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어린 영혼아, 가엾게도 너의 모든 것을 잃었구나."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없는 저승의 주인이 되어 앞으로도 잘 보살피거라."
여인은 이름 없는 저승의 주인이 되어 신이 내린 상인지, 벌인지 모를 시간을 다시 살게 되었다.
망령이 될 뻔한 여인의 시간이 멈춘 채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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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안에서 슬픈 소리가 들려온다.
“아직 못 해준 게 많은데···”
“그만 보내주자. 그래야 편하게 가지. 응?”
어느 날 찾아온 아이들은 가족이 되고, 친구가 된 인간보다 턱없이 짧은 생을 끝냈다. 사랑받고, 조건 없는 사랑을 주며 자신의 가족에게, 친구에게 추억을 만들었다. 내가 주는 것이 초라해 보일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보여준다. 받은 사랑에 대해 보답을 하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해주지 않지. 이건 죽기 전의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뭉치야, 이제 가자꾸나.”
이 아이들이 다리를 건너가야 할 때 달빛을 머금은 듯한 허리까지 오는 은빛 머리칼과 별을 박은 듯한 눈동자를 가진 존재가 옷자락을 흩날리며 마중을 온다. 아랑구의 수호신인 ‘도월(導月)’. 동물 담당인 아랑구의 천사와는 다른 존재이다. 동물들이 다리를 건너 도착하는 곳을 하나부터 열까지 관리하며, 그곳을 지키는 존재이다.
방금까지 지옥 망자와 실랑이를 하다가 왔기에 피곤했지만 신입의 부탁으로 안 올 수가 없었다.
-제 친구가 울고 있어요.
“다리를 건너면 아프지 않고, 혼자 있지도 더 이상 울지 않아도 된단다.”
-그치만 친구만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친구와 꿈에서 만나면 대화를 할 수 있단다.”
-정말요?
“뭉치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도 할 수 있어.”
마음을 정한 듯 도월의 품으로 들어왔다. 그 품이 햇살처럼 따스하고, 가을바람처럼 시원한 향이 나서 안기면 안정감을 느끼며 스르륵 잠에 든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처음은 다들 어려워하거든요.”
원래 동물들을 인도하는 건 아랑구에서 동물 담당 천사로 배정된 선관(善寬)들의 일이. 종종 신입 선관들이 어려움을 겪고 그녀를 찾는 일이 간혹 있다. 그럼 지금처럼 내려와서 방법을 알려주며 시범을 보여준다.
“이 아이는 강아지별로 가는 건가요?”
“별이 따로 나눠져 있지 않아요. 아랑구(娥朗俱) 그 자체가 동물들이 오는 곳이거든요. 그 안에서 아이들 취향에 따라서 지내는 곳이 나뉠 뿐이에요.”
‘예쁠 아’, ‘밝을 랑’, 그리고 ‘함께 구’. 수호신이 되고 동물들이 있는 곳을 봤을 때 도월이 처음 느낀 것이다.
망자들처럼 이승에 홀로 남겨진 주인을, 친구를 걱정하거나 그리워할 줄 알았다. 하지만 도월의 예상과는 달랐다. 이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며 지나간 시간을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게 마음이 예뻤고, 그 모습들이 이곳을 밝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도월은 이름 없는 축령들의 저승에 ‘아랑구’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아랑구의 입구를 지나, 길을 따라가면 자유롭게 지내는 축령들을 볼 수 있다. 선명한 푸른빛을 보이는 자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아픔과 슬픔을 뒤로하고 동물들이 어울려 지내고 있다. 목줄에 묶여 있지도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누군가의 수단이 되지도 않는다. 생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마음껏 누리며 아픔도 치유하며 아랑구에서 새로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여기부터는 선관님한테 맡기고 가겠습니다.”
“..."
"묻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아니요. 항상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무슨 일 생기면 월관으로 와요~"
"넵!"
월관은 아랑구 입구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대부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지만 사건이 휘몰아칠 때도 있어 편하게만 있을 수는 없다. 그래도 이곳이 예쁘게만 보이는 이유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낙원이기 때문이지.
— — — — — —
거처로 돌아온 도월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보고서 분류하여 정리하고, 특별한 일이 있으면 본인도 보고서를 써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 이걸 몇 년째 하고 있는지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천국의 선관이었을 때부터 했으니 아주 오래되었지. 그곳에서 망자들의 길을 안내하며 환생의 길로 인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아랑구의 주인이 되었지.
"망자 님, 제가 길을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죄송합니다. 저승법에 의해 망자 님들에게 알려드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망자들이 길을 잘 못 들어 가야 할 저승이 아니라 아랑구로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에는 선관으로 있었던 시간이 좋은 경력을 만들어줘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여긴 지옥 아니에요? 제가 왜 지옥으로 가요? 난 나쁘게 살지 않았단 말이야!"
이래서 죽은 영혼들에게 저승에 대해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천국과 아랑구는 괜찮지만, 지옥의 경우 이렇게 발악을 하여 모두를 피곤하게 만든다.
"도월 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수고하세요."
'역시 지옥 망자는 힘들어.'
망자의 괴성이 입구 초입까지 들려왔다. 이번엔 크게 지나가지 않았지만, 경우에 따라 멱살까지 잡히는 경우가 있다. 잠깐이었지만 이렇게 피곤한데, 매일 저런 망자들을 보는 비사들은 얼마나 더할까.
— — — — — —
똑똑똑
“네-”
자신을 찾는 익숙한 목소리 문을 여니 선관 둘이 같이 있었다. 하나는 자주 보던 얼굴인데, 다른 하나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안녕~ 잘 지냈어요?”
“네. 그런데 소윤 님이 웬일로 먼저 찾아오셨을까요?”
“이번에 새로 온 선관인데 아랑구로 배정받아서 데려왔어요.”
높게 묶었음에도 허리까지 길게 내려오는 머리칼은 밤하늘을 담고 있었고, 눈동자는 따스한 햇살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과 다르게 어딘가 날카로운 시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선관이다. 진짜 신입 선관이었다.
“먼저 인사해야지?”
“.... 하현(夏炫)입니다.”
“저는 들은 게 없는데요?”
“같이 있던 선관한테 못 들으셨어요?”
그래, 신입이 모든 부분에서 완벽하면 그건 그냥 신입이 아니라 경력자라고 하지. 오늘 도월에게 도움을 청한 선관에게 소윤이 꼭 전하라고 했지만 실수 때문에 잊고 있었다. 전달을 받지 못한 도월은 통보 느낌으로 선관을 받게 됐다.
"재배정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로 배정 받은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정확한 얘기는 듣지 못했어요."
선관이 되면 관할 구역이 정해진다. 보통은 처음에 천국 내에서 자리가 정해지고, 바로 아랑구로 오는 일은 없다. 말이 통하는 망자를 상대하는 게 쉽지, 함께 추억을 만든 그들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축령들이 쉬울까.
"환상 같은 건 없죠?"
"없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처음에 환상을 갖고 아랑구로 왔다가 천국으로 돌아가는 선관이 절반 이상이다. 처음부터 환상을 갖지 않도록 현실을 알려주지만 이미 환상을 품은 자에게 그 말이 귀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지금 도월은 반가움보다는 걱정이 앞서고 있다.
“처음부터 여기로 와도 괜찮겠어요? 꽤 힘들 텐데.”
“동물이 더 다루기 쉽지 않겠습니까. 인간들처럼 귀찮게 굴지도 않을 테고.”
“그런 생각을 갖고 아랑구에 온 건 실수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표현이 직설적인 것인지, 말투 때문인지 기분 나쁘게 다가왔다. 하지만 하현에 대해 지금 단정짓기엔 아직 이르니 결론은 좀 더 나중에 내리기로 했다. 그래도 이건 확실했다. 하현을 보고 도월이 처음 느낀 것은 불쾌함이었다. 축령이 곧 가족이고, 친구인 그녀에겐 하현은 안 맞는 부분이 훨씬 많지 않을까 싶었다.
* * * *
안녕하세요. 아랑구의 주인이자 수호신으로 있는 도월이라고 합니다. 예전엔 천국의 선관으로 망자들을 봤지만, 현재는 아랑구의 주인으로 축령들을 보고 있습니다. 아랑구에 있는 선관이 축령을 데리고 다리를 건너오는데 문제가 생기면 제가 직접 가기도 해요. 주로 신입 선관들의 부탁을 받고 있어요.
항상 평화로우면 좋겠지만 두 저승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사건 사고도 많아요. 축령이 멋대로 아랑구를 벗어나 지옥으로 들어가면 제가 바쁘게 움직여야 합니다. 축령의 일이 아니면 망자들이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천국 망자는 돌려보내기 쉬워서 괜찮아요. 하지만 지옥 망자는 의도적으로 들어올 때가 많지요.
"망자 님, 여기서 이러면,"
"네가 뭔데 나한테 명령이야!"
"아..."
"그.. 그러게 왜 앞에서 알짱거려!"
그럴 때에는 실랑이를 하다가 제가 피를 봐야 얌전해져서 돌아가더라고요. 그래서 흉터가 많답니다.
저녁에는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어요. 아랑구의 선관들에게 받은 보고서를 정리하고, 지옥과 교환할 보고서를 씁니다. 그리고 가끔 지옥과 천국에서 망자가 실수로 넘어오면 추가로 더 적어서 옥황과 염라에게 보내기도 합니다. 꽤 할 일이 많죠. 혼자서 작성하고 있어서 하루라도 빠지면 일이 밀려서 조금 곤란한 상황이 생겨 제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매일 하고 있습니다.
'신입이 처음부터 진짜 괜찮으려나.'
이곳에 신입 선관이 오는 일은 드문데, 소윤 님이 처음 보는 선관이랑 같이 왔더라고요. 그분도 천국에서 있다가 왔구나 했는데 본인 의지로 처음부터 오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살짝 기대와 걱정을 했는데, 선관 님의 첫 마디 덕분에 없던 미운털까지 박힐 뻔했던 거 있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저희 둘 다 걱정이 됩니다.
* * * *
신입 선관 하현입니다. 동물들이 다리를 건너면 도착하는 곳인 아랑구로 배정받았습니다. 생전에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망자들을 상대하기 싫었습니다. 망자여도 인간이었으니 겉과 속이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아랑구로 온 겁니다. 그런데 도월 님은 오랜만에 만난 것인데 왜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는 걸까요. 혹시 저를 잊은 건 아니겠죠?
'기억 못하는 거 맞네.'
제 말 때문에 동물을 싫어하는 걸로 생각한 것이면 그건 오해입니다. 저도 동물을 좋아합니다. 동물들이랑 친하게 지냈어요. 그래서 다루기 쉽다고 한 건데. 뭐가 문제였던 걸까요. 무슨 말실수를 했던 걸까요?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 * * *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현 님은 저 따라오세요."
"예, 알겠습니다."
도월은 아랑구의 지리를 알려주면서 어디에서 지낼지 정하라고 했다. 당장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보기에는 넓고 광활하여 며칠 나눠서 봐야한다. 일단 봄 분위기로 만들어 놓은 곳과 여름 분위기로 만들어 놓은 곳을 보여줬다. 이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곳이 있겠지 했는데, 그의 표정은 심드렁해 보였다.
"둘 중에 마음에 드는 곳 없어요?"
"예, 없습니다."
신입이 지내도 무리 없는 곳을 알려줬지만 '여기도 별로다', '저기도 별로다' 이러며 다 싫다고만 했다. 도월은 속으로 짜증이 올라왔고,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지만 마음에 '참을 인'을 새기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원하는 곳이 어디에요?"
"입구요."
따분해 보이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저건 진심이다. 다른 곳을 추천해도 듣지 않던 눈과 귀가 반응하며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다른 곳을 추천해도 관심 없죠?"
"잘 아시네요."
-'앞으로 기대되는구나.'
평온한 일상 속, 새로운 인물로 인해 평소보다 보다 들뜬 도월의 친구인 선관들. 감추고 싶은 과거를 오래 숨기지 못할 것을 알기라도 한 듯, 이무기는 입꼬리를 올리며 앞으로를 그려봤다.
도월은 어떤 과거를 숨기고 있고, 입구에 누가 배정 받는 것을 왜 꺼리는 것일까?
-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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