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신 - 5
"두려움이 보이지 않는군."
"모르거든."
"모른다라... 허나,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나의 권능 앞에 두려움을 알게 될 것이야."
이슬의 귀에 들려오던 파도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아주 거대한 목제 선박이 집채만 한 파도와 함께 이슬을 향해 돌진 해왔다.
대홍수에서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방주가 그대로 이슬을 박아버렸다.
그녀는 저 멀리 나가떨어져 땅에 추락했다.
헌데, 그녀가 추락한 곳은 서울의 시멘트가 아니었다.
위치는 그곳이 맞았지만, 그녀를 둘러싼 것은 수확 때가 돼서 알이 꽉 찬 밀이었다.
바람에 밀이 스슥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바람은 불지 않았다.
이슬은 곧 그 소리가 바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작은 메뚜기 하나가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잠시 후 수천 마리의 메뚜기가 밀밭을 습격했다.
은은한 갈색빛의 밀밭은 메뚜기떼의 날개에 뒤덮였다.
-
덕만이 성호를 죽이고 이슬과 싸움을 시작했을 때
겨울은 또 다른 괴물을 찾아 달동네에 도착했다.
그는 반쯤 망가진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마침내 산꼭대기 교회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계단 너머로 붉은색 십자가가 보였다.
"저곳이군."
겨울의 어깨에 있는 여름이 그의 볼을 탁 쳐서 맞다고 답했다.
계단 너머는 소란스러웠다.
"여러분 음식은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모여 있는 사람들 너머에서 진목이 소리쳤다.
그의 앞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빵과 레드 와인 그리고 미국식으로 큼지막하게 썰어 낸 소고기 스테이크가 사람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
겨울은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주변에 이상한 것은 없었고 괴물도 없었지만, 이런 달동네에서 만찬을 벌이는 그가 소원의 주인인 것은 확실했다.
'소원이 대체 뭐지?'
진목은 달동네 주민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그걸로는 그의 소원이 뭔지 유추해 낼 수 없었다.
괴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겨울은 일단 사람들 틈에 섞여 줄을 섰다.
줄이 점점 줄어들고 겨울의 차례가 다가왔다.
겨울이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자, 여기 있습니다."
진목은 밝은 표정으로 겨울의 접시에 음식을 담아 줬다.
두툼한 스테이크와 빵을 접시 가득 넘치도록 담은 뒤 한 손에 레드 와인이 가득 담긴 컵을 쥐여줬다.
"저도 받아도 괜찮습니까?"
"네?"
겨울이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바라봤다.
추레한 옷차림, 씻지 못 해 뭉치고 헝클어진 머리와 몸에서 풍기는 악취 그리고 오랜만에 보는 윤기 나는 고기에 뒤집힌 눈알.
그들은 아마 이 달동네에 사는 이들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외부인이었다.
"전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형제님, 저흰 모두 하나님의 자식들이니까요. 그분의 은혜라 생각하시고 맛있게 드십시오."
진목은 겨울이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도 묻지 않고 그저 미소로 대했다.
겨울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빵은 담백하고 고소했다.
은은한 버터 맛이 혀를 감쌌다.
고기는 그가 먹은 어떤 스테이크보다 더 부드러웠다.
씹기도 전에 흩어지는 느낌이었다.
겨울은 와인을 들어 조금 마셨다.
입안 가득 포도 향이 퍼지고 목 넘김이 아주 부드러웠다.
겨울은 저도 모르게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빵을 먹고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접시를 다 비운 뒤에야 그는 정신을 차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목에게 다가갔다.
"접시는 이쪽에 두시면 됩니다."
겨울은 빈 접시가 쌓인 곳에 접시를 내려놓고 진목에게 다가가 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러시죠?"
"괴물을 보..."
"어이!"
겨울의 등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앞니가 하나만 남은 노인이 노란 테이프를 칭칭 감은 전동 휠체어를 탄 채로 진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남의 집 앞에서 뭐 하는 짓거리야!"
그는 진목에게 삿대질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진목은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노인에게 다가갔다.
"형제님, 진정하시고 함께 식사라도 하시지요."
진목이 음식을 가리켰다.
꽤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받아 갔는데도 그 양이 전혀 줄어들지 않은 상태였다.
"니미럴, 진정하긴 뭘 진정해!"
노인이 전동 휠체어를 진목의 앞으로 움직였다.
"이 좆같은 예수쟁이 새끼! 지금 당장 내 집 앞에서 안 꺼지면 확 불 질러 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
진목이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있는 곳은 노인의 집 앞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진목의 교회 앞이기도 했다.
게다가 노인이 사는 집은 무허가 건축물이었고 진목은 정식으로 교회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목에게 죄는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전동 휠체어 옆에 달린 지팡이를 들고 진목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입으로는 침을 튀기며 욕을 뱉어 댔다.
하지만 진목은 그런 그를 미소 지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진목이 앞으로 다가갔고 노인이 휘두르던 지팡이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아픈 기색도 없이 지팡이를 잡아 노인에게 부드럽게 빼앗았다.
"예수님께서는 오른쪽 뺨을 맞았으면 왼쪽 뺨을 들이대라고 하셨지요."
진목이 고개를 저었다.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문장이지만, 전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더라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이지요."
노인이 벙찐 표정으로 진목을 바라봤다.
진목은 뒤로 돌더니 소리쳤다.
"여러분!"
사람들의 시선이 진목에게 집중됐다.
"제가 지금부터 기적을 보이겠습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것처럼요."
'기적?'
겨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진목을 바라봤다.
진목은 빼앗은 지팡이를 노인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뭐, 뭐 하는 짓이야!"
노인이 소리쳤다.
그러자 진목이 지팡이를 거뒀다.
"이제 이건 필요 없을 겁니다."
"뭐?"
"일어나 보시지요."
"무슨..."
노인은 다시 소리치려 했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생 막장의 깡패들과 달동네의 정신 이상자들이 모두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의기소침해진 표정으로 천천히 전동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그의 왼쪽 다리는 몸을 전혀 지탱하지 못했었다.
오래전, 공장에서 일할 때 오염된 철근에 찔리고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신경이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목의 축복을 받은 지금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노인이 놀란 표정으로 자기 왼쪽 다리를 어루만졌다.
"말도, 말도 안 돼..."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진목을 바라봤다.
진목은 웃었다.
성경 속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자비로운 미소를 보였다.
진목은 다시 뒤로 돌아 소리쳤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조용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함께 치기 시작했고 겨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박수와 찬사를 보냈다.
"여러분 기적은 존재합니다. 우리들을 굽어살피시는 하나님의 권능은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먹은 음식도 지금 보신 기적도 모두 실제로 존재합니다. 여러분, 이래도 아직 하나님을 믿지 못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이제 믿으시지요?"
"네!!"
진목은 감격한 표정이었다.
30년 만에 드디어 믿음을 잃은 이들이 믿음을 되찾게 했다.
신이 되어서 권능을 보임으로써 어린 양들을 구원의 길로 이끌었다.
"모두 기도합시다. 아멘."
"아멘."
사람들이 양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휠체어에 의존하다 진목의 기적으로 일어서게 된 노인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아멘."
그 순간 하늘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덕만이 이슬을 상대하며 만든 바로 그 먹구름이었다.
겨울은 그 먹구름의 정체는 몰랐지만, 대낮에 예고도 없이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이 괴물의 짓이란 건 알고 있었다.
먹구름 속에서 천둥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아주 강한 번개가 내리치고 뒤이어 천둥의 굉음이 들려왔다.
이슬을 직격한 바로 그 번개였다.
"비가 올 것 같군요. 여러분, 식사를 마치셨으면 모두 돌아가십시오. 예배 시간은 내일 아침 9시입니다. 조금 늦어도 좋으니 느긋하게 오십시오."
사람들은 하나둘 돌아가기 시작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욕지거리를 내뱉던 노인은 진목에게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목사님."
"별것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 중 하나일 뿐이지요. 내일 예배에 꼭 나오도록 하세요.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노인이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 교회 앞엔 겨울과 진목만이 남아 있었다.
"형제님은 이곳에 사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죠?"
진목의 물음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산이 없으신 것 같은데 비가 그칠 때까지 교회 안에 있다 가시지요."
"... 비는 안 올 겁니다."
"예?"
"저건 비구름이 아닙니다."
"저 먹구름이 뭔지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저건 괴물이 만들어 낸 겁니다."
"괴물이요?"
"소원을 이뤄주는 괴물이 만들어 낸 거죠. 당신의 소원을 이뤄준 괴물과 같은 괴물이요."
"... 뭐라고요?"
"당신의 그 힘. 줄어들지 않는 음식으로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앉은뱅이를 일으킨 그 힘. 괴물이 줬잖습니까."
"괴물이라니요. 이건 천사님이..."
"천사? 그런 모습을 하고 있나 보군요. 지금 어디 있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그 괴물을 죽여야 합니다."
"죽이다니, 천사님을요? 도대체 왜죠?"
"그건 천사가 아니라 괴물이라고요. 그 괴물은 곧 당신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할 겁니다. 당신이 죽고 나면 그 생명력으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고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때 먹구름에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겨울과 진목이 고개를 돌려 빛을 바라봤다.
아주 거대한 눈알이 보였다.
진목이 천사로 알고 있는 괴물과 유사한 모습이었지만, 훨씬 거대했다.
검은 날개가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새하얀 날개 8개를 가지고 있었고 검은 눈동자 대신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진목은 입을 떡 벌린 채로 괴물을 바라봤다.
"저, 저게 그 괴물입니까?"
겨울은 그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는 진목보다 더 놀란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름의 힘을 이용하지 않고도 괴물의 빛이 보였다.
괴물은 완전히 성장한 상태였다.
'말도 안 돼.'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이슬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어떡하지? 저걸 어떻게 막아야 하지?'
겨울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의 힘은 이슬보다 훨씬 약했다.
애초에 이슬도 완전히 성장한 괴물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가 절망한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거대한 방주가 허공에서 튀어나왔다.
방주는 거대한 눈알의 앞을 지나고 사라졌다.
이슬이 그 방주에 치여 날아갔지만, 겨울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뒤이어 메뚜기떼가 나타났다.
메뚜기떼는 처음엔 검은 먼지 같았다.
그런데 그 먼지가 점점 촘촘해지더니 하늘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추락한 이슬이 있는 곳이었다.
겨울은 거대한 방주와 메뚜기떼를 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절망감이 그를 덮쳤다.
'이... 이 세상도...'
떠오른 공포로 그의 몸이 떨렸다.
그때 진목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형제님 정신 차리세요."
그는 자세를 낮춰 겨울을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다시 설명해 주십시오."
겨울이 진목을 바라봤다.
진목의 등 뒤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겨울에게 그 빛은 그 어떤 빛보다 더 밝아 보였다.
거대한 눈알이 내뿜는 빛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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