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행夢行 3

그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곧은 직선의 길이었다. 처음에는 나 장수현의 현재부터 내가 태어난 순간까지의 모습들이 길을 따라 시간 역순으로 늘어져 있었다. 다른 세 영들과 내 과거를 함께 보고 있자니 쑥스러운 마음도 들긴 했는데, 셋은 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사고를 당해 각성을 했을 때는 세 명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나도 제 3자의 시점에서 사고가 난 장면을 보고 있자니 저 상태에서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다만 상상을 할 수 있는 이 힘 덕분에 죽지 않았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 사고 이전의 평범했던 내 과거를 돌아보며 그렇게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걷고 걷고 걷다 보니 결국 내가 태어나는 그 순간에 도달했다.
"현생의 끝이군. 이제부터는 전생이다."
흑아의 말이었다. 이미 한 번 걸었던 자로 흑아는 이 길이 익숙한 것 같았다.
"보통 여러 전생을 거쳐 현생까지 오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으면 첫 번째 전생이 나타날 거야. 거기서부터는 마음 잘 먹어야 해. 전생을 본다는 건 전생의 기억을 기억해 낸다는 뜻이지. 그 순간부터 넌 더 이상 지금까지의 장수현이 아닌 다른 장수현이 된다는 거야. 과거와 현재가 섞인 존재가 된다는 거지. 이해했나?"
난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오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20년도 안되는 내 인생을 훑고 지나가는데 이 정도 시간이 걸렸다면 전생도 얼마 되지 않아 나타날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오산이란 걸 곧 깨달았다.
아무것도 없는 길을 꽤 달렸는데 보이는 건 없었다. 그렇게 내 현생을 돌아보는 시간에 스무배쯤 되는 시간이 지났을 때 흑아는 자리에 멈춰서서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이상한데. 보통 평범한 영이 육신에서 빠져 나와서 저승으로 가기 전까지 현생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대략 200년, 전생에서 그 기간을 꽉 채운 뒤에 다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벌써 전생이 나와야 하는 기간만큼 거슬러 올라갔는데, 왜 안 나오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확률이 적더라도 짐승이나 나무로든 전생이 있어야 할텐데. 이렇게 아예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군."
전룡은 사냥꾼 답게 길 끝 쪽을 응시하며 말했다.
"앞으로도 더 보이는 건 없는데?"
화랑이 고개를 갸웃 거리며 흑아에게 물어봤다.
"이게 이상한 건가?"
"이상하지. 환생도 안하고 영인 상태로 어딘가 계속 있었다는 소리인데. 아까 바리신을 만나고 그런 소리가 나와. 영이 현생에 미련이 남아 너무 오래 떠돌면 사자가 잡아오기 망정이고, 잡혀온 영이 중계를 떠돌면 바리신이 저승으로 인도를 하는데 지가 환생을 안하고 버티겠어."
흑아의 설명을 들은 화랑의 표정을 보니 분명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하는 척 하는 것 같이 보였다. 난 더 생각하기도 귀찮아서 소리쳤다.
"뭐 가다보면 나오겠지. 일단 뛰어! 뛰다 보면 나오겠지."
말을 마친 내가 뛰기 시작했고, 나와 흑줄로 연결되어 있던 세 영들도 얼떨결에 따라 뛰기 시작했다.
*
얼마나 달렸는지 몰랐다. 언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끝없는 길을 계속해서 달린 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영의 상태여서 지치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으로 힘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수다도 떨고 그러면서 이동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내 다음 전생이 나오지 않자 점점 넷은 말이 없어져 갔다.
있긴 하겠지? 이 길의 끝?
그때 였다.
"있다!"
전룡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고, 다른 셋도 뒤 이어 전룡이 발견한 걸 보았다. 그건 길 한 가운데를 막고 있는 거대한 문이었다.
이상했다. 보통 전생로에서 전생의 기억을 보는 건 현생의 장면을 다시 돌아보는 것 처럼 길 옆으로 보이는 내 전생의 행정을 시간의 역순으로 돌아보며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미 전생의 길을 다녀왔던 흑아의 기억에도 이런 문은 없었다.
"이건 뭐지?"
문은 거대한 철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크기나 무게로 볼 때 혼자 열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문은 커다란 쇠사슬로 감겨 굳게 봉인되어 있었다. 흑아가 날 보며 말했다.
"뭐하나 평범한 게 없구만. 이건 나도 잘 모르는 건데."
화랑은 문 앞으로 다가가 문에 감겨 있는 쇠사슬을 건드렸다. 그러자 곧 그의 몸이 뒤로 휙 날아가버렸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의 작용이 화랑을 튕겨내 버린 것이었다. 문은 명백히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화랑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는데, 쇠사슬을 건드린 그의 손이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흑아가 내게 말했다.
"네 전생이니까 네가 해봐."
전룡도 합세해 흑아와 전룡이 내 등을 떠밀었다. 비겁한 놈들... 마지못해 앞으로 나선 나는 조심스럽게 쇠사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천천히 쇠사슬에 붙잡았다. 순간 내 온 몸에서 검은 오라가 피어 오르더니 문을 막고 있던 쇠사슬에 들러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곧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들러붙은 내 오라가 쇠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어...?"
난 쇠사슬에서 손을 떼려 했으나 손에 본드라도 묻은 것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그러는 와중에도 내 오라는 빠른 속도로 쇠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오라가 빨려 들어갈 수록 영이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피로감이 점점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화랑이 소리쳤다.
"주인! 정신차려! 오라를 다 잃을 셈이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난 마음을 다시 잡고 빨려 들어가는 오라를 제어해 내 몸에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오라를 잡아 당기기 시작했다. 쇠사슬로 빨려 들어갔던 오라가 조금씩 밖으로 다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흑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봉인이다. 네 전생이 이 이상 가지 못하도록 봉인을 해둔 거야! 이... 이런 건 본 적이... 아무튼 그 봉인은 같은 오라를 사용하는 자가 아니면 풀 수가 없어. 전생에 네가 어떤 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끔찍한 짓을 해놨어."
난 흑아의 말을 들으면서도 내 오라가 쇠사슬 안으로 더 이상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질 줄 알아!"
내가 악을 쓰고 소리를 지르자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서서히 강해지는 그런 바람이 아니고 갑자기 맹렬히 불어오는 태풍과 같은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얼음과 같이 차가워서 살을 애는 듯 한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다른 영들도 강해지는 바람에 견디기 힘들었는지 각자의 오라를 발산해 바람을 막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모든 곳을 쓸어버릴 듯 불어오던 바람이 이제는 나와 문 주변에만 집중적으로 불어 닥치기 시작했다.
전룡이 소리쳤다.
"오라로 몸을 보호해! 대장! 영 자체를 공격하는 바람이야!"
그랬나? 그래서 고통이 그대로 느껴진 건가. 몸을 내려다 보니 안 그래도 손상되어있던 내 영에 더 많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라로 몸을 감쌀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 잘못하면 쇠사슬에 붙잡혀 내 오라를 모두 빼앗길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내 영을 손상시키는 바람을 무시하고 오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오라가 천천히 내 영 쪽으로 다시 끌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라를 끌어들일 때마다 바람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쇠사슬이 빨아들인 내 오라와 바람이 관련이 있어 보였다.
"수현이 네 오라가 일으키는 바람이야! 다시 빼앗아와!"
뒤에서 흑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거의 다 끄집어 냈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지막 젖먹던 힘까지 모두 사용해 쇠사슬로 빨려 들어갔던 내 오라를 끄집어 냈다.
"됐다!"
전룡의 목소리와 함께 쇠사슬로 끌려 들어갔던 모든 오라가 빠져나왔고, 그 순간 문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이 마치 유리 깨지듯 산산히 조각이 나 흩어졌다. 그리고 쇠사슬이 있던 자리에는 검은 흑줄이 남아 내 오라에 달라 붙어 딸려왔다.
"응?"
난 오라와 함께 딸려온 흑줄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흑줄은 오라가 내 몸에 흡수되어간 그 자리까지 따라가더니 등 쪽에 딱 붙었다.
"이... 이게 뭐야."
난 나와 연결된 흑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흑줄은 굳게 닫힌 문 뒤로 연결되어 있었다.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세 영은 나와 마찬가지로 새롭게 붙은 흑줄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전생의 길에서 새식구를 받는다고?"
전룡이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이야기 하자 화랑과 흑아도 그 말에 동의하는 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예측이 안되는 인간이긴 했는데, 저승 상식을 뛰어넘는 인간이라 조금 놀랍군."
흑아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굳게 닫혀있던 문이 마찰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 넷은 입을 다물고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열리는 문을 바라봤다. 그때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젠장! 뭐하는 거야! 빨리 문 여는 거 안 도와?! 어휴 장정이 셋이나 되는데 빠져 가지고."
우리는 당황한 나머지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고, 안쪽에서 다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아! 드럽게 무겁다고! 이 봉인! 빨리 여는 거 도와! 이 망할 놈들아!"
우리는 일단 목소리의 정체가 누군지는 몰랐으나 그녀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하게 문 쪽으로 달려가 힘을 주어 철문을 열었다. 그녀의 말대로 철문은 생각보다 무거워서 넷이 달라붙어도 잘 열리지 않았다. 우리가 끙끙거리며 겨우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안에서는 지화보다도 키가 작은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우리 넷을 못마땅한 얼굴로 둘러보더니 손을 탁탁 털며 손가락을 써가며 나를 제외한 세 영의 숫자를 셌다.
"제대로 왔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모두 데리고 왔구먼."
그렇게 말한 그녀는 내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난 도시都市. 아주 오래 이곳에서 그대를 기다린 자다."
난 얼떨결에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았고, 그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엄청난 한기가 느껴지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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