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目的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주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새로운 기척이었다.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은 지가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내 안에 새로운 영이 들어왔다는 뜻일텐데 아마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들이 아닌가 싶었다. 얼마나 감겨있었는지 모를 눈을 뜨니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와... 드디어 찾았다.”
단령의 목소리였다. 그 고요하고 넓은 공간에 들리는 목소리가 어색했다. 언젠가부터 우리들끼리의 대화도 사라져 나 역시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낸 지 오래니 말이다. 본의 아니게 긴 시간 이루어졌던 수행도 이제 끝났다 생각했다. 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다른 영들도 마찬가지로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들과 연이 있던 흑아였다.
“단령, 자이. 오래간만이군.”
“무흑? 네가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흑아를 본 단령은 그가 염라로부터 이름 숨겼을 때 붙였던 이름으로 그를 불렀다. 단령은 아주 오래전 그를 처음 봤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서있었다. 그는 흑아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궁금해 했다. 흑아는 대충 대답했다.
“어쩌다보니 있게 되었군.”
그때 자이가 흑아 외에도 다른 영이 둘이나 더 있다는 걸 알고는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너 어떻게 돼먹은 녀석이야? 몸에 다른 영을 셋이나 둘 수 있느냐 말이다.”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모르겠군. 그나저나 우릴 여기에 가둔 거 네놈들 짓이지? 빨리 꺼내 여기서.”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였지만 너무 오랜만에 듣는 내 목소리라서 이게 내가 낸 목소리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리고 내 말을 들은 자이가 성질을 내며 말했다.
“뭐?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알아? 네가 숨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 안 보이냐? 낫으로 찍었을 때 영이 분리되긴 커녕 우리도 빨려 들어온 거라고. 어떻게 빠져나갈 지는 우리도 궁금한데 그걸 우리한테 물어?”
자이는 녀석이 들고 있던 낫을 소리 나도록 휘두르더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가만히 녀석의 말을 듣고 있자니 아마 이 심에 떨어진 이유는 나도 알지 못하는 방어기재가 작동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다는 건 이 곳을 빠져나가는 건 순전히 내 몫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빠져나가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됐고, 우리가 널 찾으려고 얼마나 헤맸는지 모르지? 우리 이제 그만 쉽게 가자. 더 숨지 말고 조용히 따라 오라고.”
“숨은 적 없다. 그냥 나도 모르게 떨어졌을 뿐. 그렇다면 너희도 이곳을 나갈 방법을 모른다는 뜻이겠군?”
내 말에 반응한 건 단령이었다. 그는 자이만큼이나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미치겠군! 그럼 이곳에 이렇게 계속 갇혀있어야 한다는 건가?! 아아,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어떻게 하지 자이?”
“그냥 저 녀석의 영을 파괴해버리면 어떨까? 영이 파괴되면 이 공간도 없어져서 결국 다른 영들을 튕겨져 나갈 거야. 안 그래?”
“자칫 우리도 그냥 같이 파괴 될 수 도 있을텐데?”
“하지만 난 이거 말고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
녀석들의 말을 들으니 결국 저 녀석들도 방법을 모르는 모양이다. 그렇다는 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건 남이 아닌 내 스스로에게 있다는 걸 뜻했다. 나갈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때 자이와 단령은 동시에 한 숨을 푹 내쉬었다. 난 두 녀석의 만담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전에 보이지 않던 어떤 것이 눈에 띄었다. 난 그것을 의식하며 흑아에게 물었다.
“너희 셋은 이전에는 이곳으로 내려오고 싶을 때 언제든 내려올 수 있다고 했어. 그런데 지금은 불가능 하다고 했지.”
“그랬지.”
“그때는 어떻게 내려왔는데?”
그 말에는 단령이 대답했다.
“네 육 내에는 영이 지낼 만한 곳이 무수히 많더군. 그 많은 방을 일일이 열어서 너희를 찾았어. 그리고 어떤 방의 문을 여니 한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이곳까지 온 거다.”
난 내 식령食靈들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저들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럼 올라갈 때는?”
흑아가 대답했다.
“그야 들어왔던 문을 통해 다시 나갔지.”
“문이라...”
그 말은 내 의식에 단층이 있는 것이 아닌 여러 개의 방이 존재하고 우리가 있는 이 방은 그 수많은 방 중 하나라는 소리였다. 결국 이 넓은 공간이 하나의 방이었고, 문을 찾는다면 다시 의식의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소리로 들렸다. 난 허공에 떠 있는 문을 보며 말했다.
“저런 것 말이지?”
그러자 내 뒤에 있던 세 영들이 놀라워했다. 그들의 시선에는 저것이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보지 못했던 것이 갑자기 보인 것이므로 이들 눈에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내 말에 단령과 자이도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나온 문인가?”
“아니 그냥 겁나, 떨어져 버렸는데.”
나는 알 것 같았다. 이전에는 자유롭게 돌아갈 수 있던 세 영들이 다시 돌아갈 수 없던 것도, 갑자기 문이 보이게 된 것도. 내게 얽매여 있던 세 영은 내가 이곳에 갇히자 그 의식 위로 올라갈 수 없던 것이었고, 그 동안 문이 보이지 않았던 건 지금 당장은 방법이 없으니 수련이나 하자며 문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내 탓이었다. 단령과 자이가 나타나 그들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깨달은 지금에 와서야 난 이 문제를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해답을 문이라는 것으로 찾아낸 것이다. 결국 마음 속의 세계도 상상의 세계였거늘. 육신으로도 상상을 할 수 있으면서 이곳에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고 그저 누가 방법을 찾아주겠거니 기다리기만 했다니. 우습기만 하다.
그때 결국 날 공격하기로 마음을 굳혔는지 자이는 내 뒤로 서 있는 세 영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너희 셋은 좀 빠져줄래? 어째서 잡혀있는지 모르겠다만 이 녀석만 죽인다면 너희도 자유가 되지 않을까?”
그 물음에는 전룡이 싱글거리며 답했다.
“미안하지만, 안되겠는 걸. 대장이 우리 진명을 빼앗아 가서 말이야.”
전룡의 말을 들은 두 영이 깜짝 놀라서 날 바라봤다.
“뭐?!”
“뭐?”
단령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보며 소리쳤다.
“말도 안 돼 보통의 영은 자신의 진명조차을 알지 못하거늘. 너희 모두의 진명을 빼앗았다고?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너 우리가 왜 저승사자를 할 수 있는지 알아? 그 대단하다는 염라도 우리의 진명을 빼앗지 못해서다. 그런데 일개 영에 지나지 않는 네가 다른 자의 진명을 빼앗은 게 말이 된다고?!”
더 이상 이들과 대화를 하는 것이 피곤하다 생각들었다.
“네 생각같은 건 별로 듣고 싶지 않군. 그만 나가봐야겠다. 더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졌어.”
내 말을 들은 자이와 단령이 눈을 무섭게 치켜떴다. 내 영만 처리하고 나가는 게 불가능하다 여긴 것이 분명했다. 자이가 앞으로 나서 수인을 맺었다. 그리고 그 수인이 어떤 술법을 위한 수인인지 알아차린 나는 앞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강력한 충격파가 자이의 손에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 충격파는 나와 내 식령들에게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자이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너... 뭐야? 이게 말이 돼?”
녀석들은 알지 못했지만 난 아주 오랜 시간 이곳에서 세 영과 수련을 마쳤다. 그리고 그 경지는 아마도 녀석들의 상상 이상일 것이다. 흑아와의 수련에서 사자의 춤사위 외 집중한 것은 사자들이 사용하는 술법이었다. 아주 오래전 흑아와 난 이것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것들의 원리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얻게 된 깨달음은 지금 내가 행했던 일을 가능하게 했다.
자이정도 되는 오래된 영이 발휘하는 술법의 위력은 대단했으나 그 이치만 깨닫는 다면 그것을 파훼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으니, 자만했던 자이는 결국 그릇의 차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멸할 것이다.
“더 놀라운 걸 보여주지.”
난 왼손에 오라를 집중했다. 검붉은 오라가 내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 끝으로 뿜어져 나온 검붉은 오라는 하나의 형상으로 변화했고, 그 모습은 흡사 낫과 닮아 있었다. 난 손을 늘어뜨리며 춤을 출 준비를 했다. 모든 춤은 손끝에서 시작되어 손끝으로 끝난다. 특히나 죽음을 표현하는 이 춤에서 손끝의 움직임은 정교하고 또한 날카롭다. 손끝이 닿는 곳에는 죽음과 절망이 있지만 그것을 망각하게 하는 미는 그들을 더욱 손쉽게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는다. 낫의 움직임은 유려했고, 흐르는 물 같았다.
“네 녀석이 춤을?!”
자이는 내가 추는 춤이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는지 급히 낫을 들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존재해온 시간 만큼 수련을 해서 그런지 완성도가 높은 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강하다 한들 미가 없어서야 의미가 없다. 녀석의 공격은 번번이 내 낫에 의해 막히고 흐름이 끊기면서 점점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이 되어갔다. 춤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그저 힘과 정교함만을 쫓은 결과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네가 정말 저승사자가 맞기는 한 거냐.”
난 녀석을 오른 발로 녀석을 걷어차고는 멀리 떨어진 녀석에게 왼발의 강력한 전기의 오라를 쏘아 날렸다. 균이 살아있는 자세는 목표에 더 없는 고통을 선사해줬다.
“크악!”
전기의 창에 가슴 팍이 뚫린 자이는 뒤로 나자빠지면서 손에 들고 있던 낫을 놓쳐버렸다. 자이는 분한 듯 몸을 일으키더니 거침 숨을 내쉬며 소리쳤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제 실력 부족한 것을 모르고 아직도 내 정체나 운운하고, 다시 살아날 가치도 없는 것 같으니라고.”
난 검붉은 오라로 낫이 아닌 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재를 향해 던졌다. 전룡의 투척술로 던진 창은 당연히 빗나갈 줄 몰랐고 그대로 자이의 재에 틀어박혔다, 으레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잃은 것들이 그러하듯 끔찍한 비명을 지른 자이는 강력한 빛을 내 뿜으며 소멸해버렸다.
멀리서 자이가 죽는 모습을 모두 목격한 단령은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이제야 녀석은 나와 자신의 차이를 인지한 것 같았다. 전의를 상실한 자 괴롭히는 취미는 없었으니 나는 단령을 향해 손짓을 했다. 저항하는 건 무의미하다 생각한 놈은 덜덜 떨며 내 앞에 섰다. 나는 물었다.
“말해봐. 염라 걔가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다...당연한 거 아니오? 지옥에 처박으려는 것이겠지.”
미묘하게 달라진 녀석의 말투가 재밌었다.
“그래? 그럼 널 여기서 소멸 시키면 염라는 다른 저를 또 보내겠군?”
“그대가 재기의 힘을 사용하는 이상 계속 올 거요. 염라대왕은 하루에 몇 만의 영을 지옥과 천당으로 인도하지만 그들은 전부 제대로 자신의 삶을 살며 생을 다 마감한 자들이오. 그리고 제대로 자신의 삶 산다면 명부에 그에 맞는 사인死因이 붙게 되는데 사인 중에는 ‘재기에 의한 살인’은 없소. 본래 재기란 저승의 물건이고 재기에 의해 살해 됐다는 건 저승이 이승에 관여를 했다는 건데 그건 하면 안 되는 짓이니. 그래서 명부에도 사인 없이 이름을 올린단 말이오. 그런 비정상적인 죽음이 계속 되는데 염라가 가만히 있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니오?”
결국 이 녀석을 죽여도 이런 귀찮은 상황이 계속 될 게 뻔하다는 소리였다.
“그럼 네가 가서 내 말은 전하면 되겠다. 한 번만 이따위 짓을 하면 저승에 쳐들어가서 자 뒤집어 놓을 거라고.”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보통은 말할테지만 그대의 능력을 보니 그냥 넘길 말은 아닌 것 같고...”
난 한 손에 화랑의 불꽃을 피워보였다. 단령은 내 손에서 피어난 불꽃의 속성을 알아봤는지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아까 자이처럼 재만 파괴해 없애는 것 말고 그냥 무로 돌려보낼 수도 있지. 어쩔 거야?”
단령은 방어자들처럼 멋있는 척 저항하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사리분별이 뛰어나다는 소리였다.
“하... 하겠소! 하지 마시오!”
난 볼꽃을 꺼트리며 웃었다.
“대답 빨라서 좋네. 그나저나 나 이곳에 엄청 오래 있었는데, 나 죽은 거 아니냐?”
“그건 아닐 거요. 의식이란 게 깊으면 깊어질 수록 외부와 시간이 다르게 흐르오.”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단령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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