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사랑 - 6
호텔 지하에 있는 조식 뷔페에 진과 겨울 그리고 수진이 있었다.
수진은 어제 입었던 짧은 옷 대신 겨울이 가져온 옷을 입고 있었다.
가게 문이 열리자마자 사 온 두툼한 니트와 안에 솜이 들어간 청바지였다.
"괴물이 잘 처리됐다니 다행이네요."
진의 말을 들은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소원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긴 했지만, 자기 말을 안 들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데 제가 뭘 어떡하겠어요?"
수진이 잼을 바른 식빵을 집어 입에 넣었다.
"죽이겠다고 협박했어요? 그게 정말이야?"
겨울은 진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시리얼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하여간, 여자를 대할 줄 모른다니까. 괜찮아요?"
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생각이에요? 다시 술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에요?"
"아뇨, 공부를 해 보려고요. 잘 될진 모르겠지만..."
"알코올 중독은 어쩌고요?"
수진의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병원이라도 가보죠. 뭐."
수진이 싱긋 웃으며 남은 빵 조각을 집어 먹었다.
"괜찮으시면 저희 쪽에서 같이 일하실래요? 알코올 중독이 나을 때까지 도와드릴 수 있어요."
진의 말에 수진은 겨울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괴물을 잡는 데 할 일이 있을까요?"
"아뇨, 괴물을 잡으러 다니라는 게 아니라 마트 직원이 되라는 이야기에요."
"마트 직원이요?"
"철호가 운영하는 마트가 있어요. 거기서 일해요. 괜찮으면 근처에 지낼 곳도 마련해 줄게요. 병원비도 지원해 드리고요."
"예? 왜 그렇게 까지..."
"중독이라는 게 쉽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잖아요. 그렇지?"
진이 겨울에게 말했지만, 겨울은 대답하지 않고 시리얼만 퍼먹을 뿐이었다.
수진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진을 쳐다봤다.
"... 저기 어제부터 궁금했던 건데 대체 뭐 하는 분들이세요? 괴물을 사냥하러 다니면서 마트를 운영하고 또 이런 고급 호텔의 방을 네 개나 예약하신 걸 보면 돈도 많으신 것 같고... 혹시 국가에서 비밀리에 운영하는 특수부대 같은 건가요? 영화에 나오는..."
진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니에요. 마트는 철호가 혼자 운영하는 거고 괴물 사냥은 겨울이가 혼자 하는 거예요. 제가 종종 도와주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와줄 뿐이죠."
"진 씨는 무슨 일을 하시는데요?"
"지금 제 직업은 탐정이에요."
"탐정이요?"
"네, 해결사라고도 부르죠. 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 뒷조사에요."
"뒷조사요?"
"네, 대부분 불륜 상대에 관한 조사죠. 증거 수집도 같이하고요."
"아, 그렇군요. 들은 적 있어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돈을 많이 버나요?"
"돈은 탐정 일이 아니라 가상화폐로 번 거예요. 탐정 일은 취미에 가깝죠."
"가상화폐요?"
"네, 제일 유명한 가상화폐 있죠? 제일 처음 나온 거. 제가 그 가상화폐를 만들 때 코드를 몇 줄 써주고 보상으로 그 가상화폐를 엄청 많이 받았거든요."
"진짜요?"
"네, 사실 보상이라기보단 반쯤 농담으로 준 거였죠. 제가 코드를 써준 이유도 정식으로 일을 한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가 하는 일을 도와줬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가상화폐가 어느 순간 확 뜨더니 그게 엄청나게 큰돈이 되었죠."
"대단하시네요."
"뭘요. 잔재주가 많은 거죠."
진은 그렇게 말하고 잔을 들어 쓴 커피를 조금 마셨다.
진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가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진을 바라봤다.
"혹시 전 남자친구에 관해 뒷조사 필요하면 이야기해요."
수진은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놈을 죽이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감옥에 가고 싶진 않아요. 저도 제 인생을 살아야죠."
"감옥에 안 가도 죽일 수 있어요."
진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수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하, 농담이에요."
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뒷조사를 하려면 여러 불법적인 일을 하게 되지만, 누굴 죽이거나 하는 일을 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죠. 돈도 많은데요 뭘. 하하."
"..."
수진은 멋쩍게 웃었지만, 이유만 있다면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진은 다시 미소 지었지만, 수진은 진과 눈을 마주치는 게 쉽지 않았다.
"오늘은 한라산에 갈 예정인데 같이 갈래요?"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좀 피곤해서요. 괜찮으면 호텔에서 쉬고 싶어요."
"그래요. 여기 지하에 스파도 있으니까 편히 쉬어요. 겨울아, 너는?"
진이 겨울에게 물었다.
겨울은 시리얼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돌아가야 해."
"어디로 돌아간다는 거야?"
"서울."
"그래? 아쉽네."
진이 다시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데 제주도에 괴물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설마 자전거 타고 여기까지 온 거야?"
"... 누가 알려줬어."
"누가? 아, 잠깐 네 다음 대사가 뭔지 알아. 알 필요 없다고 할 거지?"
겨울이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가는데 내려오는 철호의 모습이 보였다.
"앗, 어디 가세요?"
철호가 겨울에게 말을 걸었지만, 겨울은 그를 무시하고 가버렸다.
철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뷔페에서 진을 찾아 테이블에 앉았다.
니트를 입은 화장기 없는 얼굴의 수진을 본 철호는 그대로 멈췄다.
수진이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철호는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진에게 수진을 마트에서 일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들었다.
부탁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사실 내심 기쁘기도 했다.
수진은 어제 봤을 때보다 더 철호의 첫사랑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어제 불상 앞에서 봤던 살의나 술에 진탕 취해 비틀거리던 모습은 그저 애처롭게만 생각됐고 그 애처로움은 철호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철호는 음식을 가져오면서 자리에 앉은 수진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진이 웃긴 이야기를 했는지 피식피식 웃는 모습이 철호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
수진은 진이 말했던 대로 철호의 마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함께하고 있고 하고 싶어하던 공부도 하느라 근무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수진은 성실히 일했다.
"이건 이쪽에 진열하면 돼요."
철호가 진열장 왼쪽을 가리켰다.
수진은 바닥에 있는 상자를 들어 과자를 하나하나 진열하기 시작했다.
과자 봉지를 든 그녀의 손이 조금씩 떨렸다.
"괜찮아요?"
"... 조금 힘드네요."
철호는 음료를 한 캔 건넸다.
무알코올 맥주였다.
"이건..."
"술은 아니지만, 비슷한 걸 먹으면 조금 나을 것 같아서요. 괜한 참견이었다면 미안해요."
수진은 무알코올 맥주 캔을 받아 들고 피식 웃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섬세한 면이 있으시네요."
철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고마워요."
수진이 철호를 바라봤다.
철호도 수진을 바라봤다.
둘의 시선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진이 불쑥 튀어나왔다.
"오, 이 과자 왔네."
진은 수진이 진열하던 과자를 가득 집어 품에 안았다.
"5봉지 달아 놔."
진은 그렇게 말하고 지하의 아지트로 향했다.
"그, 그럼 마저 진열해 주세요. 전 계산대를 보고 있을게요."
"넵."
철호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계산대로 향했고 수진은 멋쩍게 웃으며 과자를 마저 진열했다.
-
진은 오랜만에 나루가 사는 건물 5층으로 돌아왔다.
하얀 대리석 바닥보다 더 새하얀 소파 위에 긴장된 표정의 나루가 앉아 있었다.
진은 그녀의 옆에 앉아 노트북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나루의 복귀와 함께 공개될 뮤직비디오였다.
제작된 뮤직비디오는 총 3개로 진은 첫 번째 뮤직비디오를 재생했다.
배경은 첩첩산중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이었다.
나루는 짚으로 만들어진 울타리 안 좁은 마당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세월의 흔적과 삶의 고단함이 느껴지는 빛바랜 삼베옷이었다.
특별한 메이크업 없이 민낯에 가까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일부러 헤어를 지저분하게 세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루의 미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특히 강하게 내리쬐는 태양이 그녀를 빛나게 했다.
자칫 허름해 보일 수 있는 펑퍼짐한 옷 속으로 그림자가 생겨 도드라지는 몸매와 초라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을 자아내는 미모가 환한 태양이 비추는 숲의 푸름과 어우러져 쉽사리 눈을 뗄 수 없었다.
"오 좋은데."
시작하는 리듬은 잔잔했다.
화면은 깊은 산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리듬이 좀 더 경쾌해지며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을이었다.
뮤직비디오 속 나루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마을을 거닐며 꿈을 노래했다.
리듬은 편안했고 가사 한 마디 마디가 예뻤고 그걸 부르는 나루의 목소리도 당연히 좋았다.
진은 다음 뮤직비디오를 재생했다.
이번 배경은 궁궐이었다.
화면의 중앙에 나루의 모습이 보였다.
머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피부엔 깔끔한 분칠이 되어 있었다.
특히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몸에 잘 맞춰진 한복이었다.
단순히 현대의 옷처럼 여성의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가리면서 세련 된 선으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모습이었다.
진의 머릿속에 경국지색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진은 뮤직비디오를 정지하고 나루가 입고 있는 한복을 가리켰다.
"이게 그 혜숙 씨가 디자인한 옷이야?"
"네. 어때요?"
"좋은데. 내가 지금까지 봤던 한복 중에 제일 예쁜 것 같아.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겉으로 뽐내고 있다고 할까... 신기하네."
진은 거의 홀린 듯이 한복을 바라봤다.
"나도 한 벌 얻을 수 있을까?"
"일이 다 끝나면 이야기해 볼게요."
"고마워."
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뮤직비디오를 재생했다.
처음 노래가 꿈에 관해 노래했다면 이번 노래는 꿈을 이룬 순간을 노래했다.
화면을 가득 채운 백성들이 나루의 노래와 춤을 보며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건 화면을 보는 진도 마찬가지였다.
나루는 첫 노래보다 밝고 활기찬 멜로디와 힘찬 무용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진은 곧바로 다음 뮤직비디오를 재생했다.
그런데 이번 비디오는 앞의 둘과 다르게 어두웠다.
화면을 채우는 색감 자체는 전보다 더 밝았지만, 빛이 줄어들었다.
내용도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밝은 순간을 담은 앞선 두 개의 노래와 다르게 이번 노래는 절망을 담아내고 있었다.
배경에 깔리는 선율은 경쾌하고 높은음이었지만, 그 음으로 한을 표현 해내고 있었다.
국악 특유의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면 속 나루는 결혼식의 축하 무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하객들은 나루를 보고 박수를 보냈지만, 그녀의 시선은 한 곳을 향해 있었다.
결혼식의 주인공과 그의 아내.
뮤직비디오 속 나루는 최고의 무희가 될 순 있지만, 정말 사랑하는 이의 사랑은 얻을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행복을 빌어주며 춤을 추는 것뿐이었다.
과거 있었던 신분제로부터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사랑.
나루가 이야기했던 한을 그 어떤 상황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밝고 경쾌하지만, 한이 맺히고 몽환적인 멜로디.
춤, 노래.
국악과 나루만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 비디오 너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진은 감상을 마치고 노트북을 닫았다.
"어때요?"
나루가 긴장된 표정으로 묻자, 진이 그녀를 지긋이 바라봤다.
"확실히 아이돌의 여왕이라고 불릴만하네."
"진짜요?"
"그럼, 내가 장담하는 데 이건 무조건 대박 날 거야. 해외에서도 엄청 화제가 될걸."
나루는 그 말을 듣고 활짝 웃어 보였다.
"근데 복귀 무대는 어디서 해?"
"월드컵 경기장이요. 최대한 많은 팬을 만나고 싶어서요."
"오, 티켓팅은 이미 끝났지?"
"네, 하지만 원하시면 표를 구해 드릴게요. 특별석을 마련할 수 있을 거예요."
"아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래요?"
진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오히려 나루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한겨울은 어디 있어요?"
"응? 나보다 먼저 돌아왔는데 연락 없었어?"
" 제가 매일 봄이 사진을 보내고 있긴 한데, 답장이 온 적은 없어요."
"그렇구나. 글쎄... 어디선가 열심히 일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가요.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공연 잘하고."
"넵."
나루가 싱긋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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