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疑心 2

저 멀리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신고전화를 받고 사고 현장에 도착한 것 같았다. 난 사람들이 나와 사자들 간의 싸움에 휘말려 들 것을 염려해 도로를 벗어난 곳에서 싸움을 선택하기로 했다. 애초에 사자들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고, 혹여나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와 사자들의 싸움을 본다면 나 혼자 쌩쇼를 하는 것 처럼 보일 것이기에 미친놈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함도 있었다. 애초에 차가 크게 뒤집혀서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 드물 것이라 생각하긴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말이다.
염라의 명령을 받고 날 처단하기 위해 온 사자들은 정작 나에 관한 정보는 제대로 듣지 못하고 온 것 같았다. 그래서 왜 내가 영적인 것에도 물리적인 힘을 가할 수 있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두 개의 낫을 들고 사자들를 베어낼 때 마다 그들 얼굴에 떠오르는 경악이란 두 글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너무 하지 않나? 명령을 했으면 제대로 된 정보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한편 이들을 승천 시키면서 계속해 드는 생각은 왜 염라가 협박을 받고도 날 없애려 하냐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흑아의 능력을 취해 사이비 저승사자 행사를 좀 했기로서니 이렇게 과하게 병력을 투입시킨 다는 게 잘 이해가지 않았다. 만약 내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저항도 못해보고 끔살을 당할 정도의 수이지 않은가.
어느새 처음 왔을 때보다 반 이하로 수가 줄어들자 더 이상 사자들은 나를 향해 섣불리 덤비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 깨달았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능력으로는 절대 날 어찌 할 수 없다는 걸. 이들이 들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 사이에도 실력있기로 소문난 단령이나 자이도 날 어찌 하지 못했다는 걸 생각하면 이들이 단령과 자이보다 나은 게 고장 수가 많다는 거 뿐인데, 그런 건 날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 못했다.
상대방이 전의를 상실해 가는 중이란 걸 깨달은 난 조금 더 확실히 보여줘야 겠다 싶었다. 난 불의 낫을 오라로 돌려보내고 손을 가볍게 들어올렸다. 이게 술법을 위한 행돟이란 걸 사자들이 알았다면 그냥 그렇게 가만히 만은 있지 않았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난 수인을 맺지 않아도 술법을 행할 수 있었다. 이윽고 사자들의 가슴팍에서 그들의 존재 이유가 적힌 종이가 튀어나와 내 손에 잡혔다. 수인도 맺지 않았는데 술법이 발동한 것에 당황한 사자들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심지어 그 술법으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많은 사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난 손에 쥐어진 종이들을 보며 말했다.
"어때? 이쯤 할까? 아니면 더 할까?"
사자들 사이에 말이 없었다. 왜 그럴까?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자주 이러던데 꼭 본보기로 하나 골로 보내야 입을 여는 건가?
내가 한숨을 쉬며 손에 쥔 종이들을 바라보자 그때 한 사자가 소리쳤다.
"도...돌아가겠소! 그만 두시오."
오호... 판단력이 좋은 녀석이 있다. 당연하지. 염라에게 진명을 숨기고 저승사자가 된 자들이 아닌가.
그의 말을 기점으로 사방에서 사자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좋은 생각이야. 단령에게 말했지만 이미. 염라에게 전해줄래? 내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분명 말했고, 말 안 들으면 저승도 다 뒤집어 놓겠다고? 내가 지금 조금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거 처리하고 내가 방법 찾아서 넘어갈테니까 기다리라고 해. 그리고 분명 말한다. 오늘 이후 또, 또! 저승의 것들이 날 찾아오면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의 우선 순위가 뒤바뀔 거라고 말이야."
사자들은 단령이 겨우 살아 돌아갔을 때와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나 둘 씩 모습을 감췄다. 난 주변에서 사라지는 사자들을 보며 엄청 귀찮은 것에 휘말린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단령을 보내 경고했음에도 보란 듯이 내 말을 무시하고 이렇게 사자들을 보내오는 걸 보면 염라는 이후에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무슨 수를 써서든 날 어떻게 하려할 게 분명했기 때문에. 어쩌면 방어자나 선구자 그 새끼들보다 염라를 먼저 해결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요하군. 꼰대."
흑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떨 거 같아? 또 보낼 거 같지?
'그렇겠지. 이 정도 수의 사자를 움직였다는 건 꽤 열이 받았다는 뜻 같은데. 쉽게 포기할 리 없지.'
나도 흑아의 그 생각에 동의했다.
그나저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는 위를 바라보니 버스에 탄 사람들의 구조가 시작된 것 같은데, 이제 난 어떻게 한다. 보아하니 주변에 제대로 된 인가도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냥 뛰어야겠다."
그래 그냥 뛰기로 했다. 도로변이기도 하고 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사람 사는 곳이 나오겠지. 그리고 거기서부터 버스를 다시 타면 되는 거고.
*
바람을 가르며 한참을 달렸을 때 나온 작은 마을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것 같지만 심야버스가 운행될 리 없었기 때문에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모텔 같은 것이 보이긴 했는데,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없어 그런데 낭비할 수 없었으므로 건강한 몸을 믿고 대충 야외취침을 하기로 했다. 대충 보이는 초등학교의 담을 넘어 경비아저씨의 눈에 띄지 않을 그런 곳을 찾았다. 내가 워낙 민첩하게 움직이는 탓에 아마 내 움직임을 쫓을 사람을 없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최대한 들키는 일 없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자리 잡은 곳은 건물의 옥상. 옥상으로 가기 위해 건물 안으로 잠입하고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튀어나온 창문 난간을 잘 이용해서 건물 위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상에 오른 난 대충 아무대나 자리를 잡고 누웠다. 시골이라 그런지 하늘에는 별이 많이 보였다. 도시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오늘 벌어진 일이 무색하게 날씨도 좋아서 달도 참 밟게 빛났다.
"나 뭐하고 있냐..."
갑자기 일상이 모두 박살이 나 이런 외딴 시골 학교 옥상에 몰래 들어와 누워있는 내 자신이 참 처량했다. 심에 있을 때 감정같은 건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세계로 돌아오니 잊었던 감정도 되살아 나는 기분이었다. 사실 심에 있을 때 워낙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현실세계의 시간으로 따지만 한 100년은 그곳에 더 있었던 것 같다. 그 오랜 시간동안 수련 만을 하며 지내왔기에, 사실 지금의 난 예전의 고등학생의 장수현이 가지고 있던 생각과 사고, 마음이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난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 끝이 없구만."
악은 부지런하다고 했나. 사실 방어자와 나 둘 중에 누가 악이고 선인지 구분하는 건 명확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는 거다.
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옥상 아래를 바라보니 이미 검은 양복을 입은 것들이 학교의 경비아저씨와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아니 댁들 누군데 이 밤에 학교에 들어온 겁니까? 외부인 출입 안된다고 밖에..."
털썩 소리가 들렸고, 경비아저씨가 자리에 쓰러졌다. 일반인들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는 그런 선을 지키는 녀석들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날 찾아온 자들은 선 정도는 조금 넘어도 된다고 여기는 놈들인가 보다.
"이 건물에서 반응이 나온다. 빨리 찾아. 아직 도망가지 못했어."
명령을 내리는 자가 보였고, 놈들은 내 오라를 감지해 이 곳으로 모여든 게 분명했다. 어제 오늘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피곤함이 몰려왔다. 난 저승사자들 때 그랬던 것 처럼 술법을 사용하여 방금 다른 자들에게 명령한 방어자를 제외한 나머지 녀석들의 존재 이유를 손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을 거칠게 잡아 뜯었다. 일순간에 그 많은 방어자들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녀석이 당황하는게 눈에 보였다.
난 옥상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착지했다. 하늘에서 갑자기 내가 뛰어내리자 그 방어자는 당황을 하면서도 '절교'를 곧바로 꺼내들었다. 난 흑아의 날을 만들어 내어 놈이 들고 있던 기계들을 무로 돌려버렸다. 손에 들고 있던 것도 갑자기 사라지자 방어자의 당황하는 모습이 티가났다. 하지만 날 공격할 수단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이제까지 봐왔었던 다른 방어자들과 다르지 않게 살기 어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본인을 제외한 모든 전력이 무용지물이 된 상태에서도 보이는 저 눈빛. 이들의 적인 상상하는 사람들 조차 동조하게 만드는 그 사상이 만들어낸 눈빛. 이제야 알겠다. 어째서 이들이 이렇게 까지 하는지를.
"피곤하다. 살려 줄테니까 이 주변에 있는 너희 본부나 불고 꺼져라. 참고로 독립 투사같은 뻔한 레파토리는 사절이다. 네가 말 안 해도 알아낼 방법이 있으니까 그냥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아, 캡틴이라는 자가 있는 곳이면 더 좋고."
"네가 수도권 지역의 본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놈이군. 괴물 중에 극도로 위험한 녀석이 있다고 주의 경보가 발령했지. 네 녀석이라는 걸 알았으면 덤비지 않았을 거다. 본부를 단독으로 상대할 수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
오... 이건 새로운 반응이다. 본인이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끝내 덤벼들던 녀석들 아니었던가. 그런데 지금은 순순히 물러나겠다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헤집고 다닌 게 효과가 없진 않았나 보다.
"그래? 손에 피 묻힐 일 없으니까 그건 좋구만. 좋아. 나도 딱히 너희에게 손 대지 않겠어. 여기 누워있는 놈들도 죽은 거 아냐. 조금 있으면 깨어날 거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내가 아까 물었던 건 대답해 줘야겠어. 대답 내용에 따라서 그냥 얌전히 지나갈 수도 아님 너희를 다 죽이고 갈 수도 있으니까 잘 생각하고."
방어자는 잠시 말없이 날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에 누워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둘러봤다.
"캡틴이 있는 곳을 알려주면, 강변처럼 또 그렇게 만들건데, 나 살자고 알려줄 수는 없다."
"뭐 너희 캡틴이란 자가 내게 순순히 협조만 해준다면 지금처럼 그냥 대화만 나누고 사라져 줄 수도 있어. 분명 너희들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집요하게 공격을 했던 것에는 화가 났었던 건 사실이지만, 설명하긴 어려운데 그 감정이 조금 희미해진 상태거든. 그러니까 딱히 너희라고 보이는 족족 죽여버리고 싶진 않다는 거지."
난 내 주변으로 널브러져 있는 자들을 보며 말했다.
"이 자들처럼. 무슨 말 하는 지 알겠지? 내 제안이 막 나쁘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렇지?"
"캡틴과 연락할 수 있게 해줘. 나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편할 대로."
방어자 녀석은 쓰러진 동료들을 둘러보다가 전화기를 꺼내 들며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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