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계의 괴물 사냥꾼 - 14

지호는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눈앞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저기요?"
지호가 소리쳤지만, 소리는 울리지도 않고 사라졌다.
"아니, 여긴 도대체 어디야?"
지호가 새하얀 공간에서 방황하던 그때 웅이가 지호의 등을 코로 툭 쳤다.
"어, 웅아!"
공허한 공간에서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
하지만 큰 위안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하얀 공허에 있었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전혀 몰랐다.
"어?"
그렇게 멍하니 서 있던 지호의 눈에 꾸물거리는 검은 물체가 보였다.
검은 물체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지호가 조금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검은 물체가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고 지호가 고개를 숙여 그걸 바라봤다.
뱀처럼 긴 몸.
절지동물 특유의 외골격이 여러 마디 이어져 그것을 감싸고 있었다.
그 옆으론 수십 개에 달하는 다리가 꿈틀댔다.
"지네잖아? 소장님의 괴물이야."
지호는 무릎을 꿇고 지네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지네는 대답도 움직임도 없었다.
대신 지호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지네가 순식간에 지호의 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으어어!!"
지호는 깜짝 놀라 다리를 털어 냈지만, 지네는 수십 개의 다리를 이용해 버텼다.
지네는 다리와 몸을 지나 지호의 팔에 올라탔다.
"으아아 떨어져!!"
지호가 팔을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지네는 여전히 딱 붙어 있었다.
그리고 이빨을 박아 넣었다.
지호의 두꺼운 옷을 뚫고 피부를 파고든 이빨이 독을 뿜어냈다.
"끄아아악!!"
지호가 지네를 잡아 집어 던졌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피부를 한 겹 벗겨내 불로 지지는 격통이 작렬했다.
"으아아악!!!"
지호는 고통에 절규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피가 거꾸로 솟았고 심장이 쾅쾅거렸다.
지호가 지네에게 물린 자리를 바라봤다.
이빨이 박힌 부분에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타오르는 불꽃은 없었다.
대신 전에 불꽃으로부터 입었던 화상이 보였다.
끔찍한 고통이 지호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9살, 불타는 집안에서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거센 통증이 흉터가 아래를 강타하고 있었다.
지호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팔에 그 흉터는 소방관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훈장 같은 거야.
겨울의 목소리가 귀를 맴돌았다.
지호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불타 무너지고 있는 건물 안에서 죽어가던 순간.
무너진 잔해를 등으로 받친 채 온몸이 불타고 있으면서도 괜찮다고 말해줬던 소방관의 눈동자.
그 의지, 힘.
-괜찮아, 넌 할 수 있어.
지호는 눈을 떴다.
'이번엔 아무도 날 구해주지 않아.'
눈앞에 검은 지네가 있었다.
'그럴 필요 없어.'
검은 연기가 지호의 몸을 감쌌다.
울부짖던 14살의 소년은 검은 곰이 되었다.
날카로운 발톱, 섬뜩한 이빨, 거대한 육체가 새하얀 공동에 우뚝 섰다.
"영웅으로 살려면, 겪어야 하는 고통이지."
지호는 그렇게 읊조리며 지네를 바라봤다.
아까보다 크기가 좀 더 커져 있었다.
"지금 소장님의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는 모양이네."
그 말에 화답하듯, 지네의 검은 몸에서 얼룩덜룩한 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후우- 널 죽어야 하지만, 미안하진 않아. 상대를 물었다면, 그만한 각오가 있겠지."
지호가 바닥에 검은 발톱을 박아 넣었다.
지네는 와볼 테면 와보라는 듯이 몸을 세워 날카로운 이빨을 보였다.
"으아아!!"
우렁찬 포효와 함께 지호가 달려들어 발톱을 휘둘렀다.
지네는 아무렇지 않게 몸을 뒤로 굽혀 공격을 피해낸 뒤 지호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목덜미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아까와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피부를 한 겹 벗겨내고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견디지 못해 기절할 수준의 격통이었지만, 지호는 기절하는 대신 이를 악물고 그대로 지네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느새 더 커진 지네는 갑주를 입은 지호의 손에도 한 번에 잡히지 않았다.
지호는 발톱을 지네의 머리에 박아 넣어 간신히 지네를 떼어낸 뒤 반대 손의 발톱을 세워 앞으로 내질렀다.
거대한 곰의 발톱이 지네의 검은 외골격을 꿰뚫었다.
그렇게 꿰뚫은 발톱과 머리를 잡은 손을 반대 방향으로 펼쳐 지네를 두 동강 내 집어 던졌다.
지네는 미친 듯이 꿈틀대더니 잠시 후 움직임을 멈췄다.
"으아아아아!!"
지호가 괴성을 내질렀다.
승리의 포효가 아니라 물린 부분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기합이라도 내지르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지네가 작게 꿈틀거렸다.
'설마...'
'아니지?'
'젠장'
짧은 순간 동안 지호의 감정이 빠르게 변해갔다.
당황, 걱정, 절망.
반으로 두 동강 낸 지네가 꿈틀거리며 재생되기 시작했다.
떼어낸 머리에선 몸이 생겼고 머리가 떨어진 몸에선 머리가 생겼다.
크기도 아까보다 훨씬 커진 상태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지네 하나가 갑주를 입은 지호보다 더 커질 것 같았다.
"후..."
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지호를 노리고 있는 지네의 이빨을 바라봤다.
"그 이빨, 뽑아서 술로 담가줄게. 아직 술을 마셔본 적은 없지만."
지호가 자세를 낮췄다.
"으아아!!"
다시 한번 우렁찬 포효를 내지르며 지네에게 달려들어 발톱을 휘둘렀다.
하지만 지네는 재빠르게 양옆으로 비켜서 공격을 피해내고 지호를 포위했다.
'어딜 막아야 하지?'
오른쪽을 막으면 왼쪽 지네에게 물리고 왼쪽을 막으면 오른쪽 지네에게 물린다.
양쪽 다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몸을 재생시켜 버리니, 평범한 공격은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도대체 내가 뭘 어떻게...'
천천히 다리를 꿈틀거리며 간을 보고 있던 지네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지호는 발톱을 휘두르는 대신 눈을 감았다.
생각을 멈추기 위해서였다.
'괴물의 힘은 본능과 같아. 필요할 때 자연스럽게 나올 거야.'
시각을 차단한 순간.
지호의 감각이 살아났다.
검은 학과 싸울 때 그랬던 것처럼.
지호는 깨어난 본능으로 지네의 공격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착각이라는 건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양옆에서 다가온 지네가 지호의 갑주를 타고 몸을 감았다.
왼쪽 목덜미와 오른쪽 허벅다리에 지네의 이빨이 박혔다.
타오르는 격통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지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그 고통을 받아들였다.
불꽃, 자신을 집어삼키려 했던 불꽃.
트라우마로 남아 악몽으로 몇 번이고 되살아났던 그 불꽃을 고통과 함께 받아들였다.
그리고 피워냈다.
지호가 눈을 뜸과 동시에 갑주가 타올랐다.
빛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칠흑의 불꽃이 지네의 몸을 휘감았다.
지네들은 박았던 이빨을 뽑아내고 땅을 뒹굴었다.
하지만 이미 붙은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그들의 뛰어난 재생력이 꺼지지 않는 불꽃과 만나 끝나지 않는 고통을 선사했다.
미친 듯이 꿈틀대던 지네들의 움직임이 점점 멎어갔다.
피어오른 칠흑의 불꽃은 곧 검은 연기로 승화되기 시작했다.
불꽃이 꺼졌을 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없었다.
지호가 손을 펼쳤다.
몸을 태우던 고통은 이미 사라졌다.
그의 손에서 고통으로부터 피어난 칠흑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후! 후!"
지호는 있는 힘껏 불꽃을 불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휘청거릴 뿐 꺼지지 않았다.
당황한 지호는 팔을 마구 휘둘렀다.
여전히 불꽃은 타오르고 있었다.
"합!"
이번엔 커다란 입에 타오르고 있는 손을 집어넣었다.
치이익-
장작불에 물을 뿌렸을 때 나는 소리가 났다.
지호가 다시 입에서 손을 꺼내자, 타오르는 불꽃이 멎었다.
"휴."
지호는 몸을 한번 털어 내고 갑주를 벗었다.
연기로 변한 갑주는 지호의 앞에서 다시 뭉쳐 웅이가 되었다.
"웅아, 여기서 어떻게 나가는지 알아?"
웅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모르는구나."
지호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여전히 새하얀 공허뿐이었다.
"팀장님!"
"소장님!!"
"살려주세요!!!"
지호의 목소리가 순백의 공동 너머로 사라졌다.
-
겨울은 일호의 연구소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겨울은 연분홍색 소파 위에 앉아 무릎 위에 푸딩을 올려놓고 나루와 겨울이 팔짱을 끼고 있는 웨딩사진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철컥-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나고, 현관문이 열렸다.
나루가 돌아왔다.
"자기야, 나 왔어."
"..."
겨울은 멍하니 나루를 바라봤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고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늦었네."
하지만 나루가 듣기엔 어색하고 딱딱하기만 했다.
"뭐야? 오늘 밤을 너무 기대해서 굳어버리기라도 한 거야?"
나루가 피식 웃으며 겨울의 옆에 걸터앉았다.
나루는 푸딩의 검은 털을 쓰다듬었다.
겨울은 그런 나루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넌 최고의 아이돌이었어."
"뭐?"
"노래, 춤, 사생활 뭐 하나 흠잡을 곳 없는 아이돌의 여왕이었지."
나루가 눈썹을 찡그렸다.
"뭐야 갑자기? 내가 아이돌급으로 예쁜 건 맞지만, 노래는 못 부르는데? 나 음치잖아."
"...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들어주겠나?"
나루가 벙찐 표정으로 겨울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이 양반이 갑자기 미쳤나."
나루가 겨울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뭐 하는 거지?"
"뭐 하긴 너 찌른다."
"그만둬. 그만두라니까."
나루는 겨울의 만류에도 겨울의 옆구리를 멈추지 않고 찔렀다.
겨울은 결국 푸딩을 내려놓고 나루에게서 도망쳤다.
원래라면 간지럽지도 않았겠지만, 지금 겨울의 몸으로는 나루가 손가락으로 찌르는 걸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겨울은 나루를 피해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안방으로 유도당했다.
그는 손을 쓸 틈도 없이 침대 위로 밀어 넘어트려졌고 나루가 그 위로 올라탔다.
나루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겨울을 바라봤지만, 겨울은 여전히 딱딱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답할 뿐이었다.
"..."
나루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데?"
침대에 걸터앉은 겨울은 이불을 어루만졌다.
단색으로 이루어진 다른 가구나 집기들과 다르게 이불에는 아름다운 그라데이션이 들어가 있었다.
에메랄드색에서 루비색으로 별이 박힌 남색의 은하수 색으로.
"오로라가 그려져 있군."
겨울이 나루와 시선을 맞췄다.
"오로라를 좋아하나?"
나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 노래 많이 들었다."
"그래?"
"오로라 노래도 네가 혼자 부른 노래도 전부 많이 들었지. 좋더군. 모두 다."
겨울이 싱긋 웃었다.
나루는 잠깐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음?"
이쪽 세계의 겨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정면에서 나루가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자기야, 왜 그렇게 쳐다보고 있어?"
겨울이 나루에게 말하자 나루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 네이처 모던을 좀 멀리 해야 할 필요가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 빙의 됐던 것 같아."
나루의 말에 겨울이 피식 웃었다.
"무슨 소리야.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잖아. 네이처 모던은 집단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이미 결론 났으니까."
"아냐, 무속 신앙이라는 건 어쩌면 진짜 있는 걸지도 몰라."
"뭐?"
"진짜라니까. 자기, 오늘 완전 이상했어. 갑자기 이상한 소릴 했다니까. 나보고 아이돌이니 노래를 잘 들었다니... 기억 안 나?"
"내가 그랬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네 노래를 잘 들었다고 했을 리는 없어. 네 노래는 진짜 최악이야."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나루가 겨울의 어깨를 밀쳤다.
"삐졌어?"
"흥."
겨울이 방긋 웃으며 나루를 껴안았다.
나루도 빙그레 웃으며 겨울의 품에 안겼다.
두 사람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