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反轉 4

최석용이 다행히도 내게 잘 못 된 정보를 알려 주지는 않았다. 아주 외진 곳에 위치해 있는 연구소들은 보통 폐가처럼 보이는 건물들이었는데, 여러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니 지하에 많은 것이 숨겨져 있는 형태였다. 본부는 그래도 평범한 건물이나 눈길이 잘 가지 않는 건물에 위치해 있었는데, 연구소는 이런 식으로 아예 숨겨 놓았으니 아무런 정보 없이 이걸 찾으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최석용과의 약속대로 엔지니어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의 모든 기계를 살해했다. 갑자기 자신들이 다루던 모든 기기들이 살해 당하자 사람들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뭐 곧 그들도 속산 본부의 방어자들과 마찬가지로 온갖 감정을 느끼며 절망하겠지만, 목숨을 잃는 것 보다는 낫지 않을까?
난 그렇게 원천으로 향하며 총 두 개의 연구소를 무력화 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한 연구소에 도착했을 때 노유목령과 약속한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난 서둘러 집으로 가기 위해 대한민국의 방어자의 마지막 거점을 향해 은밀히 다가갔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곳에 있는 모든 기계의 동줄을 사냥하기 위해 술법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고, 난 반사적으로 뒤로 돌며 물러났다. 앞에는 방어자 처럼 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있었다. 그는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의 다른 방어자와는 다른 반응이었다. 보통은 시건방을 떨거나 내 소문을 조금이라도 들은 놈은 벌벌 떨면서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날 관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듯 날 위아래로 훑고 있었다. 난 문득 이자가 어제 최석영이 말했던 다른 두 가디언 중 하나인 석윤열이 아닌가 생각했다.
"가디언인가? 네놈이? 석윤열? 원천시로 간다고 했던 그놈이지?"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그게 누구지. 그나저나 흥미롭군. 얼굴은 변했어도 기운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이건 분명 내가 아는 기운인데... 기운이 너무 초라해서 잘 못 본 건 싶을 정도군.."
난 그 자가 사용하는 단어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난 흑아의 오라로 녀석의 정체를 간파하기 위해 영을 살폈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금 내 앞에 선 자는 다른 어떤 것에 씌워있었다. 하지만 몸을 지배하고 있는 영의 상태가 원래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그 영은 너무 하얘서 영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죽은 자가 산 자 행세를 하고 있었군. 누구냐. 내가 저승사자라는 걸 모르진 않을텐데?"
난 손목에서 오랜만에 흑아의 낫을 상상해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자가 웃었다.
"그래. 저승사자기도 하고, 불을 품은 검사이며, 사냥꾼이기도 하지. 그리고 다른 영을 품을 수 있는 고등학생이기도 하고."
그는 내 안에 있는 세 영의 정체까지 모두 알고 있는 듯 떠벌렸다. 난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영 주제에 사신의 낫을 무서워 하지 않으니 난 낫을 다시 글자로 돌려보냈다. 그러는 사이 그 자는 내 대답은 별로 상관 없었는지 계속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몸으로 나타난 걸 보면 우리도 참 악연은 악연이야."
상대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릴 짓거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항상 그랬어. 한 번씩 이렇게 불현듯 나타나서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 놓곤 했지.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던가. 아주 지긋지긋해."
"뭔 개소리야. 알아들 수 있는 소리나 해."
그 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지그시 바라봤다. 나도 눈싸움을 걸어오는 상대에게 지기 싫어서 눈 한 번 껌뻑 거리지 않고 그를 같이 노려봤다. 한 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의 눈 싸움은 남자가 몸을 돌리며 끝이 났다.
"어? 눈 감았어? 내가 이긴 거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하늘을 보며 말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방어자라 불릴만한 녀석은 거의 남아나지 않았군. 바티칸이 포기를 했다지?"
"어? 뭐야? 그런 것도 알아?"
"모를 수가 있나. 그나저나 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는 건가?"
난 팔짱을 꼈다.
"찢어 죽일 새끼가 있어서 그 새끼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안되지. 그리고 이 새끼들 아무 잘 못 없는 내 가족들을 건들더라고. 솔직히 선만 안 넘었으면 그냥 남상 그 새끼만 죽이고 끝났지."
"그렇군. 결국 그 멍청한 놈들이 일을 그르쳤군. 일반인은 절대 건들지 말라고 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그 멍청이들이 일을 다 망..."
그렇게 말하던 나는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봤다.
"너 뭐야? 왜 그렇게 말해? 너 뭐 돼?"
남자는 말하지 않았다. 난 잠시 이자가 대변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변인이라면 아까 가디언의 이름을 말했을 때 지은 그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이 자가 조금 더 방어자의 중앙과 더 가까운 어떤 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자가 빙의된 사람이라고? 때때로 빙의한 영이 육의 기억으로 주변을 혼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경우 일까?
남자가 대답을 하지 않자 내가 계속 말했다.
"대답할 생각은 없는 거 같은데, 네가 방어자와 깊이 연결되어있는 자라는 건 알겠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만 물어보자. 너 선구자라고 알아?"
"알지. 이이제이以夷制夷 같은 거야. 왜 네가 찾고 있는 자가 그들 중 하나인가?"
난 뒤통수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남상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가 나타난 것이다. 남자는 날 보며 말했다.
"아까 말한 그 찢어 죽이겠다는 놈을 말하는 가보군. 하지만 한국의 방어자가 이 지경이 됐는데 바티칸이나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까?"
기대감이 실망감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한숨을 푹 쉰 난 놈을 향해 손을 두어번 휘저으며 말했다.
"뭐 아는 거 처럼 말하는 재주가 있는 거 같은데 확실히 알았다. 알아낼 게 없다는 거. 덤빌 거 아니면 방해하지 말고 거기 입 닥치고 있어. 마무리하고 빨리 집에 가봐야 하니까."
그렇게 말한 나는 다른 연구소에서 했던 거 처럼 모든 기계들을 살해해버렸다. 난 비로소 다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안도감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처리할 것이 남아있었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네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그 자의 몸에서 나와라. 그 몸은 원래 네 것이 아니잖아."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은 살면서 한 번 정도 이렇게 빛이 깃들기 마련이다. 이 자에게는 오늘이 그런 날이고. 그리고 당분간 이 자에게는 빛이 깃든 이유로 행운이 따르겠지. 나쁘지 않은 일이야."
"네가 빛이라고?"
"네 눈으로 보지 않았나?"
난 확실히 본질을 파악할 수 없는 그 이상한 영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질감에 갑자기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난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어휴 저리 꺼져. 아무튼 너랑 시답지 않은 대화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난. 너도 방어자 인 거 같은데. 보시다시피 대한민국의 방어자는 망했다. 그리고 지금 나에게 적의를 가진 마지막 무리를 조지러 갈거거든? 내가 그 한 명하고 약속한 것이 있어서 말이야. 곱게 살려 보내줄테니 어디 가서 깝치지 말고 쥐죽은 듯 살아. 알겠냐? 나 간다."
그렇게 말한 나는 핸드폰으로 열어 집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움직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말도 못할 정도로 강렬한 고통이 전신을 훑고 정수리까지 타고 올랐다.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으... 으악!"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고통 때문에 난 그만 자리에서 주저 앉아서 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재를 태우고 다니더니. 자신의 몸을 좀 먹는 짓이란 것도 모르고 말이야.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난 괴성을 지르는 와중에도 어느새 내 게로 다가온 남자가 날 내려다 보는게 보였다.
"저...저리 꺼져!"
난 악을 쓰면서 남자에게 발길질을 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찾아온 고통에 이번에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안에서 흑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이 붕괴 되려는 거야!'
영이 붕괴 된다고?!
남자가 말했다.
"그래. 영이 이렇게 상했는데, 계속 상처를 입히는 행위를 하니 붕괴되지 않고 버텨? 말도 안 되지."
남자는 마치 나와 흑아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 들어 이야기 하더니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날 들여다 보며 말을 이었다.
"그냥 두는 게 맞는데... 내가 또 저지른 게 있어서 가만 두지는 못할 것 같고..."
남자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내 몸에 손을 댔다. 그리고 말했다.
"후... 어쩔 수 없군. 이건 네가 나에게 지운 죄 때문이다. 이것으로 나에 대한 원망을 조금 가라앉혔으면 좋겠군."
난 지금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더 걱정 되는 건 내 몸보다 이제 곧 노유목령의 보호가 끝난 엄마에게 들이닥칠 가디언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찾아오는 고통은 점점 그 강도가 심해져 이제는 이 정신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잠시 뒤 이마에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게 느껴졌다. 남자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는 저 멀리서 말하는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떨어져라."
그리고 난 어느 순간 심에 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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