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신디 - 1

미국
하늘을 나는 독수리의 자유와 우뚝 솟은 여신상의 자본이 있는 곳.
그런 미국의 심장 뉴욕.
로라는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의 밑에서 태어나 잘 나가는 사립 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서 만난 남편과 결혼한 뒤 힘을 합쳐 맨해튼의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얻어 알콩달콩한 신혼집으로 꾸며 살고 있었다.
얼마 전 그녀는 직장에 휴직계를 냈다.
금융회사에 다니는 남편의 수입이 혼자 가계를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기에 남편과 그녀가 예전부터 품어왔던 꿈을 이루기로 했다.
아이.
로라는 아이를 가지기로 했다.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면 산뜻했고 햇볕이 내리쬐면 상쾌했다.
로라가 할 일은 아름다운 세상에서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코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약간의 빈혈을 앓았기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다.
하지만 몸 상태가 좀처럼 호전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그녀는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재생불량성 빈혈은 골수에서 줄기세포를 만들어 내지 못해서 혈액세포를 제대로 생산할 수 없게 되는 병이었다.
쉽게 말해 피가 부족해지는 병이었다.
때문에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갈 수 있을 출혈도 그녀에겐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결국 그녀는 시술을 통해 생리를 멈춰야 했다.
당연히 아이를 가질 수도 없게 되었다.
그녀는 절망했다.
그리고 그건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원하던 그녀의 남편은 맨해튼의 아파트를 로라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미안해. 당신 잘못은 아니야.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지. 당신도 내가 전부터 아이를 원했던 걸 알고 있잖아."
차갑게 변한 남편의 말에 로라는 고개를 숙였다.
로라는 이혼을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없고 그의 마음 또한 이미 떠나버렸단 걸 알았기에 그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지속적인 검사와 수혈 그리고 막대한 비용을 요구하는 각종 치료들이었다.
그녀는 몇 년 동안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지속했다.
변호사인 아버지는 딸을 위해 수십 개의 사건을 맡아 처리하며 수임료를 벌었고 그녀의 어머니도 교사 일이 끝난 뒤에 부업을 하나 시작했다.
처음엔 로라도 회사로 복귀해 일을 했었지만, 계속되는 치료에도 불구하고 몸 상태가 점점 나빠져 회사 업무는 물론이고 평범한 일상생활까지 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맨해튼의 집은 팔았고 로라는 부모님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부모님의 노후 자금까지 모두 병원비로 들어갔지만, 여전히 그녀의 몸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갑작스레 찾아온 저주에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점점 웃음을 잃어 갔다.
몸 상태는 점점 나빠지기만 했고 점점 더 불어가는 병원비는 늙고 약해진 로라의 부모님들이 견뎌 내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었다.
로라는 결국 포기를 택했다.
그녀가 식탁에 부모님을 앉혀 놓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눈이 내리는 날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이제 됐어요."
"뭐가 말이냐?"
"이제 더는 저 때문에 고생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무슨..."
"병원비로 얼마나 썼는지 기억도 안 나요. 하지만 몸 상태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는 건 확실하죠. 이제 더는 의미 없는 일을 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못 들은 걸로 하마."
로라의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래, 지금까지는 치료가 효과가 없었지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잖니. 어쩌면 이번 치료로 병이 나을 수도 있어."
로라의 어머니가 슬픈 표정으로 딸의 손을 잡았다.
로라는 차가운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럴 리 없어요.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거였으면, 애초에 이 병에 걸리지도 않았을 거라고요."
"듣기 싫다!"
로라의 아버지가 식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뭘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넌 그냥 치료나 잘 받아. 돈, 그까짓 건 얼마든지 벌 수 있다. 다시는 그런 소리 입에 담지도 마!"
로라의 아버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로라의 어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딸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 로라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이 늙은이들이 네가 아니면 뭐 하러 살겠니? 그러지 말고 병이 낫는 거에만 집중하렴."
로라는 미소 지은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로라는 부모님이 잠들었을 때 밖으로 나왔다.
소복이 쌓인 눈을 지나 그녀가 향한 곳은 차고였다.
문에 열쇠를 꽂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둡고 한적한 도로를 지나 밝은 빛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녀가 향한 곳은 타임스퀘어였다.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찬란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보고 싶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조명들이 빛났다.
차 안에 앉아 그 찬란함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핸들을 돌렸다.
그녀는 뉴욕 외곽의 조용한 주거단지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간신히 벽을 짚으며 넘어질 위기를 몇 번이고 넘기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한 아파트였다.
로라의 전남편이 재혼한 아내와 살고 있는 아파트.
그와 연락을 끊은 지는 오래됐지만, SNS를 통해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남편의 눈웃음을 쏙 빼닮은 딸과 자신이 모르는 여자의 보조개를 닮은 아들이었다.
로라는 아파트를 올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 순간만큼은 수년간의 고통이 아득히 멀리 느껴졌다.
그녀는 팔을 펼치고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딱딱한 바닥에 머리가 그대로 부딪쳤다.
차가운 보도블록 사이로 뜨거운 선혈이 스며들었다.
한 송이, 두 송이.
조금씩 떨어지는 눈이 그녀의 몸 위에 쌓였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부족해지는 피와 함께 숨결이 점점 가늘어진다.
차가움도 느껴지지 않게 되던 그때 그녀는 눈을 떴다.
손등에 뭔가 있었다.
검은 덩어리.
핏덩어리처럼 보이는 뭔가가 그녀의 손등에 붙어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민달팽이? 아니야, 이건 거머리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 쇠사슬을 달아 놓은 듯 무겁기만 했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녀의 뒤통수에선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점점 선명해지기만 했다.
추웠다.
춥고 배고팠다.
하지만 그녀를 따듯하게 하고 그녀의 배를 채워줄 수 있는 건 난로와 음식이 아니라 뜨거운 피였다.
"피가... 피가 필요해."
소원을 빌었다.
피가 부족하다면 피를 마실 수 있길.
책 속의 흡혈귀처럼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그녀의 손에 붙은 검은 거머리는 그 소원을 이루어줬다.
고개 돌린 그녀의 눈에 아파트가 보였다.
7층 3호
불이 켜진 집.
그의 전남편이 있는 곳이었다.
그를 사랑했다.
자신을 버린 그를 증오했다.
"하, 하하..."
로라가 허탈한 웃음을 내뱉으며 아파트의 담을 넘었다.
2m가 넘는 데다가 발을 디딜 곳도 없는 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간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봤다.
피부가 조금의 혈기도 없이 창백했다.
하지만 상관없다.
이제 그녀는 곧 생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
-똑
-똑, 똑
그녀의 전남편은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밤.
초대되지 않은 이가 그들의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나야. 로라."
전남편은 문을 열었다.
체인을 건 채로.
하지만 문틈 사이로 들어온 그녀의 손이 체인을 끊어냈다.
남편이 저항하기도 전에 로라의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경동맥을 꿰뚫었다.
창백했던 그녀의 피부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어있던 혈관이 붉은 선혈로 가득 차올랐다.
그녀가 입을 떼자, 전남편은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상황을 살피러 온 그의 새 부인이 로라와 마주했다.
로라는 입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무, 무슨..."
로라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가락을 입술 앞에 가져다 댔다.
"쉿."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
자유의 여신상이 들고 있는 횃불 위.
강바람이 거세게 부는 곳.
눈가에 어둠이 드리운 한 여자가 그곳에 서서 뉴욕의 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은 갈색 가죽 재킷엔 커다란 붉은 색으로 FUCK이라는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그녀는 불어오는 강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대충 넘기고 안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한 손으로 라이터를 들고 다른 손으로 바람을 막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런데 그녀가 담배를 물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퉷."
그녀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냈다.
그리고 앞에 있는 난간을 넘어 그 위에 걸터앉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넘겼던 그녀의 머리가 다시 헝클어졌다.
"이 밤중에 괴물이라니, 기분이 안 좋네."
그녀의 어깨를 타고 기다란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도 기분이 안 좋아?"
검은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해버릴까?"
그녀가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상자를 하나 꺼냈다.
기다란 노란 상자.
붉은 글씨로 작은 글씨가 잔뜩 쓰여 있는 상자 안엔 모르핀 주사기가 들어있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군용 모르핀 주사기였다.
그녀는 그걸 손에 쥐고 등을 아래로 한 채 떨어졌다.
100미터에 가까운 높이에서 자유 낙하 한 그녀의 몸은 여신상 밑에 있는 시멘트 위에 떨어졌다.
밑에 있던 관광객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여자에 화들짝 놀라 웅성거렸다.
"아그극"
괴물의 갑주를 입지도 않은 채 아래로 떨어진 여자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꿈틀거릴 때마다 부서진 뼈에서 으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손에 쥔 군용 모르핀 주사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허벅지에 찔러 넣었다.
꿈틀대다가 부들부들 떨었다.
움직임이 멈춘 뒤로부터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주변에 모였던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양팔을 들고 방긋 웃어 보였다.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저예요. 여러분의 괴물 사냥꾼. 신디."
사람들의 비명에 그녀의 목소리는 묻혔다.
신디는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곤 강을 향해 걸어갔다.
물살을 일으키며 어둠을 헤치고 제트스키 하나가 그녀의 앞에 도착했다.
카르멘 미국 지부 소속 대원으로 괴물 사냥꾼의 이동을 보조하는 사람이었다.
"신디, 괴물이 한 걸로 의심되는 신고가 들어왔어."
"알아, 저쪽에 있어."
신디가 로라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진짜 괴물이었나 보군."
"그래, 빨리 출발하자, 약효 떨어지기 전에 도착해야지."
"... 또 메스암페타민을 한 건가?"
"아니야. 모르핀을 좀 놨어. 키가 200M가 넘는 저 언니야 위에서 빨리 내려오려면 뛰어내려야 했거든."
신디가 실실 웃으며 자유의 여신상을 가리켰다.
"덕분에 척추랑 어깨랑 뭐 여기저기 뼈가 부러졌지. 모르핀이 없었다면 쇼크사했을 거야. 몇 번이고 말해서 질렸겠지만, 정말 부득이하게 발생한 일이라고."
"... 자유의 여신상은 93M야. 그리고 네가 갑주를 입으면 그 정도로 다치진 않잖나."
"무슨 상관이람. 출발이나 해."
신디는 취한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제트스키 위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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