩쓸려 유리는 본심을 말했었다.
자신이 왜 그렇게 하는지.
자신의 각오와 다짐을.
그런데 자신의 말을 끝으로 어째서 눈물을 흘린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 타이밍에 갑자기 왜 우냐고 하기도 그렇고,,’
그렇기에 그저 눈물을 닦아주며 짧은 침묵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 후로는 점심시간이 막 끝나갔기에 별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루미엘라는 곧바로 오후 수업을 위해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 때문에 점심도 못 먹었겠네.’
나중에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 *
어느덧 어두워진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숨을 고르듯 희미하게 빛났지만, 보름달과 초승달이 겹쳐진 듯한 기묘한 달만은 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언제봐도 참 신기하네”
이 세계에 온 지 어느덧 1년이 지났지만, 저 달만은 언제봐도 신기했다.
운동에 열중하던 유리는 운동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늦은 시간이 돼서야 저녁을 먹고 근처 벤치에서 쉬고 있었다.
알테리온이나 세리나와 함께 저녁을 먹을까도 했지만,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 혼자 간단하게 해결했다,
이럴 때 보면 휴대폰이 없다는 게 참으로 불편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묘한 달빛 아래에서 소화를 시키던 중,
툭- 툭-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토닥였다.
누구인가 하고 어깨너머를 뒤돌아봤을 때.
콕-
익숙한 손과 앙증맞은 손가락이 자신의 볼을 찌르며.
“콕!”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히시시시-”
장난스럽게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에일린이 서 있었다.
“에일린?”
“웅. 왜 불러. 유리?”
“그.. 아냐 아무것도. 여긴 무슨 일이야?”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냥 갑자기 나타난 에일린이 궁금했다.
“헙! 우리의 약속을 잊어버린 거야!?”
충격이라는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두 눈을 번쩍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짓는 에일린.
“.....”
아.. 약속.
정말 깜빡하고 있어서 할 말이 없었지만.
“에이. 농담이야. 농담.”
다행히 에일린의 그런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무슨 일로 이 늦은 시간에 온 것일까,
궁금했지만 에일린의 이어진 말에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낮에 너 쓰러졌다고 소문이 났길래~
괜찮은지 와봤지!”
그렇게 말하며 에일린은 내 옆에 앉았다.
아.
바로 수련장으로 이동해 하루 종일 수련하고 저녁도 늦은 시간이라 식당에 사람이 얼마 없었어 몰랐다.
“소문까지 날 줄은 몰랐네.
지금은 아주 멀쩡해.
걱정해줘서 고마워. 에일린.”
“흐으음~”
“응?”
“오늘도 그거 끼고 수업들은 거야?”
그게 무엇인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는 에일린.
덕분에 그거라는 게 팔찌와 발찌를 가리킨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아. 그치. 항상 끼우던 거니까.”
“안 불편해?”
“뭐 의자에 앉을 때나, 마차 탈 때 불편하긴 한데.
조절해서 쓰고 있어서 괜찮아”
가끔 너무 무거운 상태로 의자에 앉다가 몇 번인가 의자가 부서진 후.
아이나에게 한 소리 들은 유리는 잠시 어딘가에 앉거나 누울 때도 무게를 조절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거 내가 좀 봐줄까?”
“어? 봐준다니? 아이템을?”
“응!”
그러고 보니 전에 세리나가 해준 말이 생각났다.
에일린이 마법뿐만 아닌 아이템 제작으로도 유명한 천재라는 것을.
“정말? 네가 봐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런 천재가 손봐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팔찌를 쓰다듬는다.
“괜찮지?”
그 후 매혹적인 목소리와 함께 팔찌를 쓰다듬던 손가락은 이내 유리의 피부를 간질이듯 팔을 타고 점점 위로 올라온다.
“조건..? 조건이.. 뭔데?”
“조건은 말이야-”
팔을 타고 올라오던 손가락은 어느새 내 어깨 위에 올려지고,
에일린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는 매혹적인 입술로 속삭이듯 말했다.
꿀꺽-
그 조건이란게 무엇일까..
장난스러운 아이같이 보이던 에일린이 지금은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전혀 다른 에일린의 분위기에 긴장하던 순간.
“콕!”
한순간에 볼에서 느껴지는 감촉.
요망하게 자신의 팔을 간질이던 손가락이.
내 볼을 찌르고 있었다.
“히시시시-”
그런 손가락과 함께 에일린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
순간 무엇을 기대한 걸까..
후회스러우면서도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리 뭘 기대한 거야? 응? 응?”
“.....”
그럴수록 더욱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물어오는 에일린이었다.
“히시시시-”
“.....”
“아~ 재밌었다.”
“.....”
“장난이 너무 심했나?
미안. 미안해.
그래도 아이템 봐준다는 건 진짜니까
너무 침울해하지 말라구~”
이런 장난을 친 에일린과 그런 장난에 쉽게 넘어간 자신을 원망하며 부끄러움에 대답하지 않자.
그런 유리를 달래듯이 에일린이 말했다.
“다음엔 이런 장난 치지마.”
“알았어. 알았어. 노력해 볼게”
어째서 확답이 아닌 노력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이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근데 아이템은 어떻게 하게?”
당장에 부끄러움보다 곧 바뀔 아이템이 더욱 궁금했다.
“전에 대충 봤을 때도 그렇지만, 그 팔찌랑 발찌 무식하게 무게만 늘리는 기능뿐이더라고”
“.....”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런 무식한 아이템을 주문 제작한 게 자신의 누나이기 때문이다.
“무게를 늘리기보단 중력에 압을 가하는 식으로 바꿔서 힘의 부담을 오로지 너에게만 향하게 하는 거지!
그러면 아이템을 낀 상태여도 의자가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그게 가능해?”
“보통은 불가능하긴 한데, 난 가능해!”
역시 천재라는 걸까..
그저 장난만 치는 줄 알았던 에일린이 다시 보였다.
‘아.. 맞다. 에일린 차석이었지’
“근데 조건 있는 건 여전하다구~”
조건이란 말에 유리는 엉덩이를 살짝 밀어 조금 떨어져 앉았다.
“조건이... 뭔데?”
“에이. 그렇게 경계할 거 없어.
이제 장난 안 칠게.”
“.....”
조건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몸이 움찔했나 보다.
“그냥 나중에 부탁 하나 들어줘~”
“부탁? 무슨 부탁인데?”
“그건 비~ 밀~”
“음.. 내가 할 수 있는 거지?”
“응응. 당연하지.”
“뭐 그런 거라면 상관없어”
마탑의 천재이자 유망주가 아이템을 봐준다는데 뭔들 거절하랴.
그저 새로워질 아이템이 기대되기만 했다.
* * * * *
다음 날 아침
유리의 아침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매일 일상과도 같으면서도 필수 루틴으로 자리 잡은 시작이지만 오늘의 달리기는 평소보다 더욱 가벼웠다.
그 이유는 허전한 팔과 다리.
평소 속옷과 옷을 입듯이 언제나 함께 착용했던 팔찌와 발찌였지만.
어젯밤 아이템 개조를 위해 에일린이 가져갔기 때문이다.
근 1년간 매일 착용하여 자신을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지니 몸이 매우 가볍게 느껴지지만 허전한 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1년간의 수련에서도 수련의 막바지쯤에야 루나와 대련을 할 때만 잠시 벗어두던 팔찌와 발찌를 지금은 아예 벗어두고 생활을 하니 자꾸 뭔가 빠진 듯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허전하면서도 가벼운 아침으로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어제와 같이 루미엘라와 마주쳐 가벼운 잡담과 함께 달리는 것을 이어갔다.
루미엘라와 함께 달리며 기회를 엿보아 어제의 일을 물어보고 싶었으나 무언가 사정이 있을 거 같은 생각에 차마 물어보지는 못해 아쉬웠다.
그렇게 아침 운동을 마무리하고 아직은 추운 날씨에 서늘해진 몸을 뜨거운 물로 달래며 샤워를 마친 유리는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교복으로 갈아입어 기숙사를 나섰다.
‘오늘은 사고 치지 말아야지..’
팔찌와 발찌를 차지 않아 가벼운 몸으로 기숙사를 나서는 유리는 어제와 같이 수업 중에 쓰러질 정도로 무리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1년간의 수련에서 도중 쓰러지는 것은 일상과도 같았지만, 수업 중에 그러는 것은 괜히 여러 사람 걱정하게 하는 거 같아 괜히 미안한 기분이었다.
이튿날의 아카데미 수업을 위해 상급반에 도착한 유리는.
“왔어? 유리.”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유리는 오늘도 일찍 온 알테리온에게 인사하려 했다.
그런데 평소와 다른 알테리온의 모습에.
“어? 알테리온..?”
- 작가의말
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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