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기在器 2
"내 뒤로 서!"
뒤에서 도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도시가 다급하게 외치는 이유에 대해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눈으로 그 이유를 확인하고 있으니까.
"어이! 결계를 칠 거야. 둘이 휘두르는 오라. 일반적인 영이 버틸 수준이 아냐.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고."
"그러던지!"
"끝까지 들어! 그 말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저 자들의 힘 없이 너 혼자 만의 힘으로 싸워야 한다고!"
이런?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도시와 세 영의 기척이 귀신같이 사라졌다. 난 내게 날아드는 공격을 피하면서 흑아나 다른 두 영의 오라를 끌어내려고 시도했다. 도시가 말했던 것 처럼 묵묵무답이었다.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난 지금까지 세 영의 힘을 이용하여 싸워왔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뭔가를 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 전에 내 오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할까?
난 이를 갈며 앞에서 날 향해 달려드는 것을 바라봤다.
분신령. 수인을 맺었을 때 몸에서 뭔가 확실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영 하나가 생겨났다. 저걸 분신령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나와 똑같이 생긴 영. 거울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만한 인물을 실제로 보니 감회가 새롭다.
설마 진짜 소환될 줄 몰랐는데, 내 현생의 기억이 어떻길래 벌써 영렴이란게 쌓인 건지 모르겠다. 친구들하고 놀고 떠들고 숙제하고 뭐 그런 것도 다 영렴의 재료가 된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분신령의 위력이 흑아의 기억에서 봤던 것과는 다르게 훨씬 더 파괴적이었다.
분신령의 손에는 커다란 대검이 들려 있었다. 다소 투박하게 생긴 검에는 그 어떤 장식도 달려있지 않았다. 보아하니 저것이 내 재기인 것 같다. 흑아도 자신의 분신령에게서 재기를 뺏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은 왜 사자들은 재기는 죄다 낫이냐 말이다.
"기어코 돌아가려 하는가. 그냥 현생에 만족하고 살면 될 것을!"
분신령이 희안한 소릴 한다. 현생에 만족하고 살려는데 이상한 억까를 당해 여기까지 기어들어온 내 심정을 네가 알겠냐고.
난 녀석이 휘두르는 검을 필사적으로 피했고, 아무것도 없는 뒤쪽의 공간에 뭔가가 있는 건지 보이지 않는 벽에 분신령의 검이 큰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는 튕겨져 나왔다. 도시의 결계가 성능이 확실하긴 한 것 같다. 분신령은 공격 실패 같은 것에 좌절하지 않고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조금 오만하게 말하자면 지금까지 싸웠던 자들 중에 이토록 위협적인 공격을 퍼부은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 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고 해도 무방할 존재라니 왠지 모르게 이런 중2병스러운 생각이 든다.
"날 이기는 건 내 자신 뿐이다."
아무도 안 들었겠지? 결계가 쳐졌으니까... 응?
그러는 사이 나와 똑 닮은 녀석은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한 방만 맞아도 영의 절반이 소멸될 것 같은 공격을 쉴 새 없이 날리기 시작했다. 난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가며 생각했다. 저 미친놈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
현재로서는 저것의 공격을 피하기도 벅찬 상태. 영렴이란 게 이토록 대단한 거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 스타일은 압도적인 전력으로 여유를 부리며 상대를 짖밟는 스타일인데, 오늘은 그게 어려웠다. 모르긴 몰라도 이 녀석의 능력은 나와 비슷하거나 나 이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공격하던 분신령은 공격을 멈췄다.
"속도에는 자신 있나 보군. 쥐새끼처럼 피하기만 하는 걸 보면."
"아니. 막 자신이 있거나 한 건 아닌데."
분신령은 씩 웃더니 들고 있던 검의 검대에 손가락을 가져가더니 슥 문질렀다. 그러자 커다랗고 투박했던 대검이 어느새 작은 단검으로 바뀌어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바뀌어서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런 것도 한다고? 재기의 모양을 바꾼다고?"
내가 당황해 소리치자 분신령이 말했다.
"왜 이걸 재기의 모양이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렇게 말한 분신령은 조금 전 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내게 쇄도해 들어왔다. 순간 느꼈다. 이건 못 피한다.
나는 팔에 내 오라를 감싸며 놈이 휘두르는 검을 한 팔로 막았다. 달리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기도 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생각해서 실행한 방법은 운이 좋게도 정답이었다. 분신령이 휘두른 재기는 내 검은 오라에 가로 막혀 조금 전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쳤던 것 처럼 튕겨져 나갔다.
이거구나!
"결국 재기도 오라란 말이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럼 지금까지 식령들의 힘들 사용할 때 어떻게 사용 했는데."
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구나. 식령들의 힘을 사용할 때 오라를 사용하지 않았던가. 응? 그런데 저 자식은 그걸 왜 나한테 알려주는 거지? 뭐 아무튼.
난 내 오라인 검은 오라를 끌어올려 익숙한 것을 상상했다. 지금 상태에서 가장 사용하기 편한 것은 역시 화랑의 검이었다. 그리고 나의 상상은 곧 현실이 되서 검이 되어 나타났다. 이 오라의 검은 평소 화랑의 오라로 상상해 만들어내던 검과 달리 활활 불타지 않았다. 다만 검의 날에서 검은 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식령들의 오라는 각각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흑아의 오라는 영에 직접 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오라다. 그래서 흑아의 오라를 사용하면 육에서 영을 분리해 낼 수 있었다. 반면 화랑의 오라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었다. 화랑은 그 무엇보다도 육에 강력한 영향을 주며 화랑의 오라에 당한 영들은 자신이 죽는 것도 모른 채 육을 잃게 된다. 마지막으로 전룡의 오라는 번개였다. 그 무엇보다 빨랐고, 정확했다. 비록 광모의 빛보다는 느리겠지만 그건 특수한 경우고 보통 사람이라면 그의 오라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다면 내 오라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내가 검을 꺼내 들자 날 마구잡이로 공격하던 분신령의 움직임이 멈췄다. 무기를 들지 않는 이전과는 상황이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분신령은 들고 있던 재기의 형태를 다시 한 번 바꿔서 내가 들고 있는 검과 비슷한 모양의 검으로 변형시켰다.
"수단이 생겼으니까 지금부터는 순수한 무의 대결이 되겠군."
분신령은 씩 웃었다.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잊었어? 난 네 기억의 집합이야. 그런 걸 기댄다면 날 절대 이길 수 없을 걸."
그것도 맞는 말이다. 평소에는 내가 적들에게 저랬던 거 같은데... 내가 당하니 은근히 열 받는다. 하지만 지금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일단 부딪치기로 했다. 난 오라로 만든 검에 다시 오라를 실어 녀석을 향해 쇄도 했다. 놈도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검에 오라를 두르더니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우리 둘이 그리는 검의 궤적은 정확히 일치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위에서 아래로 놈은 아래서 위로 휘둘렀다는 정도였다. 그렇게 맞붙은 검은 귀를 찢는 날카로운 금속성을 내며 서로 반대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휘두르는 힘도 동일 하다는 사실. 그래도 긍정적인 건 녀석이 나보다 더 강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아니 녀석은 나와 완전히 동일한 속도와 힘 그리고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말은 아까 장난 식으로 말했던 그 말을 실제로 이뤄내야 승산이 있다는 소리였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분신령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이제 깨달았나? 이 싸움은 절대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이야. 그러니 포기해. 포기한다고 하면 조용히 다시 돌아가 주지."
빌어먹을... 나와 동일한 힘과, 속도, 기술 그리고 사고까지 동일하다면 이건 분신령 저 자식이 하는 말과 같이 계속해도 승부가 나지 않는 싸움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경우에는 누가 운이 더 좋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날 가능성이 더 높았다. 그때 난 흑아를 떠올렸다.
만약 분신령이 모두 이와 같다면 흑아는 분신령을 어떻게 이긴 걸까?
그때 내 생각을 읽은 것인지 저 재수없는 놈이 한 마디 한다.
"설마 흑아를 떠올리는 건 아니지? 그 놈과 우리가 같을까? 진명을 찾은 자의 기억의 무게와 영렴이 가지는 기억의 무게가 같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아니겠지... 영의 기억이 그 자의 모든 기억과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으니... 결국 보통은 진명에 이르러 염령에서 재기를 꺼낸 자의 분신령은 그 자보다 약할 수 밖에 없다는 소리였다. 아니면 최대한 쳐도 나와 같이 완벽히 같은 능력을 구사하는 분신령을 만나거나. 그 말은 지금 이 염령이 내 현생의 기억으로만 구성된 놈이라는 소리였고, 내가 전생의 기억을 조금만 더 찾았다면 진짜 개미 손톱만큼이라도 이 놈보다 강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저 놈은 왜 아까부터 자꾸 나한테 깨달음을 주는 걸까.
난 재기를 어깨에 걸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분신령을 바라봤다.
더 생각하자니 머리가 아파왔다. 이런 건 내 방식이 아니다. 향상 그냥 열 받으니까 마음 가는 대로 했던 게 나다. 아, 물론 상상을 하고 난 뒤부터 그랬던 거지만. 찌질했던 나날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튼.
"닥쳐. 그딴 거 모르겠고 난 한 단계 진화해야겠으니 널 때려 눕히고 널 재기로 만들겠다. 나와 똑같은 힘을 뛰어 넘으면 난 한 단계 진화할 수 있어."
"해보시지."
난 분신령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검을 들고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 작가의말
허리 부상이 있어서 연재가 계속 연기되어 죄송합니다.
아직 부상에서 완전히 회복 되지 않았지만 최대한 연재하지 못한 내용 부지런히 연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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