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행夢行 2
문을 통해 도착한 곳에서 나는 이전에 경험했던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그곳은 내가 상상을 하기 시작할 때 처음으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만났던 곳이고,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공간을 상상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중계. 하지만 서 있는 위치는 그때와 조금 달랐다. 영의 상태에서 밟은 중계의 땅은 예전에 산 자의 몸으로 밟았던 중계의 땅이 아닌 하늘이었다. 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아마 저곳 어딘가에 공선이형이 만든 뉴 시티가 있을 것이다.
처음 광모, 화연이와 함께 중계에 왔을 때는 지금 이곳처럼 아무 것도 없는 허허 벌판이었다. 그런 곳에 공선이 형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뉴 시티라는 이름의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비록 여러 사건 덕분에 만들면 파괴되고 만들면 파괴되는 저주에 걸렸지만, 다른 걸리는 것이 없는 지금은 아마 잘 만들고 있을 것이다.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뉴 시티가 있겠네."
나와 함께 중계로 들어온 세 영은 실제 본 모습으로 이곳에 온 적이 없어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전룡은 우리가 내려온 계단을 중심으로 이곳저곳 열심히 돌아다녔는데, 아무것도 없는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 실증이 났는지 흑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여기에 전생의 길이란 게 있는 거야?"
흑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있으면 나타날 거야."
그래 곧 있으면 나타날 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늘에서 나무 판자가 우리 넷 앞으로 떨어졌다. 그건 무질서하게 그냥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를 갖추며 내려왔는데, 어떤 것은 울타리가, 어떤 것은 집의 외벽이 어떤 것은 지붕이 되었다.
"으...으아 이게 뭐야?"
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바리전."
삽시간에 하늘에서 떨어진 나무로 만들어진 그 집은 외곽에 나무로 된 울타리까지 쳐져 있어서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흑아와 나는 그 곳에 거주하는 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곧 굳게 닫혀있던 나무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어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망자는 헤매지 말고 들어오거라."
그녀의 언령에는 힘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건 다른 세 영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때 안에서 또 한 번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들어오거라."
이번에는 거역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세 영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다. 허허벌판인 밖과는 다르게 울타리 안은 딴 세상이었다. 겉으로 볼 때는 작게만 보였던 나무 집은 온데간데 없고,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살법한 아름다운 궁전이 있었다. 주변에는 처음 보는 아름다운 꽃들이 심어진 꽃밭이 펼쳐져 있었고, 궁궐의 왼편으로는 길이를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강이 있었다. 궁궐의 오른 편으로는 커다란 복숭아 나무가 가지를 뻗고 있었고, 그 아래에는 한 여인이 시중을 받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세 영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너... 네놈은 죽지 않았구나?"
날 보고 하는 소리였다.
네가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본인 쪽으로 손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녀의 앞에 선 우리 넷은 깜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산 자가 망자의 땅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이곳은 산 자가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러자 흑아가 말했다.
"바리신鉢里神이시여. 우리는 전생의 길을 찾아 이곳에 왔습니다."
바리신. 망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안내인을 자처하는 이 신은 망자가 중계를 헤매면 어김없이 나타나 저승의 길로 안내해주는 고마운 신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생의 길로 가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신이었다.
바리신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흑아를 바라봤다.
"전생로前生路를 걷겠다고? 산 자가? 네 놈은 사자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지 않느냐? 한 번 걸은 적이 있으니 말이다."
"끝까지 가지는 못했습니다. 걷던 도중에 우연히 제가 알고자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바리신은 못마땅한 눈으로 흑아를 바라보다가 눈을 크게 뜨더니 떨리는 손으로 어떤 것을 가리켰다. 그것은 나와 흑아, 그리고 다른 두 영과 연결되어 있는 흑줄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그녀는 흑줄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마침내 날 바라봤다. 물론 흑줄이라는 걸 본 저승의 많은 것들이 놀라는 장면은 많이 봤기 때문에 난 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다음 말은 조금 신경쓰였다.
"기어코 나타났군."
난 영문을 모른 채 그녀를 바라봤지만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흑아와 다른 두 영도 바라봤다. 흑아, 화랑, 전룡을 천천히 살피더니 이유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랬어..."
그녀는 시중을 들던 시녀를 손짓으로 물렸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휘저으니 우리는 어느새 어떤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곳은 만찬을 즐길 수 있는 둥근 식탁이 놓인 방이었는데, 바리신은 어느새 한 곳에 자리해 앉아있었다. 그녀는 우릴 향해 말했다.
"앉으시오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대충 근처에 있는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바리신이 손을 휘젖자 우리 앞에는 김이 나는 찻잔이 생겨났다. 바리신은 자신의 앞에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소. 아주 예전에도 두 번 산 자가 전생로를 걷기 위해 날 찾아온 적이 있지. 그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영들과 함께 흑줄에 묶여서. 하지만 그때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소. 아니 사실 그들이 전생로를 걷기 위한 목적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거요. 그대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걷다. 그 끝에 도달하면 알게 될 거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무튼 그때 그들은 전생로를 걷고 돌아와서 내가 오늘 이 날에 대해 이야기 했다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이 그 날이 된 게지."
난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처음 그녀에서 말했다.
"난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알지 못합니다. 난 그저 내 영혼이 무너져 내리고 있고, 그걸 막기 위해 전생의 길을 걸어서 내 진명을 찾으려고 하는 겁니다."
바리신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 이전에 나를 찾았던 자도 똑같이 말했지. 많은 영을 죽여 저승으로도 보내지 않고 무로 돌려보내지 않았소이까? 그대의 존재가 어떤 건지 알면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 거요. 그리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영이 소멸하려 하는 거고."
난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 들었다. 바리신은 우아하게 찻잔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왜 그런 일을 하시오. 그냥 저승으로 돌려보내면 될 것을. 왜 그렇게까지 분노해서 자신을 갈아 먹는 짓을 했단 말이오."
난 죽은 화연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가족을 가지고 협박을 한 선생님의 말도 같이. 갑자기 잠잠했던 화가 다시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리신은 말없이 내 표정의 변화를 살피더니 내 앞에 놓인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드시오.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요. 아직 현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작은 일에 연연하는 것이니."
난 내가 분노하는 원인을 작은 것이라 말하는 바리신의 말에 순간 화가 들끓듯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잠자고 있던 내 영혼 속의 검은 오라가 슬슬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난 눈을 치켜뜨며 바리신을 바라봤다.
"작은 거라 말하지 마세요. 당신은 내게 그것들이 얼마나 큰지 모르지 않습니까?"
바리신은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 했다.
"내가 왜 모릅니까. 모르는 건 그대요. 그대는 아직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지 않소."
"내가 누군데요?!"
내가 소리 치자 슬금슬금 피어오르던 검은 오라가 바리신을 덥치기라도 하듯 위협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내 주변으로 무장을 한 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은 창과 활을 위협적으로 내게 겨눴다. 바리신은 모습을 드러낸 호위들에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물러가라. 너희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하지만. 공주마마. 이자가..."
바리신은 눈을 무섭게 뜨며 말했다.
"물러가래도!"
호위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게 겨누던 창과 활을 거두지 않았다.
"어서!"
바리신이 한 번 더 말하자 호위들은 그제서야 겨눴던 무기를 거두며 나타났던 것 처럼 다시 모습을 감췄다. 호위들이 모습을 감추자 바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사과를 했다.
"죄송하게 됐소. 그대의 기를 위협적으로 느꼈다 보오. 내 아이들이 무례를 저지른 것을 용서하시오."
뭐, 나도 잘 한 것은 없었으니 천천히 화를 누르기로 했다. 그러자 피어올랐던 검은 오라가 천천히 사라졌다. 바리신은 천천히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전생로를 걷겠다 하셨소?"
"그렇습니다."
바리신은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전생로를 걷는 다면 더 이상 그대는 그대가 아니게 될 거요. 그래도 상관 없소?"
"걷지 않으면 소멸되어 없어질텐데 내게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빨리 돌아가 난 내 어머니도 구해야해요."
"...아직 현생에 미련이 많은 것 같은데... 괜찮을지 모르겠군..."
바리신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참고로, 그대가 전생로를 걷는 건 단지 그대만의 일이 아니오. 그대는 그걸 알아야 하오. 그대가 전생을 알아버리고 진명을 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난 그저 내 가족과 내 주변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다시 살려는 거예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중요하지 않아요."
바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항상 그랬지. 그런 마음 때문에 결국 그렇게 현생으로 돌아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는 군."
바리신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내 앞에 놓였던 찻잔이 바뀌며 조금 더 넓고 둥근 잔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김이 나던 조금 전의 차와는 다르게 살짝 살얼음이 끼어있는 액체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잔은 나 뿐 아니고 다른 세 영의 앞에 놓여있는 것도 바뀌어 있었다.
바리신이 말했다.
"드시오. 그리고 다른 세 분도. 이 길은 당신들도 함께 걸어야 하오."
그러자 흑아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전생의 길을 같이 걸으라는 말씀이십니까? 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다른 사람의 길을 같이 걸을 수 있는 겁니까? 원래?"
바리신이 고개를 저었다.
"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오. 그리고 그에게 묶여있는 당신들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바리신은 세 영을 차례대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분의 전생로 끝에 도착하면 내가 왜 이 말을 하는지 알 거요. 왜 당신들이 진명을 쓰지 못하고 가명을 쓰고 있는 건지."
바리신의 말을 들은 세 영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말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내 식령들이 사용했던 이름이 가명이라고?
우리 넷을 표정을 읽은 바라신이 처음으로 옅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해하오. 그런 표정을 짓는 것도.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도 그대들 스스로의 몫이오"
그녀는 우리 앞에 놓인 차를 가리켰다. 흑아와 난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수면초요. 전생로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깊은 잠에 빠져야 하는 건 알고 있지 않소. 드시오. 그리고 다녀오시오.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걸을 수 없을 거요. 그대의 전생이란 게 그런 거요. 그럴 때는 멈추고 돌아와서 다시 현생을 살아가도 되오. 물론 지금의 그대가 아닌 그대로 살아가야 할 거지만. 완전히 다른 자가 되는 것보다는 나을 수 있소. 아직 현생에 미련이 많지 않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솔직히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뭔 말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알겠다. 그녀가 내 존재에 대해 나보다는 더 잘 알고 있다는 거. 그래서 난 날 잘 아는 사람의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물론 믿음에 대한 결과에 어떻게 될 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내 문제는 내 스스로 해결 해야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내가 조용히 찻잔을 들지 내 눈치를 살피던 다른 세 영도 조용히 날 따라 찻잔을 들었다. 그리고 넷은 약속이라도 한 듯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아주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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