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2)
청령은 현진이 소개해 준 곳으로 온 이후로 훨씬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현진은 그가 혼자 있고 싶을 땐 조용히 혼자 있을 수 있으며, 여럿이 어울리고 싶을 땐 쉽게 나올 수 있는 곳을 소개해 줬다.
“청령 님, 당분간 숲 관리한다면서요?”
“문강 후배님 귀에도 벌써 들어간 걸 보면 벌써 소문이 다 났나 봐.”
청령이 있는 곳은 망자들의 쉼터로 만들어진 숲의 입구였다.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망자들을 돌보고, 그 공간을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여기는 원래 없던 곳 아니에요?”
“그랬었지. 최근에 생겼어.”
망자들을 위한 휴식 공간은 안건이 올라와 최근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현진은 이걸 어떻게 알았는지 다른 선관이 선정되기 전에 먼저 얘기를 꺼내라고도 했다. 현진의 정보력 덕분에 편한 곳에 있을 수 있게 됐다.
“너도 그놈들 사이에 있는 거 마음에 안 들면 여기로 와.”
“저랑 같이 지내고 싶으세요?”
“3년 뒤에 와.”
“아쉽네~ 이번에 현진이 형처럼 남자 대 남자로, 선배 대 후배로 친해져 보고 싶었는데.”
진심이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그 사이에 싸우면서 정이 들었는지 청령과도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려는 이유가 뭔데?”
“가증스러워서요.”
“그 부분은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문강의 말이 어떤 말인지 너무 이해가 됐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선관이라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한 선관들이 있지. 앞뒤가 다르고, 분란을 만드는 것을 즐기는 모습. 현진은 그것에 질려 최근에 옮길까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럼 저도 여기에 와도 되겠습니까?”
“몰라. 마음대로 해. 난 3년 뒤에 입구로 돌아갈 거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저랑 여기서 지내는 거 괜찮겠어요?”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
틱틱 얘기했지만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아 문강은 씨익 웃으며 가까운 날에 만남을 기약했다.
— — — — — —
다른 날, 잠시 입구로 갔었다. 옷 한 벌을 놓고 와서 일과를 끝내고 자리를 비웠다. 해가 지면 휴식 공간은 문을 닫는다. 입구에 있을 때와 생활 방식은 많이 달라지지 않아 따로 적응 기간은 필요하지 않았다.
“현진이 있나?”
“청령~”
현진은 그를 반가운 얼굴로 반겼다. 잠깐 안 본 것이지만, 늘 같이 지내다가 떨어지니 빈자리는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입구를 벗어나 다른 곳에 잠시 정착할 그가 걱정되기도 하여 만나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청령이 온 것은 몹시 반가웠다.
“뭐 놓고 갔어?”
“옷을 놓고 가서. 근데 달이는 어디 갔어?”
“아까 약방에 갔는데, 좀 얘기하고 올 건가 봐.”
“그렇구나...”
지금 마주치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잠깐 앉아 있다가 가지. 벌써 가려고?”
“정리할 게 많아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청령은 돌아갔다.
아직까지는 혼자 가는 이 길이 어색했다. 그 어색함을 안고 가고 있는데, 앞에서 두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앞을 보니 문강과 둘이 오는 도월이 있었다.
‘좋아 보이네.’
자신이 없어도 저렇게 웃는 것을 보니 마음이 불편했다. 너무 빤히 쳐다본 것인지 도월과 눈이 마주쳤다. 청령은 흠칫 놀라서 시선을 돌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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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령과 마주친 후, 돌아온 도월의 표정은 계속이 기운이 빠져 있었다.
“왜 표정이 계속 안 좋아?”
“약방에 다녀오면서 선배님을 봤는데, 모른 척하고 지나가더라고요.”
도월은 계속 잠깐 스쳐간 청령의 표정이 계속 신경 쓰였다. 같은 곳에 있을 때에는 짧게 본 표정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는데, 지금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청령은 자기를 돌보고 잠시 쉬러 간 거기도 하니까, 후배님도 아무 생각하지 말고 지내.”
“그게 최선이겠죠.”
“일단 지금은.”
현진의 말대로 최대한 청령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더 쉬지 않고, 더 바삐 움직였다.
“도월 님-”
“일찍 오셨네요?”
“네. 그런데 안색이 별로 좋지 않네요.”
“괜찮아요. 자, 어서 가죠.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방울도 드디어 이무기를 만날 시간과 가까워졌다.
— — — — — —
‘이번엔 환술을 부리지 않아서 다행이네.’
“이무기를 만날 때에는 변용을 풀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오랜만에 보는 진짜 모습이다. 이 모습을 보는 건 같은 약방 선관들에게도 귀했다. 소윤의 앞에서는 변용을 풀고 있다가 다른 이가 오면 재빠르게 본모습을 감추지.
“안 나오고 뭐해-!”
도월이 큰 소리로 부르고 나서야 이무기는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저 자가 그대가 말한 선관인가?
“응. 이름은 방울. 약방 주인이셔. 방울 님, 얘가 이무기예요.”
–반갑다. 그대가 이 보석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인가?
“일단 봐야 알 것 같습니다.”
–이 모습이 정확한가, 아니면 인간의 모습이 정확한가?”
“그 모습으로 계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다.
이무기는 편하게 보라고 머리를 숙여줬다. 방울은 여기저기 짚어보며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도월을 노려봤다. 도월은 찔리는 게 있는지 시선을 피했다.
“혼자만 크게 다친 게 아니었네요.”
“서로 열심히 싸웠죠. 하하...”
“웃을 일이 아니에요!”
“잘못했습니다...”
“이거는 월성초나 월성목을 써도 500년은 걸릴 거예요. 길어지면 700년이고요.”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린다는 것에 도월도, 이무기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얼마나 다친 거예요?”
–몸 곳곳에 생채기가 생겼고, 한 쪽 눈도 실명 위기까지 갔었지.
“이무기는 회복이 빠른가 보네요. 잠시 인간의 형상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요?”
–아무나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만.
“죄송합니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의원으로서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네요.”
–특별히 보여주마. 그대가 마음에 들었다.
방울이 마음에 들었는지 흔쾌히 보여줬다. 이렇게 이무기의 다른 모습을 본 건 세 명으로 늘어났다.
“우와... 이무기는 외모가 준수하군요.”
후광이 비치는 듯한 수려한 외모. 같은 사내가 봐도 반한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이무기에 방울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보다 보면 질릴 테니까 감탄은 이쯤에서 해두세요.”
–"어딜 봐서 질린다는 거야? 이렇게 수려한 외모를 어디 가서 볼 수 있다고."
“아이고, 그러셔? 그 잘난 얼굴 너나 보세요.”
–"어디 해보자는 거냐?"
“오냐. 이번에 담판을 내주마!”
“둘 다 그만!”
팔을 걷어붙이는 둘에 방울이 호통을 쳤다. 둘은 스르륵 떨어졌고, 옷매무새를 다시 만졌다.
“싸울 생각이면 제가 없을 때 싸워주세요. 약재가 없는 곳에서 환자를 둘이나 보고 싶진 않거든요.”
웃으면서 말하는 것이 꼭 협박을 하는 것 같았다. 방울은 둘이 조용해지니 이무기의 몸 이곳저곳을 들여다봤다.
“이무기는 조금만 가르쳐도 무공이 쭉쭉 올라가는군요.”
–"도월 덕분이지."
그렇게 한동안 방울과 이무기는 사이좋게 말을 주고받았다. 도월은 어느 순간 옆에 누워 하늘을 바라봤다.
불어오는 바람은 잔잔했고, 저들의 대화를 백색소음 삼아 있으니 졸음이 몰려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깨어 있는 동안 몸과 정신을 쉬게 해주지 않았고, 잠도 최소한으로 잤으니 등만 붙여도 졸음이 몰려오는 건 당연했다.
–"잠들었군."
“역시 피로가 쌓여있었나 보네요.”
–"수면 부족이 만악의 근원이거늘."
“어르신 같은 말을 하네요.”
–"보기와 다르게 나이가 많아서."
“다음에 도월 님이랑 한 번 더 와도 될까요?”
–"얼마든지. 도월 없이 와도 좋다. 아까 말했듯 그대가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야."
자유로운 출입을 허락받은 방울은 다음을 기약하며 도월을 업고 돌아갔다.
— — — — — —
현진은 도월을 방에 눕히고 나와 방울이 돌아가기 전, 잠시 대화를 했다.
“요 며칠 무리하는 것 같더라니. 감사해요, 방울 님.”
“아니에요. 도월 님 일어나면 오히려 제가 더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 더.”
방울은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저 1년 뒤에 소윤 님이랑 혼례를 치르기로 했어요.”
오랫동안 정인 사이로 있던 방울과 소윤이 드디어 백년가약을 맺을 날을 정했다.
“정말 축하해요. 드디어 둘이 같이 살게 되겠네요.”
“감사해요. 도월 님한테는 소윤 님이 얘기한다고 했으니까 비밀로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혼롓날 저희는 가까운 자리에서 보게 해줄 거죠?”
“당연하죠. 그럼 저는 좀 쑥스러워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소윤이 도월을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어서 오세요~”
소윤은 이번에 직접 만든 간식을 가져왔다.
“저 1년 뒤에 방울 님이랑 혼롓날 잡았어요. 혹시 이미 들으셨으려나?”
“네. 소윤 님이 직접 말하신다고 해서 우리 후배님은 아직 몰라요.”
“그렇구나~ 지금 도월 님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벚나무 아래에 있을 거예요. 길 안내해 드릴게요.”
그곳에 처음 가는 소윤을 위해 현진은 벚나무가 보이는 곳까지 안내를 해주고 자리를 비켜줬다.
소윤은 동물과 새에게 둘려싸여 나무 위에 앉아있었다.
‘월하미인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네. 너무 예뻐.’
“도월 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밑을 보니 소윤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소윤은 가볍게 나무 위로 올라가 도월의 옆에 앉았다.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현진 님이 저 밑에까지 안내해 주셨어요.”
“그렇구나~”
소윤은 다른 이들에게 얘기할 때에는 잘 얘기하다가 도월에게 얘기하려니 뭔가 쑥스러운지 손과 발을 꼼지락거렸다. 곧 뺨이 붉게 물들었다.
“저...”
“네.”
“그게 말이죠-”
“편하게 말씀하세요.”
“1년 뒤에 방울 님이랑 혼례 치르기로 했어요.”
“그거 잘 됐네요~ 진심으로 축하해요.”
둘의 혼례 소식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기뻐했다.
“누가 먼저 혼인하자고 얘기했어요?”
“동시에 했어요. 그때 우리 방울 표정이 어땠는지 알아요?”
“어땠는데요?”
방울은 볼이 발그레하며 그날의 일을 얘기했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 옥반지를 준비하여 이제 같이 살자고 했다. 매우 간결했다. 서로에게 부담이 갈 정도로 거창하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을 원하지 않는 서로의 성향을 고려해 다른 이들이 모두 잠들고, 고요해진 시간에 같은 얘기를 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 몰랐어요.”
“같은 곳을 바라보고, 마음이 맞는 건 좋네요.”
“도월 님도 청령 님이랑 그렇지 않아요?”
“....글쎄요. 워낙 안 맞는 부분이 많아서요.”
조금 늦은 도월의 대답에 소윤은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아, 처음부터 얘기하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비녀 잘 어울려요.”
“고마워요.”
“선물 받은 거예요?”
“네.”
“선물한 분이 고민한 게 느껴져요.”
“그런 게 느껴져요?”
“그럼요. 말 한마디도 어떻게 하면 기분이 상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것만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받은 선물을 보면 내가 없는 곳에서도 나를 생각하고, 어울리는 걸 찾기 위해 고민을 한 게 느껴지는걸요.”
천진난만하게 느껴졌던 소윤이 어른으로 느껴졌다. 역시 살아온 세월은 무시를 못 하는구나 했지.
“게다가 내가 없는 곳에서 나를 생각해 주길 바라는 것도 담겨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생각하라고 비녀를 주고 갔구만.’
그리고 청령이 많은 것들 중에 왜 비녀를 골랐는지 그 의도를 파악했다. 자신이 없어도 자신을 생각하고, 잊지 말라고.
기억하고 기다려달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것을.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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