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發展 2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광모가 가고 나서 생각해보니 난 조난 당해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버려진 것이다. 생각해보니 어이 없다. 광모 그 자식은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그냥 가는 게 말이 되나? 갈 땐 가더라도 정류장 앞으로는 데려다 주고 가거나 아님 원천 인근이라도 내려주거나. 이렇게 숲 속에 버려두고 갈 일이냐고.
‘산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꼭대기로 올라가라고 했다. 그래야지 이 곳이 어딘지 알 수 있거든. 내 말을 믿어’
흑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등산같은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해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이런 조난 상황은 처음 경험해 봤기 때문에 뭐라도 의존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런가? 되는 데로 지껄이는 건 아니지?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며.
사실 녀석과 많은 것을 공유하는 나는 흑아도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해야하는 대처법 같은 건 모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혼자 생각하는 거보다 여러 명이 같이 생각하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 까 하는 기대에서 하는 말이었다.
‘닥쳐! 원래 인생 되는 데로 사는 거다. 그리고 너처럼 아무나 믿지 않으며 살아가는 거고, 정 의심스러우면 아래로 가던가.’
기대했던 내가 바보지... 그래도 뭐... 딱히 다른 수가 없으니... 그럴까... 그럼 아래로 가볼까...
그러자 흑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자...잠깐! 오늘만...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까? 네가 그렇게 태세전환을 할 줄 몰랐으니까. 잠깐, 네 놈이 언제부터 내 말에 그렇게 귀를 기울였다고 이렇게 네 멋대로 내 말을 믿는 거냐? 이 건방진 자식아.’
아니... 사람이 믿어 줘도...
‘잠깐. 주인. 꼭대기로 올라가면 체력 손실이 극심하게 일어날 거다. 이런 상황에서는 체력을 아끼는 게 급선무니. 일단은 어디 자리 잡고 쉬고 날이 밝으면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나?’
화랑도 진지한 목소리로 우리의 대화에 가담했다. 안 그래도 심란한 마음. 속에서 내 속도 모르는 두 영이 떠들어 제끼니 혼란스러운 마음이 더 커져만 갔다.
그래서... 뭐가 맞는 건지 둘이 먼저 합의하고 나한테 좀 이야기 해줄래?
‘저 꽉 막힌 놈하고 이야기 하려니 피곤한데. 인생 뭐 있냐 아무렇게 질러. 이렇게 해도 맞고 저렇게 해도 맞고 어차피 넌 안 죽을 거야.’
뭐 때문에... 그렇게 확신을 하는 걸까... 이 쯤되면 무섭기도 하고... 이 몸도 사람인데...
‘네가 죽으면 내가 죽으니까... 그냥 희망이라도 가져보는 거랄까.’
정말 한 대 후려 치고 싶다...
‘아무튼 주인. 산 아래로 가면 마을이 나올테니까. 우선은 체력을 보존하도록 하는게.’
왠지 화랑의 말이 더 신빙성 있어 보였다. 난 화랑의 말대로 하기 위해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았다.
‘내 말은 무시하는 거냐.’
애초에... 넌 갈피도 못 잡지 않았냐. 위인지 아래인지나 정하고 말하지?
‘그보다 북쪽으로 가라는 소리도 있었는데...’
악! 이 빌어먹을 자식들! 대체 어쩌라고 나한테!... 응? 가만 있어보자. 이 목소리는 익숙하지 않은 목소린데?
‘전룡이다. 대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전룡이 깨어났다. 지난 번 그 일이 있은 뒤 잠자코 있던 녀석. 흑아도 화랑 때도 겪었던 일이었다. 내게 먹힌 염조령들은 내 안에서 적응할 시간이 필요 한 것 같다. 그리고 화랑의 이야기도 들어보면 나 때문에 강제로 떠올린 기억으로 혼란스러운 것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한 것 같았다.
드디어 깨어났군. 반갑다. 뭐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그나저나... 그 광모란 자식 진짜 매정하지 않냐? 우리 같이 지낸 게 얼만데, 어? 이딴 데다 버려두고 그냥 가버리고.’
‘그 생각에는 나도 동의한다. 그럴 사람이 아닌 거 같았는데. 참 사람이 그럼 못쓰지.’
‘나도 동의 한 표’
넌 뭘 안다고 동의야 이 자식아.
‘아무튼 이렇게 된 김에 내 소개를 하지. 내 진명은... 뭐... 대장만 알면 될 거고. 전문 사냥꾼 뭐 그런 거였어. 뭘 잘 하냐고 하면, 사냥하는 데 필요한 대부분이라고 해두지. 그리고 속성은 번개다.’
...
‘결국 제대로 이야기 해준 건 번개 어쩌고 하는 거 밖에 없잖아.’
‘주인에게 조금 더 예의를 갖춰서 제대로 이야기 해줬으면 하는데.’
그래... 그딴 식으로 대충 말하지 말고...
‘그냥 차츰 알아가면 되겠지 뭐. 갑자기 이렇게 들이대면 너무 부담스러운데?’
아, 됐고, 됐고. 그럼 지금 조난 당한 이 상황에서 네 능력도 크게 쓸모가 없다는 거 아님? 대충 들어보니까 그 날 낚은 개같은 새끼랑 광모처럼 어디로 순식간에 이동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닐테고.
그러자 흑아의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과욕은 언제나 불행과 절친이더라.’
흑아는... 가끔 맞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육신이 있는 영이었다면 나한테 쳐맞았을텐데...
전룡이 의견을 냈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긴 하지. 대장을 버리고 떠난 녀석 중 하나를 추적하다 보면 길이 나오지 않을까?’
빛인데? 빛을 어떻게 추적해.
‘난 번개야. 할 수 있어. 대장. 속도 차는 나겠지만. 방법은 이미 알고 있잖아?’
맞다. 나는 그런 걸 다 알 수 있었다. 난 주변을 둘러봤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나와 시선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두 영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이게 다...’
‘말도 안 돼...’
이곳, 저곳, 흔적은 온갖 곳에 있었다. 이것은 빛의 흔적, 이것은 냄새. 그리고 저건 깊게 패인 발자국, 부러진 나뭇가지 등등. 새롭게 펼쳐진 이 세계는 전룡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였다. 그리고 난 그 사이에서, 두 줄기의 빛을 찾았다. 실처럼 길게 늘어진 그것은 광모와 그 더러운 자식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흔적이란 건 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흔적들.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옅어지는 흔적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네.”
목표는 정했다. 원래는 이 산 속을 빠져나가는 걸 목표로 하기로 했는데, 목표를 따라 잡을 수 있게 된 마당에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 가. 난 그 더러운 것을 죽여야 겠다. 아니 그 새끼를 붙잡아서 그것들을 다 잡아 족쳐야겠다. 어느 순간 난 나도 모르게 그 빛의 실을 쫓아 보폭을 넓히고 있었다.
‘기억으로 야 수도 없이 해봤던 일이겠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일테니까.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 흔적이야. 뭐 또 찾으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이건 기억해 호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호흡 한 번에 한 번의 도약. 대장의 발 끝이 땅을 차는 순간 호흡도 같이 내 뱉어야 한다는 걸 잊지마.’
나도 알고 있다. 전룡의 말대로 호흡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난 서서히 호흡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한 숨 내 쉬고 내딛는 한 발. 그리고 또 다음 한 발. 보폭이 점점 늘어난다. 다시 호흡 한 번에 한 걸음. 또 한 걸음. 어느 순간 주변의 시야가 바뀌기 시작한다. 이미 화랑 때 경험해본 적이 있는 시야. 하지만 조금 달랐다. 화랑 때는 갑자기 시야가 순식간에 변했다면 이번에는 점점 빨라지면서 마지막에는 화락 때 움직이는 것 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였다. 아니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이... 이게 사람이 버틸 수 있는 속도야?’
‘아마 그를 받아 들인 순간 그에 맞게 몸이 변화했겠지.’
안에서 흑아와 화랑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전룡이 말했다.
‘그런데 신기하긴 하군. 어떻게 한 사람의 몸에 이렇게 많은 영들이 아무 충돌 없이 있을 수 있는 거지?’
전룡의 물음에 셋 모두가 잠시 말을 멈췄다.
‘나도 궁금하군.’
‘확실히 신기한 일이긴 해.’
이쯤 되니 나도 궁금하긴 해.
‘뭐...뭐지? 이 반응들은’
우리 셋이 동시에 말하자 전룡이 꽤나 당황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 그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집중할 것에 집중하자. 이 실의 끝에 도착하면 그 때부터는 다시 전쟁이야.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난 한결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다시 호흡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늘어나지 않을 것 같던 내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믿을 수 없게도 내 옆으로 어떤 것들이 달라 붙었다.
응? 이 속도를? 붙는다고? 상상하는 자? 는 아닌 것 같다. 이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영?”
영들이 이렇게 적대적으로 내게 달라 붙은 적도 없었지만, 사실 난 그 영이 왜 날 따라오는지 알 것 같았다. 이들에게는 익숙한 냄새가 풍겨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흑아였다.
‘저승사자군.’
“어디 잠깐 멈춰 보실까.”
내 옆을 같이 부유하던 한 영이 말을 걸어왔다. 웃기지도 않는 녀석들이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르려 했다. 그러자 흑아가 내 기분을 알아차리고 소리쳤다.
‘멈추지마! 누군지 알잖아! 단령丹靈과 자이自理가 올 줄이야. 염라가 화가 단단히 났구만.’
확실히. 저 미친 놈들을 보낼 것까진 없었잖아?
단령과 자이는 저승사자 중에서도 소위 말하는 짬밥이 오래된 것들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은지 오래라 그들 스스로도 진명을 잊었을 거라고 다들 말했다. 그 말은 노망이 든 아주 오래된 것들이란 소리였다. 정신이 제정신일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단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멈춘다 이거지? 좋은 말로 할 때 멈추면 좋았을 것을...”
그 순간 내 두 다리와 온 몸이 굳어 난 그대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 쳤다.
“크흑!”
흙이 입 안으로 들어간 게 느껴졌다. 입을 벌리고 뛰고 있던 게 분명했다. 다음부터는 입을 다물고 뛰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거봐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었어야지. 안 그래? 불법 저승사자?”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단령은 내 옆으로 쪼그려 앉아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은 거대한 낫을 목에 걸치고 날 보며 씽긋 웃었다. 가위 눌린 것 같이 꼼짝할 수 없는 몸이 된 나는 그 녀석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린 놈이잖아. 뭐하는 놈이길래. 염라대왕을 그렇게 바쁘게 만든 거야? 꼰대가 열 받았다고.”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장한 녀석은 하얀 두루마기를 걸친 자이였다. 그는 머리카락을 여자처럼 기르고 있었으며, 눈을 감은 건지 뜬 건지 모를 정도로 작은 실눈이었다. 실눈캐는 강하다는데, 하필 실눈캐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녀석의 영을 분리해서 염라대왕에게 끌고 가면 되나?”
“응. 다른 방법이 있나. 살아있는 육신을 끌고 저승으로 가는 방법 알아?”
“단령, 이 멍청아 머리 좀 써라... 그게 가능하겠냐...”
단령 자이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걸치고 있던 낫으로 내 몸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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