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深淵

“이렇게 모두가 모여서 있던 게 처음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특히나 주인이 이 곳으로 들어올 줄은 몰랐군.”
익숙한 목소리. 흑아와 화랑의 목소리였다. 항상 귀에 대고 말하는 것 처럼 가깝게 들리던 목소리들이 지금은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일어 났군.”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눈앞에 보이는 곳은 온통 하얀 곳이다. 그리고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다가와 내 앞에 앉은 자는 처음봤지만 본 적이 있는 기시감이 드는 그런 자였다. 검은 생머리에 검은 두루마기를 걸치고 있는 이 자는 흑아였다. 그는 자신의 몸만큼 거대한 날이 달려있는 낫을 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지?”
그는 이상한 표정으로 날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이게 몇 개지?”
난 귀찮은 표정으로 흑아의 손가락을 밀어내며 말했다.
“세 개. 여기가 어디냐고.”
흑아는 신경질을 부리는 날 보며 씩 웃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가 지내는 곳이다. 네 마음 속이지. 뭐 항상 지내는 곳은 아니고, 건물로 따지면 지하 최하층... 뭐 그런 곳?”
“가끔 내려와 수련을 하곤 하지. 마음이 편해지는 곳이야.”
그리고 흑아의 옆으로 다가온 자는 불에 타오르는 것 같이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사내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진한 눈썹, 강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그의 허리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검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생겼었군.”
내가 화랑을 보며 이야기 하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고, 내 앞으로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난 화랑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왜 여기로 온 거지?”
화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네 혼魂과 육肉을 분리하려고 단령이 내지른 낫이 널 이곳에 가둔 것 같아. 덕분에 우리들도 같이 이곳으로 떨어졌지. 의식의 가장 깊은 곳이야. 이곳은 우리가 심深이라고 부르는 곳이야.”
가끔 녀석들이 쓸데없는 소리를 할 때면 내려보냈던 그 곳인 것 같았다. 가끔은 자발적으로 내려가기도 했는데, 이런 곳이었나 싶다.
“그리고 이 곳, 심에서는 영이 육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어. 반갑군. 대장.”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푸른 빛이 띄는 흑발의 미청년이 서 있었다. 그는 턱이 갸름하고 눈이 커서 이성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 쉬운 얼굴이었다. 그는 창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셋 모두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건가.”
“갑자기 이렇게 된 거지. 수현 우리 입장에서도 이건 날벼락이었다고.”
“맞아 주인.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는 건가?”
난 단령이란 저승사자가 내 몸에 낫을 꽂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리고 순간 세상이 돌며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이곳이었다. 확실히 그 낫이 날 이곳으로 떨어트린 것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게 분명했다.
“차라리 나보다는 동종업계 종사자가 더 잘 알지 않을까나.”
화랑의 물음에 난 흑아를 보며 대답했고, 흑아가 성질을 부렸다.
“내가 어떻게 알아. 이렇게 남의 몸에 갇혀있는 것도 처음인데. 그러게 내가 몇 번을 말했어. 염라, 그 양반 건들면 안 된다고 했지? 이게 뭔 짓인지. 그래도 짐작하자면, 일단 네가 이곳에 떨어졌다는 건 네 영이 아직 그 둘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적어도 아직 육 안에 영이 있는 거잖아.”
흑아의 말이 그럴싸했다. 이 곳은 내 마음 속의 가장 깊은 곳. 그리고 그 곳에 내가 이렇게 있다는 건 아직 내 육신에서 영혼을 분리해내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난 내 앞에 서 있는 셋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너희도 다 죽는 거 알지? 협조 좀 해라.”
셋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말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다. 주인”
흑아, 전룡, 화랑이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차례대로 입을 놀린다. 다들 내 몸에 갇혀있다는 동질감에서 비롯된 것일까 녀석들은 상당히 닮아 있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맨날 목소리로만 듣다가 이렇게 너희 셋을 직접 보면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해.”
셋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인지 각자의 성격이 드러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흑아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이제 어쩐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인데.”
“가끔 이곳으로 내려오는 것 같은데. 의식의 층을 이동하는 건 어떻게 하는데? 그렇게 의식의 위로 올라가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시도 해봤는데, 너와 함께 강제로 끌려 내려온 거라. 우리들은 자력으로 올라갈 수 없더라고.”
흠... 이걸 어쩐다. 이곳에 있는 네 사람 모두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지 못한다. 난 앞에 있는 세 사람을 천천히 훑어 봤다. 다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지금 그들이 어떤 마음인지 잘 알 수 있었다. 나 때문에 의식의 깊은 곳으로 내려온 이 자들을 다시 의식의 얕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내가 뭔가를 해야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알지 못했다. 방법을 찾기 전까지 난 영원히 이대로 갇혀 있는 걸까?
“방법을 모르겠는데. 지금은.”
난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다시 철푸덕 주저앉았다. 화랑은 자리에 앉은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그럼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다는 거군. 일단 그럼 평소대로 수련을 조금 해보는 건 어때?”
수련...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수련을 하자는 말이 나와? 이러고 있는 사이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내가 인상을 쓰며 화랑을 바라보고 있자 흑아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잠고로 지금은 네가 생각만 하고 있다고 해서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할 말 있으면 생각만 하지 말고 입 밖으로 내지 그래.”
“아... 아니 그냥 태평하게 수련을 해도 되는 상황인지 모르겠어서.”
전룡이 말했다.
“딱히 방법이 없다며? 그냥 이럴 때는 평소처럼 하던 거 하는 게 나아. 대장.”
화랑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우리 셋은 무사이기 때문에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어. 일단 지금 뭘 찾는 다고 방법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주인은 뭘 할 건가. 그렇게 하릴없이 그냥 앉아있다고 나아지는 게 없을텐데. 내 생각에는 우리와 같이 수련을 하며 익숙해지는 것이 좋겠는데. 어떤가?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화랑의 말이 맞았다. 앉아 있는다고 나아지는 건 없으니까.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럴까. 그럼.”
화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부터 시작하지. 서로 이해하려 애쓰며 수련한다면 아마도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주인 너도.”
*
시간 개념이 없는 이곳에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흐른지 모른다. 난 몇 날 몇 일째 이 녀석들을 상대로 정신없이 대련하며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몸으로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기술들을 처음 사용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자연스러움 보다는 놀라움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았다. 그런데 수련을 하다 보니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왜 내가 이런 놀라운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여기서 창을 잡을 때, 대의 약간 뒤쪽을 잡고 어깨, 등, 허리, 허벅지 온몸의 근육을 사용해서 목표를 향해 힘껏 던지는 거야. 창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목표에서 눈을 떼면 안 된다는 것 잊지 말고. 그게 내가 창을 던지는 방법이야. 설명이야 간단하지만 이건 힘의 균형이 중요해. 그 어느 한 군데라도 힘이 더 들어가면 안 되니까. 최대한 신경을 써. 정신줄 놓으면 몸의 균형이 붕괴되고 힘의 균형도 깨진다. 그럼 결코 좋은 사냥의 자세가 나올 수 없어. 만약 내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자세를 유지 할 수 있다면 넌 균均을 얻은 거야.”
전룡은 사냥에 대해서는 꽤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게 설명을 할 때면 정말 듣기 싫을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을 해줬다.
“그리고 보폭은...”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걸까 이 시간은.
“어허이! 정신줄 놓고 있다. 정신 바싹 차려 대장!”
창을 잡은 내 자세가 흐트러지자 전룡이 고개를 저으며 내 몸을 툭 건드렸다.
“뭐든지 그렇지만 정신력이 가장 중요해. 아무리 몸이 빠르고 날래고 힘이 세도 나약한 정신력을 가졌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네네, 알겠습니다.
난 다시 창을 바싹 들어 자세를 가다듬었다.
“좋아 정신 차리니까 낫잖아? 그 자세를 기억해. 뭐 몸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난 창을 내려놓고 어깨를 으쓱 거렸다.
“그나저나 도대체 얼마나 지났을까? 몇 일 째 밥도 못 먹고, 물도 못 마셨는데. 이미 죽은 거 아냐?”
그러자 곁에서 서있던 흑아가 멀리서 소리쳤다.
“그딴 재수없는 소리 하지 마라.”
*
몇 달이 흘렀을까. 더 이상 우리 사이의 대화는 없다. 다만 서로 서로 배려를 위해 어딘가로 가서 앉아 묵상할 뿐이다. 가끔 일어나 자신이 알게 된 것을 실행해보고는 다시 앉아 묵상에 잠긴다. 나 또한 묵상에 잠겨 있다. 분명한 건 이 곳으로 끌려 들어온 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분명했다. 난 어떻게 된 걸까. 내 몸은 살아있는 걸까? 밖의 시간은 또 얼마나 지나있을까? 알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이 긴 시간이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
오늘은 흑아가 알려준 춤사위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흑아의 춤사위는 대게 하나의 선으로 그 흐름이 이어지는데 그건 참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낫을 들 때부터 적을 향해 휘두를 때까지 흐름은 원만하고 힘의 배분은 완벽하다. 온몸의 근육은 서로 서로 완벽하게 소통을 하고 있어야 하며 그럴 경우 대게 거부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상대를 매료 시킬 수 있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그것을 흑아는 미美라고 했다. 이제껏 몸이 기억하는 흑아의 것을 따라한 내 춤사위에는 이 미가 없었다. 미는 춤사위의 모든 것이고 이것을 익힌다면 내 앞에선 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살해 당했는지도 모른 채 죽어 갈 것이다.
*
일년은 족히 지난 것 같은 느낌이다. 대화가 없어진 지 오래고 더 이상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잠을 자지 않아도,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난 몇 달 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 하나 쌓여있지 않다. 그렇게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지만 내 몸은 다시 움직이는 데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한다. 정신의 세계다. 난 뚜벅뚜벅 걸어가 손의 날을 세워 늘어뜨렸다. 난 무형의 오라를 유형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춤사위나 화랑의 검법을 실행하는데 무기는 필요 없다. 다만 강한 정신만이 그것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긴긴 시간동안 인내는 내 정신을 강하게 만들었다.
왼 손날에서 뻗어 나오는 매몰찬 죽음의 기운은 흑아의 춤사위가 시작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내게 알려준다. 낫의 긴 길이가 없어도 내 다리는 그 길이를 대신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춤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 춤사위에는 이미 미가 갖추어져 있다. 춤사위가 끝났다.
오른 손에서는 이미 강한 불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화랑의 검술이 시작될 것이다. 흑아의 춤사위에는 미가 있고, 전룡의 투척술에는 균이 있듯이, 화랑의 검술에는 무無가 있다. 그의 검술을 시전할 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검과 자신만이 마음에 담겨있다. 상대를 베기 위한 마음으로 검을 내 지른다면 검의 흐름에 생각이란 것이 끼어들어 검은 자신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한다. 그러므로 생각을 비우고 마음을 없애면 검은 자연히 자신이 가야 할 올바른 길로 자신과 그를 인도한다. 내 검술에는 무가 있다.
내 왼쪽 발목에서 전기의 찌릿찌릿한 감촉이 전달된다. 창이 없어도 난 내 앞의 적들에게 창을 쏘아 보낼 수 있다. 내 왼쪽다리에서는 전기가 내 왼쪽 손에서는 죽음이 오른손에서는 불이 각각 창의 대용으로 언제든지 적에게 쏘아져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무형의 오라들은 긴긴시간에 걸쳐 유를 갖추게 되었고, 그것은 내가 원한다면 창이 될 것이고 균을 갖춘 내 투척술은 그것들을 적의 심장에 쳐 박을 것이다.
내가 알고 깨달은 몇 몇 가지를 실행해보고는 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긴 시간이 그렇게 계속 흘러갔다.
- 작가의말
금요일에 예상치 못한 부상을 입어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금일분은 금요일 분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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