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에서 확신으로 (2)

드디어 그날이 왔다. 해선이 이무기와 만나게 되는 날이.
“달이 오늘도 나가는 거야?”
“아, 네. 해선이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어디서 뭐 하는지 말해주고 갈 수 있을까?”
“축령들 저승에서 좀 쉬다 올 건데, 뭐 할지는 비밀이에요.”
“뭐야, 후배님.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여인들은 비밀이 많은 법이죠.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이곳에 미리 와서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선과 만나 이동했다. 다 큰 것처럼 행동하던 아이가 친구와 함께 있으니 제 모습을 찾은 것 같아 보였다. 그 모습에 편하게 생각하는 이가 있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 저 둘이 엄청난 비밀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괜찮겠지.”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난 게 아니니까. 괜한 걱정은 나중으로 미루자.”
— — — — — —
“여기부터는 내 손 잡고 가야 돼.”
해선은 도월이 내민 손을 잡았고, 옆에서 나란히 걸어갔다.
“도, 도월이... 진짜 이 길이 맞아?”
발걸음을 멈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물었다. 해선의 눈에는 이 길이 독사가 가득하고, 저 앞에 어두운 곳에는 정체 모를 생명체들의 눈빛이 보였다. 도월 외에 다른 기운을 느낀 이무기가 본능적으로 환각을 보게 만들었다.
“무서우면 눈 감고 걸어도 돼. 도착하면 알려줄게.”
해선은 도월의 팔을 붙잡고, 옆에 꼬옥 붙어서 걸었다. 귓가로 들려오는 위협적인 소리에 움찔거리는 것에 따라 도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월은 안심하라는 듯 손등을 쓸어주며 걸어갔다.
도월의 눈에는 정상적으로 보이는 길. 하지만 타인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길.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당황스럽기만 했지만, 지금은 익숙한 일이 됐다.
“다 왔어. 이제 눈 떠도 돼.”
해선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둥지의 모습이 아닌, 거대한 모습의 이무기이다. 도월이 미리 얘기를 해줘서 어느 정도 머릿속으로 그리며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드디어 오늘부터인가.
“어···어···”
“너는 우리 애 놀라게 환각을 걸어?”
–그건 나도 모르게.. 잠결에 그만.. 그대가 두려웠다면 사과하지. 미안하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해선은 도월의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 모습으로 있을 거야?”
–아. 잠시 깜빡했다.
도월의 말에 이무기는 인간의 형상으로 변했다.
–"이러면 무섭지 않은가?"
“예..”
호기롭게 부탁을 승낙했었지만 처음부터 겪었던 것으로 인해 긴장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쪽은 해선. 약방 선관이야. 여기는 이무기. 앞으로 이 모습으로 자주 볼 거야. 우리랑 적대적으로 싸울 일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도월의 말에도 아직 완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제일 기초훈련부터 해볼까? 둘이 어색한 것도 풀 겸 해서 말이야.”
해선에겐 자신의 검을, 이무기에게는 다른 검을 줬다.
“으악!”
도월의 검을 받아든 해선은 무거워서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내리꽂혔다는 표현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나는 왜 다른 검인가?"
“강호라는 야생에서 계속 내 무기만 쓸 수 없는 법이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것도 쓸 줄 알아야 해.”
–"여기는 강호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무기를 들고 싸우는 건 다를 것이 없지. 만약에라도 내 무기를 못 쓰게 된다면 그 자리에서 손에 맞지 않는 걸 써야 될 수도 있어.”
–"역시 그 세계는 복잡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강호와 저승은 다를 것이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나온 말이었다.
“그래도 여기는 저승이잖아.”
“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세계든 난장이 되는 건 다르지 않아. 많은 존재가 죽고, 희생이 쌓이고 쌓여서 잔혹한 흔적만 남게 되는 건.. 다 똑같아.”
순간 쓸쓸해진 눈을 본 해선은 도월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같은 위치에서 시선을 마주하며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있는 친구가 지금은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 그럼!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자세 잡는다.”
그렇게 자세를 알려주며 훈련이 다시 시작됐다.
— — — — — —
“살려줘···.”
–"처음보다 강도가 너무 올라가지 않았나.."
처음보다 강도가 올라간 것에 이무기는 이번에도 땅과 한 몸이 되었고, 해선은 대자로 뻗었다.
“처음 하는 건데.. 너무한 거 아니야?”
“이무기한테 했던 것처럼 하면 지금 안 끝났어.”
도월의 말에 해선은 놀랐다. 거기에 앞으로 더한 것을 하게 될 자신의 미래가 그려졌지.
“다 쉬었으면 다시 일어나.”
“벌써?”
–"아이고..."
지금 해선의 반응이 이무기가 처음에 보였던 반응과 똑같았다.
“이다음부터는 네가 해선이한테 알려줘. 나는 잠시 다녀올 곳이 있으니까.”
“어디 가는데?”
“입구에 확인할 게 생겨서.”
그렇게 둘만 남겨놓고 도월은 아래로 내려갔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가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내 감이 틀렸으면 좋겠는데.’
갑자기 치고 들어온 불길한 예감이 틀렸길 바라며 갔다.
— — — — — —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싸우고 있던 두 사내는 호통을 치는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여기가 어디라고 쌈박질이야!”
“도, 도월아! 아.. 이건 오해야, 오해!”
“잠깐 우리 얘기부터 들어보고,”
“당장 돌아가.”
“어?”
“달님-”
“두 번 말 안 해. 당장 여기서 나가!”
이렇게까지 화를 내며 언성을 높인 적이 없던 아이인데. 둘은 도월의 낯선 모습에 언제 성이 났었냐는 듯 얌전해진 채로 돌아갔다.
— — — — — —
잠시 쉬는 것과 훈련을 계속 이어가던 이무기와 해선은 돌아오지 않는 도월에 이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잘 안 보이네···’
–"뭐 하는가?"
“아.. 도월이가 너무 늦는 것 같아서요.”
–"그럼 내려가 보는 건 어떤가."
“네?”
–"나도 같이 갈 것이니 걱정 말아라. 올 때처럼 이상한 것도 없을 거야."
“예.”
–"그럼 가지."
당장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이무기의 뒤를 따라 내려갔다. 다행히 올 때와 같이 공포를 조성하는 광경은 없었고, 도월이 봤던 것과 같은 정상적인 길이 보였다.
“달아!”
해선의 눈에 길 위에 쓰러져 있는 도월이 보였다. 그동안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놀란 해선은 도월에게 달려가 상태부터 확인했다.
“정신 차려봐. 도월아!”
“흔들지 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기억하는가?"
“무슨 일? 뭔 일 있었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모습에 해선은 의아했다.
“네가 입구에 확인할 게 있다고 하고 갔잖아.”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는 기억이 잘 안 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가?"
“여기서 누굴 본 것 같은데..”
앞서 누군가를 만나고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하지만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 이무기는 뭔가 아는듯한 표정을 지었다.
해선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이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일단 진정은 했다.
“그래.. 일어설 수 있겠어?”
“응. 몸은 멀쩡해.”
“도월이 왜 중간 일을 기억 못 하는 건지 아세요?”
–"나도 확인해 봐야 안다. 그럼 잠시 실례."
이무기는 혈을 확인하며 역시라고 생각했다.
–’그렇군..’
“혹시 다른데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건 아니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방향이라 잠시 과거의 기록들을 살펴봐야겠어. 둘 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게."
“예..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길지만 짧은 시간으로 이무기와 해선의 첫 번째 훈련이 끝이 났다.
— — — — — —
도월은 해선을 약방으로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해선은 괜히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지만 도월은 이러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다녀왔습니다-”
“후배님, 오늘은 빨리 왔네.”
“어쩌다 보니까요. 그런데 청령 님은 어디 있어요?”
“아까 강이 만나러 간 것 같은데. 금방 들어올 것 같아.”
— — — — — —
도월에게 호통을 듣고 돌아온 청령과 문강. 이 둘은 오는 동안에도 벙쪄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 둘의 말문이 다시 열린 것은 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였다.
“청령 님..”
“어..”
“아까.. 평소랑 많이 달랐죠?”
“응.. 좀 많이..”
평소와 너무 다른 모습. 앞전에 보인 도월의 모습은 너무 달랐다. 동일 인물이지만 다른 인물 같았고, 감히 손을 뻗을 수 없는 곳에 스며든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랬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런데 너는 왜 거기에 있던 거야?”
“해선이가 달이랑 거기로 간다고 해서요. 그저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를 만들었을 뿐입니다.”
“참 끈질겨. 포기도 모르고 말이야.”
“청령님도 달님 마음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모르는 거 아닙니까.”
“우리 후배님은 항상 귀엽게 도발을 하려고 해.”
“그 도발에 당하시는 분이 누군데.”
“네가 먼저 기어오르지만 않으면.. 아니다.”
여기서 아까처럼 다시 싸움으로 번지기 전에 청령이 말을 삼켰다. 다른 선관들이 말도 안 되는 걸로 신경을 긁어도 차분하게 넘어가는데, 문강에게는 그게 잘되지 않았다. 이상하게 어린아이들처럼 감정이 동요된다.
“안 가냐?”
“갈 겁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걸리는 게..”
“응?”
문강은 잠시 뜸을 들였다.
“달이 뒤에 다른 형상도 보이지 않았어요?”
“너도?”
둘은 호통을 치는 도월의 뒤로 똬리를 틀고 위협적인 얼굴을 한 이무기의 형상이 환각처럼 나타났다 사라졌다.
“오늘 있었던 일은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마.”
“그럴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곱게 알았다고 할 줄을 몰라.”
“그럼 먼저 갑니다-”
멀어져 가는 문강을 보고 청령도 돌아갔다.
“달이 와있었네. 언제 왔어?”
“너보다 훨씬 먼저 왔어.”
“그렇구나. 그.. 나는 먼저 들어가 볼게.”
“아직 저녁도 안 먹었을 거 아니에요. 먹고 들어가요.”
“그게.. 아니다. 같이 준비하자.”
청령은 아무것도 모르는듯한 도월의 얼굴에 의아했다.
식사 중에도, 후에도 의문이 풀리지 않던 청령은 조용히 도월을 찾아갔다.
“잠깐 들어가도 될까?”
“네-”
도월은 머리를 짚으며 문을 열어줬다.
“혹시 아까 있었던 일 기억해?”
“무슨 일 있었어요?”
‘역시 기억을 못 하는구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야.. 아무 일.. 도···”
“달아. 달아!”
‘몸이 뜨거워.’
말을 하다가 청령의 품으로 쓰러진 도월. 열이 오른 게 확실히 느껴졌다.
“무슨 일이야?”
“달이 열이 너무 높아!”
“어서 약방으로 가!”
둘은 장포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채, 도월을 등에 업고 약방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 — — — — —
“열이 꽤 높네요. 날이 밝아야 열이 좀 떨어질 것 같아요.”
“더 빨리 떨어뜨릴 순 없을까요?”
“여기서 더 빠르게는 어려워요. 몸살이 난지 이미 며칠이 된 것 같아요. 그 상태로 무리하게 움직인 것 같고.”
방울이 들여다본 도월의 상태는 생각보다 기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왜 이 상태가 되었는지는 정신을 차리리면 알아보기로 했다.
“벌써 보내는 거예요?”
“옆에서 저희가 보면 방울 님도 편할 것 같은데-”
“아-니-요. 제가 직접 보는 게 더 편합니다.”
방울은 역시 가지 않으려고 하는 둘의 등을 떠밀며 돌려보냈다.
한편, 축령들 저승에서 이무기는 옛날 자료들을 보면서, 지금의 상황을 구슬로 보고 있었다.
–또 당분간 못 보겠네. 그보다 열이 난다라. 혈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는 건가.
청령과 현진, 문강과 해선은 도월의 상태를 보고 의심과 확신 사이에서 점점 확신으로 기울어가는 듯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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