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온 친구 - 3

"오, 온다!"
"다들 진정해! 어차피 우린 시간만 벌면 돼!"
겨울이 꺾인 길로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가 꺾인 길을 돌았을 때 사람들이 서로 팔짱을 껴 만든 바리 케이트가 보였다.
'뭐지?'
겨울은 순간 당황해서 걸음을 멈췄다.
팔짱 낀 사람 중에 두건을 쓴 이들이 보였다.
괴물을 숭배하는 초월교의 열렬한 신자들만 받을 수 있는 두건이었다.
'아, 대충 이해가 되는군.'
겨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가오는 차량의 바퀴를 터트리려 바닥에 스파이크를 깔고 인간 바리 케이트가 되어 길을 막는다.
초월교 광신자들이 할 법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전에 자기들 차량을 차선과 수직으로 세워서 만든 바리 케이트로 괴물 사냥을 방해하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땐 현수가 그대로 액셀을 밟았고 압도적인 엔진의 힘과 특수 제작된 단단하고 낮은 차체가 불도저처럼 그대로 차를 뒤집어엎어 버리고 앞으로 나아갔었다.
차로 만들어진 바리 케이트 조금 뒤에는 선아가 발견한 것과 같은 스파이크도 있었는데, 현수가 차를 720도 돌려 미끄러지듯 피해 냈었다.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나오는 운전 실력이었다.
겨울이 천천히 초월교의 신자들을 피해 측면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그들이 스멀스멀 움직여서 겨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 막겠다는 건가?"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겨울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괴물 사냥꾼은 괴물 사냥꾼이기 때문에 민간인은 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카르멘 행동 강령에도 민간인에게 피해를 입혀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하지만 대상이 고의로 괴물 사냥을 방해하는 등의 행위를 할 경우엔 별도의 허가 없이 제압할 수 있는 특례 조항 또한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셋을 세겠다. 그 전에 비키면 그냥 지나갈 거고. 그렇지 않으면 무력으로 제압하겠다."
무력과 제압이라는 단어를 듣자, 초월교의 신자들은 겁을 먹었다.
이마엔 식은땀이 흘렀고 낀 팔짱을 통해 몸의 떨림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하지만 인간은 혼자선 약할지언정, 뭉치면 강했다.
그들의 결속은 더욱 단단해졌고 무슨 일이 있어도 길을 터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글거렸다.
겨울은 피식하고 그들을 비웃은 뒤 앞으로 다가갔다.
바리 케이트를 친 초월교의 신자들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여러 사람이 모여 시선을 전방에 고정한 상태, 거기다 서로를 붙잡고 있는 상태에서 불규칙하게 뒷걸음질 치면 그 결과는 뻔했다.
초월교 신자들은 얼마 못 가서 뒤로 나자빠졌다.
겨울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들을 넘어갔다.
그런데 한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려들더니, 겨울의 다리를 붙잡았다.
"넌 못 간다!"
겨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주먹을 날렸다.
남자의 인중에 주먹이 명중하자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몇 초 후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입 안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퉤"
남자가 검은 아스팔트 위에 피를 뱉어냈다.
그 위에는 새하얀 앞니도 하나 있었다.
"이, 내 이가!!!"
남자가 소리쳤다.
"치료비는 카르멘에 청구해. 지급해 줄지 어쩔진 모르겠지만."
"이, 이..."
남자가 씩씩거렸다.
겨울은 그를 노려봤다.
그러자, 남자는 겁먹은 개처럼 고개를 숙였다.
"혹시 또 덤빌 사람 있나?"
잔뜩 기합이 들어가 있던 신자들은 어느새 축 처진 상태로 공포에 떨고 있었다.
겨울은 그들을 뒤로하고 괴물의 기척이 나는 곳으로 향했다.
-
겨울이 도착한 곳은 인간 바리 케이트가 있던 곳에서 단 열 걸음 정도 떨어진 초월교의 성전, 쉽게 말해 교회 건물이었다.
"..."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넓은 밖에서야 광신도의 앞니 하나를 뽑는 것으로 끝났지만, 좁은 데다가 건물 구조도 모르는 실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겨울은 전에 다른 곳에 있는 초월교 건물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겨울에게 달려들어 손과 발 심지어 지팡이까지 마구 휘둘렀던 광신도들.
최루탄이 터져서 눈물과 콧물을 쏟으면서도 겨울을 놓지 않던 끈질긴 이들이 떠올랐다.
겨울이 스마트폰을 꺼내 선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말씀하세요.
"지원 요청 좀 하려고."
-넵, 경찰 특공대 쪽에 연락할까요?
"아니, 소방서랑 병원 같은 곳. 구급차가 많이 필요할 거야."
-알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구급차요?
겨울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팀장님! 팀장님!!
겨울이 성전의 계단에 발을 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8개의 계단을 올랐다.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커다란 문 옆에 청동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있었다.
조각상의 형태는 호랑이 같은 네발 달린 짐승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비늘이 있었고 작은 날개도 있었다.
눈은 네 개였고 송곳니는 위와 아래에 6개가 솟아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괴물은 이런 모습인가 보군.'
겨울이 그 조각상을 비웃고 성전의 입구를 밀어젖혔다.
거대한 문이 열리고 성전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이 펼쳐져 있고 그 앞에 겨울이 밟고 올라온 것과 같은 대리석 계단이 있었다.
하지만 직선형이었던 외부의 계단과 다르게 내부의 계단은 나선형으로 위를 향하고 있었다.
계단 위 천장엔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지만, 불이 켜져 있진 않았다.
근처에 있는 작은 형광등들 역시 모두 불이 꺼진 상태였다.
겨울이 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벽에 붙은 스테인드글라스 너머로 약간의 햇빛이 스며 들어왔다.
초록색, 빨간색, 남색의 빛이 새하얀 대리석 바닥에 비쳤다.
겨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문을 열자마자, 광신도들이 뛰쳐나올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내부엔 아무도 없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안내 데스크도 비어있었다.
성전 내부는 퀘퀘한 안개로 가득한 새벽의 거리처럼 어두웠다.
겨울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 위, 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문 안에서 괴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천천히 계단을 밟고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갈 때마다 괴물의 기척이 분명해졌다.
계단의 끝.
예배당으로 향하는 거대한 나무 문
겨울이 그 앞에 섰다.
빛은 벽에 가려져 들어오지 않았고 공간은 고요로 가득 차 있었다.
겨울이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분명 문 너머에서 괴물의 기척이 느껴지는데 이상하리만치 고요했다.
그의 손끝을 따라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갑주의 형태를 갖췄다.
문이 열리고 예배당의 모습이 드러났다.
좌우로 펼쳐진 좌석 끝에 나무로 만들어진 무대가 있었다.
천장에 뚫린 유리창을 통해 햇볕이 들어왔다.
비추고 있는 것은 예배당의 끝, 무대 위에 둥지를 튼 괴물의 검은 고치였다.
무수한 실을 둥글게 감아 둔 것처럼 생긴 고치는 햇볕 아래에서 완벽한 어둠으로 빛나고 있었다.
신자들은 그 앞에 넙죽 엎드려 있었다.
겨울의 등장에도 아무런 움직임 없이 완전히 엎드린 채 괴물을 숭배하고 있었다.
겨울은 천천히 고치를 향해 걸어갔다.
겨울이 고치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을 때, 순식간에 고치가 찢어지며 손이 튀어나와 겨울의 팔을 낚아챘다.
날카롭게 벼려진 발톱이 겨울의 갑주를 파고들었다.
겨울이 팔 부분의 갑주를 벗어 내며 뒤로 물러났다.
괴물의 손에 잡힌 겨울의 갑주가 연기가 되어 흩어졌고 다시 겨울의 팔을 감쌌다.
고치 밖으로 튀어나온 팔이 고치를 움켜쥐었다.
지-
지익-
그 팔이 고치를 잡아당기자, 또 다른 다리들이 툭 튀어나와 고치를 찢기 시작했다.
이내 완전히 찢어진 고치 속에서 괴물과 하나 된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물은 검은 외골격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인간처럼 팔과 다리가 있었고 옆구리에 두 번째 팔이 나 있었다.
등 뒤로 타원형의 물체가 달려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벌과 흡사했다.
하지만 등엔 벌의 날개가 아니라 나비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이마엔 더듬이가 나 있었으며, 스테인드글라스처럼 알록달록한 거대한 눈이 햇빛에 반짝였다.
"내가 왔도다."
옆구리에 달린 팔로 바닥을 지탱하며 괴물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등에 달린 나비의 날개가 천천히 퍼덕였다.
"오오."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오셨나이까!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실 위대한 존재시여!!"
신자들이 황홀한 목소리로 외쳤다.
괴물은 고개를 숙여 그들을 살펴보았다.
겨울은 갑주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푸흡..."
그리고 그들을 비웃었다.
그의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괴물은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눈을 겨울에게 고정했고 신자들은 잔뜩 성난 표정으로 그를 노려봤다.
하지만 겨울은 여전히 큭큭거리며 그들을 비웃었다.
"왜 웃는 거지?"
괴물이 말했다.
겨울은 웃음을 멈추고 답했다.
"그 꼴이 우습지 않나?"
겨울이 괴물을 가리켰다.
"도대체 무슨 소원을 빌었길래 나비 날개를 가진 벌이 된 거지?"
괴물은 말이 없었다.
신자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봐, 너희들은 빠지는 게 좋을걸. 지금까지 너흴 죽인 적이 없지만, 만약 내가 저 괴물을 사냥하는 걸 방해한다면, 그땐 힘 조절 따윈 안 해."
"..."
신자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겨울의 눈치를 살폈다.
"못 믿겠다면 덤벼 보시든가."
겨울이 신자들에게 말하자, 신자들이 움찔했다.
괴물은 땅에 박힌 두 팔을 뽑아내고 다시 땅에 박으며 그들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두려워 말라. 내가 왔으니 그럴 필요 없다."
괴물의 말에 신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울에게 움찔해서 겁먹은 표정을 지었던 이들이 다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더니 넓게 퍼졌다.
겨울을 덮칠 생각이었다.
"그래그래, 마음대로 해. 뭐 밖에 구급차도 와 있을 테니 운이 좋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
"그건 그렇고. 당신들은 무슨 소원을 빌었나?"
신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초월교의 교리에 따르면 괴물 아니, 자네들의 신이 강림하면 신자들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던데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군? 뭣들 하는 거지? 빨리 소원을 빌지 그래?"
겨울이 그렇게 말하고 검지를 펴서 사람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열하나, 열둘. 총 열두 명의 열렬한 신자들과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고 싶다는 소원을 가진 우리 멋진 광신도에게 유언을 남길 시간 정도는 주도록 하지."
겨울의 말이 끝난 순간 괴물이 땅에 박힌 두 번째 팔을 뽑아냈다.
두 번째 팔은 손이 없는 대신 길고 날카로운 송곳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괴물은 그 팔을 겨울의 머리를 향해 찔러 넣었다.
겨울은 고개를 살짝 틀었다.
괴물의 팔은 겨울의 머리를 꿰뚫진 못했지만, 그의 갑주를 뚫고 어깨와 쇄골 사이의 뼈와 근육을 꿰뚫었다.
그런데 괴물이 팔을 뽑아내려고 아무리 움직여도 겨울의 몸에서 팔이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겨울이 고개를 들어 갑주 너머로 괴물을 노려봤다.
"정말, 괴물이 신이라고 믿나?"
겨울이 꿰뚫린 고통에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괴물의 알록달록한 눈은 대답을 피하려는 듯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니."
겨울이 대신 대답하며, 거칠게 몸을 틀었다.
그의 몸에 박힌 괴물의 팔이 꺾이며 우지끈하고 부러졌다.
겨울은 몸을 숙여 뼈를 관통하고 뒤로 튀어나온 괴물의 다리를 붙잡아 뽑아냈다.
상처에서 피가 터져 나와 새하얀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넌... 괴물이 신이라고 믿고 있질 않아."
겨울은 괴물의 팔을 손에 쥐고 괴물에게 겨눴다.
첨예한 송곳의 끝이 괴물을 가리켰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괴물이 부러진 팔을 날개 뒤로 감췄다.
"정말 괴물을 신이라고 믿는다면, 어째서 소원을 이루지 않나?"
"무, 무슨 소리냐? 난 소원을 이루었어... 그래,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소원 말이야!"
"하하, 아니야."
겨울이 고개를 저었다.
"네 놈의 괴물은 성장했지만, 완전해지지 않았다. 그건 네가 의도적으로 소원을 이루지 않길 바라고 있기 때문이지. 네 소원이 뭔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루진 않았어."
"무, 무슨..."
신자들이 괴물을 바라봤다.
그들의 눈에 여러 감정이 아른거렸다.
자신들이 믿어온 것에 대한 의구심.
그들의 앞에 나타난, 신이라 믿었던 것을 향한 배신감.
그리고 그 괴물의 팔을 몸으로 뜯어내 무기로 들고 있는 겨울을 향한 공포감.
"아니다. 아니야! 난 소원을 이루었다고!"
괴물이 격하게 몸을 떨며 부정했다.
하지만 겨울도 열두 명의 신자들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거짓말하지 말고 어디 한 번 소원을 이뤄봐."
겨울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괴물의 팔을 들이밀었다.
괴물은 알록달록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하."
겨울이 실소를 터트렸다.
"죽음이 두렵나?"
괴물은 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아무리 돌려도 툭 튀어나온 형형색색의 눈엔 겨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래 너희들은 결국 그것밖에 안 돼. 남들을 선동하고 거짓된 믿음을 갖게 할 순 있어도 자기 목숨을 걸고 그걸 증명할 용기는 없지. 도대체 뭘 위해 기도를 드렸나? 더 많은 헌금?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들이 가진 결핍을 이뤄줄지도 모른다는 허상?"
신자들은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직접 봤으니, 지금까지 가져온 신앙이 아무 가치도 없는 쓰레기란 건 알았겠지. 너희들이 신이라 섬기며 기도드렸던 존재는 그냥 괴물이야."
신자들이 조금씩 괴물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래, 이제 알았으면 다들 밖으로 꺼져."
신자들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예배당 밖으로 나갔다.
"자, 잠깐...!"
괴물이 신자들을 잡으려 팔을 뻗은 순간 겨울이 달려들었다.
괴물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뻗었지만, 겨울의 손에 들린 괴물의 팔은 이미 괴물의 몸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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