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在器 1(수정)

누군가 내 뺨을 때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번쩍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에는 익숙한 세 얼굴과 낯선 얼굴이 있었다. 흑아와 화랑, 전룡, 그리고 자신을 도시라고 말한 영. 난 끙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지?"
"밖에 시간으로 한... 한 시간?"
말한 건 흑아였다. 난 고개를 돌려 등으로부터 딸려나온 흑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끝에는 도시가 있었다. 난 도시에게 물었다.
"왜 내 식령이 된 거지? 여기 셋 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는데."
그러자 그녀가 웃었다.
"이 생의 인연이 아니니까. 그나저나 다른 자들은 아직 완전히 기억을 찾지는 못한 것 같구나. 뭐 당연하지. 원래 그런거니까."
나를 제외한 세 영이 서로를 쳐다봤다.
이미 진명을 찾은 자들인데 기억을 찾지 못하다니.
도시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뭐 그건 이 길을 걷다보면 해결 될 거니까 됐고, 일단 내 봉인을 풀었다는 건 제가 자격은 갖췄다는 말이니까. 앞으로 길잡이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야기 해주지."
길잡이었냐...
"우선 이 길을 걸었다는 건 전생의 기억을 찾아 진명을 찾으려는 거지?"
"맞아."
"근데 상태를 보니 영이 너덜너덜한 거 같은데 설마 영을 회복하려고 찾으려는 건 아니지?"
"맞는데?"
도시가 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한 숨을 쉬었다.
"역시 네놈들은 항상 그랬어. 일단 걸으며 이야기 하자. 다른 둘은 만만치 않을 거야. 난 네가 자격이 되는 지만 판단하는 수준이었던 거고."
"둘이나 더 있다고?"
"내가 엮였던 생에는 그랬다는 거지. 아무튼 가보자. 둘은 전생으로 뛰어 들어야 해. 그리고 네 전생과도 마주해야 할 거야."
도시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날 보며 씩 웃더니 말했다.
"아주 정신 나간 녀석이지."
그때 화랑이 도시에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기억을 다 못 찾았다는 게 무슨 말이야. 우린 이미 주인에게 진명을 들어 귀속된 자인데. 방법은 조금 다르지만 전생의 길 끝을 간 자들이나 마찬가진데."
도시는 화랑을 지긋이 보더니 갑자기 눈빛이 바뀌었다. 그녀는 화랑과 전룡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스스로 걸어보지도 않은 주제에."
그리고 그녀는 흑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넌 끝까지 걷지도 않은 주제에!"
영문도 모른 채 비난을 받은 내 식령들은 도시의 기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도시는 계속 이야기 했다.
"뭘 끝까지 걸어. 걷긴! 조용하고 잘 따라오기나 해.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그리고 도시는 날 보며 말했다.
"일단 넌 지금 네 진명 중 하나도 아는 게 없잖아? 안 그래? 그거부터 찾아야."
응? 진명이란거 전생의 길을 끝 까지 걸으면 알 수 있는 거 아니었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시를 바라보자 도시가 한 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넌 좀 다르다니까. 네 나눠진 생 마다 진명의 글자 하나씩을 가지고 있어. 그걸 다 찾아내야 네 진명을 알 수 있어. 그런데 넌 지금 현생에서 네가 무슨 글자를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내지 못했잖아. 그걸 찾아야 해."
머리가 아파왔다. 상상을 하기 전까지는 정말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던 나인데 이렇게 바뀌고 나서부터는 뭐 하나 일반적인 게 없었다. 상상하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하고, 진명을 찾는 것도 이상하고. 다른 영을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도 이상하다고 하질 않나.
"그건 어떻게 하는 건데?"
"당연히 네 재를 끄집어 내야지. 지금까지 너는 다른 자들의 재를 다뤘잖아? 너의 재를 끄집어 내면 알 수 있을 거야. 지금 네가 가지고 있는 글자."
그렇겠지. 내 존재 이유를 알아야 하는 거니까. 그러고 보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염조령을 셋이나 다루는 주제에 정작 내 재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니.
사실 재기를 어떻게 꺼내는 지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흑아는 이미 날 만나기 전부터 재기를 꺼내 사용하던 존재였으니. 화랑이나 전룡은 내가 강제로 그들의 재기를 꺼냈지만 흑아는 달랐다. 그는 애초에 전생의 길도 걸었고, 스스로 재기를 꺼내 사자로서 휘두르기도 한 존재였다. 뭐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 방법을 이용할 수 없었다.
내가 무표정하게 있자 도시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해했지? 재기를 꺼내야 해."
"알고는 있지. 기억은 나는데 실제로 해본 건 아니지만."
난 화랑과 전룡을 차례대로 둘러보며 말했다.
"다른 자들의 재기도 꺼내본 적이 있긴 해. 여기 줄의 재기도 내가 꺼냈지. 아마? 뭐 그때는 홀린 듯 한 거라서 어떻게 한 건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영렴을 재기로 만들면 되는 거야."
이거였다. 나에게는 재기로 만들 수 있는 영렴이 없었다. 그래서 흑아가 사용한 방법으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도 알지 그런데 현생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내가 지금 재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지? 영렴이란 오랫동안 쌓아온 영의 기억인데, 그걸 알기 위해서는 이 길을 다 걸어야 하는 거잖아? 길을 제대로 걷지도 않은 지금 내게 영렴이란 게 있기나 해?"
도시는 내가 뭘 의심하는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재기라는 게 영렴으로 만드는 건데, 영렴은 엄청난 세월 동안 축적된 영의 기억이고. 하지만 넌 지금 아직도 전생에 닿지 못했으니까 영렴이 없다. 그러니 재기는 못 꺼낼 거다? 이거잖아? 간단해 현생의 기억으로 재기를 만들어야지."
그러자 화랑이 물었다.
"그렇게 짧은 기억이 신화를 이룰 수 있다고 말하는 건가?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하다면 염조령이 되지 못할 자가 없을텐데."
그가 품은 의문에 흑아가 동의했다.
"맞아. 영렴이란 게 그렇게 쉽게 쌓이는 게 아냐."
도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평범한 영이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이 자는 달라. 이제 이 말하는 것도 지겹네. 이 자는 지금 이렇게 한번씩 현생에 나타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고. 그런 어마어마한 자의 영의 기억은 짧아도 엄청나겠지? 출력차이라고 생각해."
내가 사고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육체에 얽여 있는 것도 아닌데 두통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사실 두통은 마음의 병이었나.
"그러니까 나는 네 표현을 빌리자면 좀 다르니까 다른 사람이 수없이 많은 전생을 거쳐야만 쌓을 수 있는 영의 기억을 현생만 살아도 쌓을 수 있다는 이 말인가?"
"맞아. 정확해."
"믿기지 않는 군."
도시는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해 보면 알 거 아냐? 만들어봐 분신령, 만들 수 있으면 영렴이 있다는 뜻이잖아."
도시의 말이 맞았다. 전생의 길을 끝까지 걸은 자는 돌아온 영의 기억으로 영렴이 쌓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분신령이라는 것을 만들어 보면 되는데, 그건 사자의 술법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 술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수인만 맺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자신의 영렴이 필요했다. 그리고 분신령이 만들어진다면 그 뒤부터는 대게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듯 그것과 싸워 이겨 재기로 만들면 됐다. 물론 쉽지 않다. 수없이 쌓인 영의 기억은 그만큼 강력한 존재니 정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고,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신령은 재기가 되지 않기 위해 소환되면 강렬하게 저항을 하니 안그래도 어려운 일이 더 어려워 지는 것이다.
"해봐. 분신령."
난 흑아를 바라봤다. 흑아도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고, 나도 같은 마음으로 마른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에이... 설마..."
하지만 도시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해보라니까?"
"진짜?"
"응. 해봐."
난 이 작은 여자가 어찌 나보다 나를 더 믿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분신령을 소환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고 있는 흑아가 긴장한 표정으로 다른 두 영에게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뒤로 물러나. 그러지 않겠지만. 분신령이 나타나면 휩쓸리지 않게 조심하고."
사자의 방법으로 재기를 꺼내 본 적 없는 두 영은 침을 꼴깍 삼키며 흑아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실 영렴이란 게 쌓였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흑아의 기억에 따라 수인을 맺으면 아마 내 안에 쌓여있는 영렴이 빠져 나와 그대로 분신령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면...
"하... 겁나는데."
난 그렇게 말을 내뱉고는 천천히 수인을 맺었다.
- 작가의말
중복해서 붙어있는 내용이 확인되서 수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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