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발짝 (4)

“진아.”
“왜?”
“달이가 좀 피해 다니는 것 같지 않아?”
“후배님이 일부러 피해 다닐 성격은 아닌데. 그냥 시간이 안 맞는 거 아니야?”
“그런가..”
“그게 아니면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지.”
“그렇겠지.”
요 근래에 청령은 도월의 얼굴을 10분 이상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엔 그저 시간이 맞지 않고, 도월이 혼자 맡아서 하는 것이 많아 피곤해서 일찍 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일부러 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이렇게 마주치지 않은 적이 없었거든.
“하···”
–왜 한숨이냐.
지금 도월은 일과가 끝나 필요한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것들을 들고 이무기 둥지로 왔다. 그리고 땅이 꺼져러 한숨을 쉬고 있지.
“그냥.. 선배 보는 게 어색해서.”
–싸우기라도 했나?
“그건 아니고.. 너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나는 그대처럼 만날 이가 없다.
도월은 누구에게 털어놓지 못할 것을 이무기에게 털어놨다.
–그대의 선배가 그대를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인다. 그 말이지?
“응.”
–그대의 마음은 어떤가?
“내 마음?”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그대가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제일 중요한 건 그대의 마음이다.
“나는···”
–머리 아프게 지금 생각하지 말고, 몸 좀 움직인 다음에 생각해라.
이무기는 인간의 형상으로 도월과 마주했다.
–"오늘부터 알려주기로 했지?"
“그랬지. 검부터 잡아봐.”
도월은 자신의 두 검 중 하나를 건네줬다.
–"묵직하군. 그대는 이 검의 이름을 아는가?"
“그냥 다 같은 검 아닌가.”
–"달 문양이 있는 것은 ‘월검’이고, 별 문양이 있는 것은 ‘성검’이라고 한다. 그대가 펼쳤던 검술의 이름이 월성검이었던 이유도 검에서 따왔기 때문이지."
월성검. 검에 각각 달 문양과 별 문양이 있어서도 이유가 되지만, 첫 번째가 되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월성검은 달처럼 빛을 내고, 지나간 자리에 별가루를 내린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이름은 알았으니, 한 번 자세 잡아봐.”
–"이렇게 잡으면 되나? 저번에 그대가 이렇게 한 것 같았는데."
“그거는 내가 검에 익숙하니 가능한 거고, 너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이 자세부터.”
도월은 이무기에게 기초 자세를 잡아주며 하나하나 설명을 했다.
“그 상태로 나보다 오래 버텨봐.”
옆에서 같은 자세를 잡으며 같이 버티기에 들어갔다.
“어허- 자세 흐트러진다.”
–"이 마귀 같은..."
‘팔 떨어진다’, ‘다리가 펴졌다. 다시 굽혀라’, ‘자세 흐트러진다’라며 도월은 이무기의 자세를 지적했다.
다른 검들보다 묵직하다 보니 팔은 금방 힘이 빠졌다. 덩달아 다리도 힘이 빠져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그에 비해 도월은 수도 없이 했던 것이라 흐트러짐 없이 멀쩡했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어?"
“방금 이렇게 생각했지?
–"내가 그럴 리가 있겠나.. 그저 힘들어서.. 표정이 안 좋았을 뿐이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자신이 말하니, 도월이 마치 독심술에도 재주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속내를 보인 것이 억울하여 이를 악물고 더 버티려고 했다. 그러나 힘이 빠질 대로 빠져 주저앉고 말았다.
“나보다 오래 버티지도 못하다니. 진짜 이무기 맞아?”
–"칭찬 좀 해주면.. 어디 덧나나.."
“누구 덕분에 그 고생을 했는데, 이 정도 구박은 감당하지.”
이무기는 반박을 못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그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고 싶은데. 생전에 칭호 같은 건 없었나?"
“검존이라고 불렸었지.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나를 이긴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어.”
무공을 모르는 아이가 검존의 자리에 올랐다니. 이무기는 죽을 각오로 싸울 것이 아니면 도월에게 덤비지 않기로 했다.
“이제 다 쉬었으면 일어나.”
–"벌써? 내가 주저앉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오래 쉬면 늘어지는 법. 그러니 어서 일어나라.”
그렇게 이무기는 혹사를 당했다.
.
.
.
.
.
–"차라리 날 죽여라.."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첫날부터 지독하게 굴려진 이무기는 바닥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혹사 시켰으면 보상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뭘 원하는데.”
–"그대의 생전 이야기. 짧게 요약해서."
“...”
–’조금 꺼리려나.’
생전 칭호를 물었던 것은 생전에 대해 기억하는지 떠보기 위함이었다. 도월에 대해 좀 더 알기 위함도 있고, 단순한 궁금증도 같이 있었다.
입을 닫은 도월에 괜한 것을 얘기했나 싶었다. 하지만 도월은 긴 이야기를 짧게 하기 위해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태어나 보니 따뜻하지만 차디찬 곳이었지. 그곳에서 가족이 있어도 없는 것처럼 지냈어. 다 자란 후에 떠돌이로 지낼 때 수많은 위험을 직면했고, 내 것을 지켜야 해서 치열하게 싸웠어.”
처음에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을 꺼렸던 도월은 이제 아무렇지 않게 얘기했다.
“아프기 싫고, 싸우기 싫었지.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가는 동정 어린 시선도 지겨웠고. 그저 따뜻한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하게 지내고 싶었지. 그런데 비 오는 날, 급류에 휩쓸려 죽었어.”
짧지만 평탄하지 않은 것이 다 담겨있었다.
–"검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군."
“그렇기도 했는데, 검은 재능이었던 게 컸지.”
–"그래, 그래."
“그럼 잘 쉬고, 수련도 빼먹지 말고 틈틈이 하고.”
— — — — — —
도월은 바로 돌아가지 않고 나무에 기대어 숲을 배경으로, 폭포를 경치로 삼으며 보고서를 적었다. 하지만 손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한 탓이겠지.
‘하.. 여기서 내가 선배가 좋다고 하면 현진 님은 불편할 것 같은데..’
도월도 자기 마음은 이미 자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것은 끝을 생각하고 있어서였다. 모든 것에서 끝을 봤던 도월은 늘 마지막을 생각하는 습관으로 인연을 만들지 않았었다. 여기서 친구를 사귀고 인연을 만든 것은 딱 그 정도까지만 회복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어려운 거구나..’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백년가약을 맺는 것이 어려웠다. 한 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부분이었다. 과연 예상이나 했을까. 생전에 하지도 않은 사랑을 이곳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
‘계속 피해 다닐 수도 없고.’
한동안 청령을 일부러 피해 다녔다. 둘만 있으면 본인이 괜히 어색하여, 일이 없어도 있는 것처럼 움직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고 했지만, 어느 날은 노골적이기도 하여 이미 들킨 것 같았지.
“역시 여기에 있었구나.”
“서, 선배.”
청령이 나무에 삐딱하게 기대어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그게.. 저···”
“왜 여기서 보고서를 쓰고 있어?”
“그냥.. 색다른 곳에서 써보고 싶어서?”
도월은 당황했다. 그가 여기까지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늘 그가 먼저 가자고 하기 전에 같이 온 적이 없었으니까.
“저는 갑자기 안 한 게 생각나서.. 그럼 먼저,”
“나 언제까지 피할 거야?”
“네?”
“내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
“없어요..”
“그럼 왜 지금도 내 얼굴 안 봐?”
“안 보긴 누가 안 본다고,”
도월이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팔을 확 잡아당겨 거리를 좁혔다. 도월이 안기는 꼴이 되었지.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피해?”
청령은 울먹이며 말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던 그가 이러니 도월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지금 이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줄도 몰랐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건, 어설픈 손길로 등을 도닥여주는 것뿐.
“혹시 현진이랑 내가 불편해졌어?”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그게...”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생전에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 때문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어? 달아, 그 말은-”
“움직이지 말아요.”
도월은 청령의 허리를 감싸며 제 얼굴을 못 보게 했다.
“왜에~ 예쁜 얼굴 좀 보자.”
“안 된다니까!”
그동안 일부러 피한 것이 살짝 괘씸하여 힘을 이용해 품에서 도월을 떼어냈다.
“아이구, 손끝까지 빨개질 정도로 부끄러웠어?”
“이..이..”
도월은 얼굴은 물론 목부터 손끝까지 붉어져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그만 놀릴 게.”
“선배는 가끔 애 같아요.”
“그런가?”
“네.”
“그런데 나 다시 선배로 돌아간 거야? 나는 달님이 계속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는데~”
간신히 진정됐던 도월의 얼굴이 다시 발갛게 물들었다.
“청령 님!”
소리를 빼액 지르곤 짐을 챙겨 먼저 갔다.
“같이 가~!”
청령은 웃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도월은 얼굴이 발갛게 되어 들어오고, 그 뒤에 청령은 웃으며 들어왔다. 현진은 둘 사이에 일이 잘 풀린 것 같아서 같이 웃었지.
한동안 어색했던 공기가 다시 풀어졌다.
— — — — — —
시간이 흐르고 이무기와 도월은 계속 일정하게 만남을 가졌다. 가르침을 주고받으며 서로 성장하고 있었다.
–"혈이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네. 이상은 없나?"
“처음이랑 다르게 아주 멀쩡해.”
–"지금은 반만 개방을 했고, 앞으로 조금씩 계속 열어갈 거다. 익숙한 범위를 벗어나면 다시 처음처럼 힘들 수 있어.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고."
그 이상이라는 몸서리를 치고 싶었다.
–"그런데 말이다."
“왜?”
–"그대 말고 다른 이와도 대련을 해보고 싶은데."
다른 이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도월이 직접 몸쓰는 법을 알려줬던 것인데, 이무기의 예상치 못한 발언에 생각했던 것에서 조금 틀어졌다.
–"그대는 검존을 넘어 이제는 검선이 될 것 아닌가."
“너무 과대평가를 하네.”
–"아무튼. 나와 비슷한 실력을 가진 자와 대련을 해야 성장을 했는지 알 수 있지 않겠나."
이무기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제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자에게 배워도, 비교 대상이 없으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을 하는 것은 어렵다.
“내가 한 번 입 무거운 선관으로 찾아볼게.”
머리에 이미 몇 명이 떠올랐지만 진짜 그들 중 한 명에게 부탁을 해도 될지 고민이 됐다.
‘선배랑 현진 님은..’
둘 다 아니다. 둘 중 한 명과 특정한 날마다 사라지면 이상하게 여겨져, 들키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가 된다.
‘방울 님이나 소윤 님?’
이 둘도 역시 아니다. 방울은 약방의 주인으로서 바쁘고, 소윤도 저녁은 그의 약방에서 같이 있으니 그 둘도 불가능했다.
‘이제 남은 건 해선이 아니면 문강인데.’
“선이한테 부탁할까..”
“누구한테 뭘 부탁해?”
정원에 물을 주며 생각을 하다가 무의식에 말이 튀어나왔다. 창문 쪽에 있던 청령과 현진이 도월이 혼잣말을 듣게 됐다.
“그냥 개인적으로 부탁할 게 있어서요.”
“우리한테 하는 건 안 되고?”
“선배들보다는 친구가 더 적합해서요.”
“우리 후배님이 벌써 사춘기인가 봐..”
“그니까. 예전엔 뭐든 잘 부탁했었는데.”
둘은 눈물이 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처음에 이러면 당황을 했던 도월도 이젠 익숙해져서 웃으며 능청스럽게 대답을 해줬다.
“한참 친구 좋아할 나이잖아요.”
그러곤 도월은 계속 물을 주며 해선과 문강 둘 중 한 명을 고민을 했다. 둘 중 누가 더 편하느냐고 물으면 해선이 더 편하다. 그렇다고 바쁜 일과를 보낸 해선의 소중한 휴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문강은 어떠하느냐. 불편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선처럼 격없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와.’
도월은 청령과 현진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둘은 같은 대답을 내놓다.
- 작가의말
오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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