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행夢行 1

"이런, 또 이곳인가."
흑아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난 전에 단령과 자이를 만났을 때 들어온 적 있던 심 속에 있었다. 하지만 지난 번과는 다르게 온통 하얗던 주변이 금이 가고 천천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떨어져 내리는 공간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것을 보며 난 영이 부서진 뒤에 남는 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심에서 변화를 느낄 정도로 뭔가 움직인다는 건 실제 밖의 세계에서는 거의 찰나의 시간에 벌어질 일이라는 뜻이었다.
"전에 수련한다고 몇 번 왔어도 이런 건 처음 보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아는 사람? 난 도통 모르겠어서 그래."
전룡이 부서져 내리는 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물론 주변에 다른 자들도 알 길이 없는지 그의 물음에 답하지는 않았다.
난 날 이곳에 보낸 남자에 대해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남자. 하지만 방어자와 관련이 있는 자. 나와는 악연이 있다고 하는 자. 하지만 잔인하게 내치지는 못하는 자. 그 자는 내게 나는 모르는 빚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이곳으로 날 보낸 건 악의가 아니고 호의였다.
"그 사람이 날 심으로 보낸 이유가 있을 거야. 이 곳에 가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뜻 아니겠어? 아까 오기 전에 그랬지? 영이 부서진다고?"
흑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건 영의 붕괴 전조 증세와 같았어. 너만 느낀 것 같지만 너와 연결되어 있는 우리도 같은 고통을 느꼈지.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더군. 엄청난 속도로 진행 되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심에서의 시간은 느리게 가니까. 하지만 저렇게 천천히 부서지는 거처럼 보여도 언젠가 모두 무로 돌아갈 거야."
난 대체 내가 뭘 잘 못했길래 영이 부서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오히려 내 앞을 가로 막는 것들을 없앴으면 없앴지, 영혼에 피해가 될 만한 짓은 한 적이 없었다.
...설마 죄 없는 영을 파괴하고 다신 게 부메랑이 되어 다시 내게 돌아온다는 그런 정의로운 이유 때문인가? 그럼 그 놈들은? 죄 없는 나 같은 사람들을 괴물이라고 하고, 죽이는 그 놈들은 왜 부메랑을 안 맞는 건데?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졌다. 난 짜증나는 기분을 가라앉히며 침착하게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래도 하나 짐작해 볼 수 있는 건 그 남자가 한 말에서 의심해볼 만한 게 있기는 했다.
"염지를 사용한 게 문제가 됐나?"
그 자는 내게 재를 태워서 이렇게 된 거라고 이야기 했었다. 재를 태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지 밖에 없었다.
내가 흑아에게 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가 되진 않을 거 같은데... 그 술법이 사용자의 영혼에 손상을 주는 술법이었으면 애초에 사자들 사이에 금지되고도 남았을 텐데, 그런 일은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흑아의 말이 맞았다. 물론 나처럼 재가 적힌 종이를 태우는 대신 종이를 찢어 단시간 동안 제안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하는 술법이긴 했지만 아무튼 아예 사용하지 않는 술법은 아니었다. 난 갑자기 지난 번 이곳에 들어왔을 때처럼 꽉 막힌 느낌이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끙끙거리는 이 느낌. 난 자리에 주저 앉으며 주변에 있는 세 영에게 말했다.
"다들 앉아. 일단 앉아봐."
세 영은 마지못해 내 앞으로 다가와 자리에 앉았다. 이전에 심에 있을 때도 우리 넷은 이렇게 앉아서 수행을 한 바 있어서 어색하지는 않았다. 난 내 앞에 앉아있는 세 영을 둘러보며 말했다.
"일단,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영이 부서지고 있다. 그리고 누군지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이 도와줘서 이곳 심으로 왔다. 우리는 영이 부서지는 것을 멈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마 날 이곳에 보낸 자는 해결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곳 심으로 날 보낸 거다? 어떻게 생각해?"
하지만 내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은 엉뚱한 것이었다.
"어?"
그때 전룡이 날 가리키며 말했다.
"어... 대장. 대장 몸이..."
다른 자들도 내 몸을 바라봤고, 다들 깜짝 놀라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고개를 내려 몸을 바라봤고, 몸에 나 있는 희미한 실 금에서 검은 오라가 슬금 슬금 빠져나오려 하고 있었다. 파괴가 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시각적으로도 보이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이... 이게."
흑아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뭐가 됐던 그 방법을 빨리 찾아야겠군."
화랑이 흑아에게 물었다.
"사자인데 뭐 아는 내용은 없나? 파괴된 영을 다시 회복 시키는 것 같은 거 말이야. 너희들은 영의 상태로 싸우기면서 피해도 입을 거고 그렇잖아? 그렇다면 당연히 회복하는 방법이 있을 거 아냐."
"영이 상하면 그냥 상한 상태로 있지 뭘 회복해. 육신이야 회복이 가능하지만 파괴된 영혼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회복이 불가능해. 알지? 우리는 진명을 속인 자들이라 환생하지 않는다. 그 말은 영이 상하면 상한 상태로 계속 간다는 소리야."
흑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룡이 턱을 쓰다듬으며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잠깐. 그런데... 갑자기 드는 생각인데... 그거 진명을 찾으면 비슷한 거 아냐? 우리도 원래는 진명을 알지 못한 채 현생을 살고 있었는데, 대장에게 진명을 듣고 새롭게 다시 태어난 거잖아? 그런 파괴된 영도 다시 회복되는 거 아니냐고."
흑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되겠지. 모든 전생을 뛰어넘어 그 존재의 최초의 기억까지 되찾게 되는 거니까. 그리고 진명을 찾는 다는 게 쉬운 일이 아냐. 우리는 조금 특이한 경우였지. 수현이 어떻게 한 건지 모르겠지만 진명을 한 번에 끌어 올렸으니까. 참고로 나도 너희랑은 조금 달라 난 애초에 내 진명을 알고 있었거든. 아무튼 진명을 찾으려면 전생의 길을 걸어야 해."
전생의 길. 흑아의 기억에서 배워 알고 있었다. 한 영의 현생이 아닌 전생의 기억에 따라 나 있는 길. 그 길의 끝에 도달하면 영의 본질인 진명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하는 길이었다. 물론, 보통 살아있는 사람은 그 길을 걸을 일이 없다. 진명을 찾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건 죽은 자도 이건 마찬가지였다. 죽으면 저승에 갔다가 새롭게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굳이 전생의 길을 걸어 자신의 진명을 찾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전생의 길을 걸어 모든 기억을 찾아버린다면 더 이상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게 되기 때문에 길은 나 있으나 걷는 이가 없는 길이었다.
흑아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내용을 전룡에서 이야기 했다.
"전생의 길. 그 끝에 도달하면 자신의 진명을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지금의 자신이 아니게 된다. 현생의 기억과 전생의 기억이 모두 공존하기 때문이지."
그러자 전룡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렇지. 이미 경험을 해 봐서 알지."
"그렇기 때문에 할 수 있다고 해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도 아냐."
난 부서져 가는 몸에서 시선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영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 그럼 뭐? 여기서 뒈지라는 거야? 그럼 너희들도 다 죽어. 알지? 그리고 우리 엄마는? 엄마는 무슨 죄인데. 곧 영감이 엄마를 지켜준다고 약속했던 시간이 끝나가. 그러니까 뭐든 상관없이 해야 해."
세 영은 굳은 얼굴로 날 바라봤다. 다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만 쉽게 입을 떼지는 못했다.
아마 이미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된 경험을 한 이들이기 때문에 그 경험을 내게 시켜주고 싶지 않은 것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다른 방법이 없는데.
화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인.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지고 다른 방법이 있는 지 찾아보는 건 어떨까? 사자의 기억이 완벽하지도 않을 거 같고. 그가 모르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장담할 상황도 아니니까. 다행히 심으로 와있고, 진공간에서 주인의 영이 파괴될 때까지 시간이 아직 여유로우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게..."
그러자 흑아가 부서져 내리고 있는 심을 보며 화랑에게 말했다.
"많지 않아 시간..."
"그래. 시간은 많지 않아. 이걸 봐."
난 두 팔뚝을 내밀며 점점 갈라져 가는 피부를 그들에게 보였다. 실금은 이전과 비교해도 확실히 조금 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고. 진공간에서도 영의 파괴는 순식간에 일어난다는 뜻이지."
전룡이 날 보며 말했다.
"만약 진명을 찾는다고 해도 쉽지 않을 거야. 미리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이야기 해주는 거라고. 이건 진짜야. 어찌나 혼란스러운지..."
"걱정해줘서 고맙군."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흑아는 한 숨을 푹 쉬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난 전생의 길로 들어서는 정확한 방법은 몰라. 내가 아는 건 현생에서 더 내려갈 수 없는 의식의 가장 깊은 곳인 이곳 심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알 고 있어. 어떻게 문을 찾는지 그 문이 어디에 있는지도 난 잘 모른다고."
난 흑아를 말 없이 바라봤다. 그러자 흑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알고 있는 건가? 어떻게...?"
언젠가 심에 떨어졌을 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단령과 자이가 나타나고 그 뒤에 나가는 문이 보였을 때 말이다. 결국은 자신의 문제는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해결하려 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다는 걸 말이다.
난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바닥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것 같은 문이 보였다. 세 영은 갑자기 나타난 문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 조금 전 까지는 없었는데?"
전룡이 가장 먼저 문 쪽으로 달려갔고, 이어서 화랑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난 문으로 다가가는 둘을 보며 아직 내 곁에 남아있는 흑아에게 말했다.
"결국 이곳은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곳이잖아."
흑아도 내 말의 뜻을 이해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나."
나와 흑아도 둘을 따라 문 쪽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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