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 (1)

3일이 지나고, 잔치는 끝이 났다. 이 3일 동안 누구도 도월에게 청령 얘기를, 청령에게 도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문강이 눈치를 주며 불편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했지. 그리고 문강은 해선과 얘기를 했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지금?”
“어. 지금.”
평소랑 다르게 진지한 그의 얼굴을 보고 해선은 군말 없이 뒤따라 갔다.
“너는 알고 있었어?”
“뭐를? 난 뭘 말하는지 모르겠네.”
“도월이 축령들 저승 주인이 된 거.”
해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렇게 물어보는 건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 것임을 알아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다 듣고 왔어. 자기 입으로 먼저 말했고. 청령이 형이랑 싸운 것 같더라고.”
“그럴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는데?”
“그냥 감으로 그랬던 건데, 방울 님이 그랬거든. 청령 님은 다 좋은데 한 번 꽂힌 건 고집이 세다고. 그래서 도월이랑 부딪힐 줄 알았지.”
청령은 좋은 점이 먼저 보이는 선관이다. 오랫동안 본 선관들이 입을 모아 칭찬을 하지. 하지만 그에게도 가릴 수 없는 단점이 있었으니. 꽂힌 것은 물고 늘어지고, 자신이 포기하기 전까지 고집을 꺾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주 보는 모습은 아니라 잊고 지냈는데, 이번에 도월과 청령의 상황을 보고 다시 떠올랐지.
“다들 여기 있었구나.”
“달님 왔네~”
문강과 해선이 약방 뒤편에서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도월이 찾아왔다. 문강과 해선이 시선이 도월에게 모였다.
“내가 여기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짧으면 3년, 길면 5년 남았다.”
“뭐?!”
“어?”
원래 이보다 좀 더 빨리 말하려고 했다. 그런데 소윤과 방울이 혼롓날을 정했다는 말을 듣고, 좋은 날 전에 신경 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미루고 있었다.
문강과 해선은 길게 남지 않은 시간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언젠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말을 들을 걸 예상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 몰랐다.
“청령 님한테는 얘기했어?”
도월은 고개를 저었다.
“왜인지 얘기해 줄 수 있어?”
“싸웠어. 선배는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아.”
“옥황님한테는 언제 말씀드리게?”
“현진 님한테도 말하면. 내 사람들은 다 알아야지.”
“소윤 님한테는 말했어?”
“방울 님한테 부탁했어. 요즘에 도통 만날 시간이 나지 않아서.”
축제가 끝나기 전, 다들 각자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사이 도월이 방울에게 살짝 부탁을 했다. 부탁을 받은 방울은 소윤과 둘이 있을 때에 도월의 얘기를 전했고, 소윤도 이 둘과 같은 반응이었다. 그래도 옥황의 상황을 보고 들었기에 쉽게 받아들였다.
“그럼 나는 이제 간다.”
“어디를?”
“집에. 현진 님한테도 얘기해야지.”
도월은 오늘 말이 나왔고, 또 고민을 하며 더 미루기 전에 현진에게도 말하기로 했다.
— — — — — —
똑똑-
“들어와~”
현진은 안경을 쓰고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금방 다 쓰니까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줘.”
“네-”
목구멍까지 말이 올라왔지만 일단 기다렸다. 그렇게 10분을 기다렸을까. 현진이 안경을 벗고, 의자를 돌리며 도월과 마주했다.
“후배님이 뭐 때문에 먼저 찾아왔을까~”
아직 기간이 얼마 안 남을 것을 모르는 저 얼굴을 보니 다시 한번 망설여졌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제가 앞으로 여기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짧으면 3년, 길면 5년 남았데요.”
“벌써 얼마 안 남았구나.”
그들과 다르게 침착하고,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한 반응에 오히려 도월이 당황했다.
“왜.. 안 놀라요?”
“놀라긴 했는데, 듣는 우리보다 더 놀라고 아쉬운 건 후배님일 테니까.”
왜 이 생각을 안 했을까. 담담하게 받아들였지만 제일 놀랐고, 아쉬워했던 마음을 왜 이제야 자각했을까.
“달이가 받아들였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고, 놀라지 않은 게 아닐 테니까. 나는 차분하게 받아들여야지.”
해선과 문강에게 얘기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데 현진의 말 한마디가 감정선을 건드렸는지 한 번 올라온 눈물은 들어갈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나왔다.
‘여기서.. 계속 지내고 싶었는데···’
문강은 도월의 등을 어루만져 줬다.
처음은 억울했다. 왜 하필 본인인지. 이제야 마음을 붙이고, 낙원을 찾은 본인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는지.
억울함 다음은 분노였다. 이무기를 향해 울분을 쏟아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이무기를 붙잡고 늘어졌다.
분노 다음은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남은 시간 동안 잘 지내보기로 했다.
“그동안 혼자서 속앓이 하느라 고생 많았어. 오늘 다 털어내.”
받아들였지만 미련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먼저 정을 붙인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미련이 남게 만들었을 뿐, 그렇다고 축령들 저승이 싫은 것은 아니다.
혼자 담아둔 것을 토해낼 시간이 필요했던 도월은 현진의 위로 속에서 다 털어놨다.
— — — — — —
도월이 집으로 돌아가고, 문강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선과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간 곳은 집이 아닌 청령이 있는 곳이었다.
“형, 뭐해요?”
“보면 모르냐. 보고서 쓰잖아.”
문강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맞은편에 앉았다. 청령도 그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바삐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뻘쭘한 표정으로 문강을 쳐다봤다.
“할 말 있으면 하고 가라.”
“원하신다면 얼마든지요.”
청령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문강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짧으면 3년, 길면 5년 남은 거 알아요?”
“뭐가. 알아듣게 얘기해.”
“달이가 앞으로 여기서 지낼 수 있는 시간이요.”
“나는 들은 게 없는데 무슨 소리야. 거짓말하지 마.”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믿고 싶지 않았다. 청령이 외면하는 시간 동안 도월의 선관으로서 시간은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은 거겠죠.”
“그럼 너는 달이가 그 자리에 앉게 만들고 싶어? 어떤 파장이 생길지 알면서도?”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잖아요.”
“나중에 생긴 신은 휘둘리기 마련이야. 기존에 있던 수장들 사이에서 제대로 설 수 있을 것 같아?”
“달이는 형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애라는 거 몰라요?”
“...”
“왜 다들 아는 걸 본인은 모를까.”
청령이 하는 걱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문강은 계속 상황을 외면하는 그가 지금은 밉기만 했다.
“그렇게 걱정되고 믿고 싶지 않으면 계속 외면해요. 달이가 손해인가? 형이 손해지.”
그렇게 문강은 돌아가고, 혼자 남은 청령은 어느 때보다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약방으로 갔다.
— — — — — —
“방울 님-”
약방에 와서 방울을 찾는 청령. 그 목소리에 안에 있던 그가 나왔다.
“달이가 앞으로 길어야 5년밖에 못 있는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네.”
“문강이랑 방울 님 말고 아는 애들 더 있어요?”
“아마 이제 다들 알고 있을 거예요.”
청령은 눈을 감고 고개를 떨궜다.
“청령 님, 이제 그만 현실을 봐요.”
“그 애가 이제야 마음 붙이고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곳을 찾았는데, 제가 어떻게 그래요.”
“청령 님의 그 고집이 도월 님을 더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셨어요?”
모진 환경에도 스스로 목숨을 버리지 않고 살아준 도월이 마음 편히 지낼 수 있는 곳에서 다시 시련을 겪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고집을 부리는 이유라면 이유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도월을 생각한다는 겉치레를 이용한 청령 본인을 위한 고집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당분간 시간을 갖고 받아들이세요. 이 말 외에 해드릴 말이 없어요.”
청령에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잠시 돌보러 다른 곳으로 온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건 아닐지 싶었다.
— — — — — —
길고 긴 밤이 지나, 도월은 옥황에게 만남을 요청하고 찾아갔다.
“긴히 할 말이 있어 온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앉거라.”
옥황과 도월이 마주했다. 지금은 닿기 어려운 상하 관계이지만, 몇 년 뒤에 동등한 위치에 있을 관계. 조금 어색했다.
“옥황님은 이게 뭔지 아시죠?”
도월은 장갑을 벗고 양손을 내밀었다. 이 아이의 손등에 있는 낙인을 본 옥황은 놀란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있는 곳에서 다른 저승의 수장이 될 선관이 나온 것을 믿기 어렵고, 이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던 것에 놀랐다.
“언제부터 이런 것이냐?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중요하지 않지. 어찌하여 양손에 낙인이 있는 것인지 아는가?”
“그건 저도 모릅니다.”
“그곳의 이무기가 알려주지 않더냐?”
“애초에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지?”
“짧으면 3년 뒤, 조금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5년 뒤에 저는 이곳을 떠나야 하니까요.”
이미 이무기에게 물어봤다. 처음 오른손에 생긴 낙인이 수장의 낙인이고, 나중에 생긴 낙인은 이무기도 이론으로만 알았지 실제로는 처음보는 낙인이었다. 당연히 옥황도 처음보는 낙인이었지.
“시간이 촉박해지기 전에 얘기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상황을 받아들이고, 수긍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 정도면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바로 옮겨도 되는 수준이야. 없던 분란이 생기기 전에 옮기거라.”
얼마 남았는지가 무의미할 정도로 낙인이 선명해진 지금. 옥황은 한 저승에서 다른 수장과 함께 있는 것이 불편했다.
“왜요. 제가 당신 약점이라고 잡고 있을 것 같아 그러십니까?”
“...”
“걱정 마십시오. 천국의 수장이 하나뿐인 지금, 제가 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미련 남기지 말고 보내줄 때 얌전히 떠나거라.”
“재촉하는 걸 보니, 저는 이미 같은 위치에 있나 봅니다?”
여유로운 얼굴로 있는 저 표정이 매우 거만해 보였다.
도월은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는 저 얼굴을 보고 자신과 옥황, 염라는 같은 위치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무기가 일부러 시간을 여유로이 말해준 것을 알았다.
“그럼 나는 그 명령을 안 듣지.”
“다른 저승에 발을 들인 수장은 해당 저승 주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그건 법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을 텐데.”
“예의이다. 네놈에게는 없는 예의란 말이다.”
“그대가 걱정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테니 재촉하지 마시게. 때가 되면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알아서 갈 터이니.”
— — — — — —
‘저게 다 무슨 얘기야? 다른 저승 수장이라니?’
받아온 보고서들을 올리기 위해 문 앞에 서있던 보좌관은 얼떨결에 옥황과 도월의 얘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이곳의 선관으로 있는 동안, 옥황의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선관인 저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합니다. 이곳을 떠나기 전까지는 선관이니까요.”
“...그럼 너도 떠나기 전까지 얌전하게 있거라.”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문으로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보좌관은 우왕좌왕하다가 몸을 숨기지 못하고 도월과 딱 마주쳤다.
“다 들었어요?”
“아.. 그게···”
도월의 눈을 마주치지 압도당하는 것 같은 느낌에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네.. 처음부터 다.. 들었습니다.”
“그럼 앞으로 5년은 비밀로 해주셔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도월은 보좌관의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갔고, 보좌관은 다리의 힘이 풀릴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간 도월은 남은 시간이 무의미한 것을 알고 차근차근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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