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 실수, 후회 (3)

외부를 정리했으니 내부를 정리하러 들어가려 했다.
“도월..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청령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더더욱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다.
“옥황이 뭐라도 하라고 선관님을 보냈나요?”
욱신거렸다. 그 호칭 하나가 뭐라고.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청령은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오히려 진실이 뭔지 알았구나 싶었지.
“선관님 고집은 남을 위한 게 아닙니다. 처음부터 본인을 위한 거였지, 후배를 생각한 고집이 아니었습니다.”
“...”
“거기에 감정에 먹혔다지만 비사가 되라고 하는건 선을 넘었죠.”
“고집부려서 미안해.. 너를 괴롭혀서 미안해..”
“지금 그 사과도 남이 아닌 본인을 위해서입니다.”
틀린 말이 없었다. 도월을 위한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본인을 위한 부질없는 고집일 뿐이었다.
“시간 낭비하게 만들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
돌아가라는 말에도 청령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월이 이제 됐다고 하기 전까지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 그대로 계십시오. 거기서 그 같잖은 마음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도월은 문을 닫았다. 누구에게나 열렸고, 쉽게 열 수 있던 문은 굳게 닫혔다.
— — — — — —
“청령 님..”
잠시 외출을 하고 돌아온 소윤도 청령이 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것을 봤다. 그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서요.. 저는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시고 들어가 보세요.”
소윤은 불편한 불편한 마음을 안고 들어갔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무릎을 꿇고 있던 청령은 맨몸으로 비를 맞고 열병이 나고 말았다. 소윤은 쓰러진 그를 등에 업고 급하게 약방으로 달렸다.
이 소식은 며칠이 지난 후에 문강을 통해 도월의 귀에 들어갔다.
“미련한 놈...”
청령이 쓰러졌을 때 놀랐다. 혹여나 잘못된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됐었지. 그러다 들려온 소식이 안심 반, 미련함 반이 섞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차라리 한 번 시원하게 울어버려.”
문강은 늘 혼자 앓고, 다른 이에게 티 내지 않는 도월이 답답했다. 그러면서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이게 된 도월이 안쓰러웠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었으면, 난 매일 울고만 있었을 거야.”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청령과 도월.
상처가 생기고, 아물기도 전에 곪아버린 상처를 흉터로 남아 악몽이 되었다.
— — — — — —
이날 이후, 도월은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현진이 죽고, 그가 자신을 원망하는 꿈. 현진이라면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느끼는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겉은 괜찮은 척을 해도, 속으로는 자신을 많이 원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악몽은 1년이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지속됐다. 그러다 보니 도월은 자연스레 잠자는 시간을 줄였다.
“도월 님?”
“아, 네. 무슨 말 하셨어요?”
전과 다른 모습에 상황을 모르는 영원의 눈에도 확실하게 보였다.
“혹시 잠을 안 자는 겁니까?”
“꿈자리가 사나워서요. 그래도 최소한은 자니까 괜찮습니다.”
그것이 문제가 아님을 알지만 이 이상의 간섭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잃어버렸던 일상을 되찾고 있었다.
— — — — — —
아랑구로 넘어가기 한 달 전, 모든 준비를 마쳤다. 청령에 받은 비녀는 놓고 갈까 했지만, 그건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소매 안에 챙겨 넣었다.
“벌써 마지막이네.”
“그러게.”
“시간 빠르다. 소윤 님이랑 방울 님은 언제 온대?”
“해선이랑 같이 온대.”
옥황에게 언제 떠난다는 것을 알리고 돌아가던 길에 문강을 만나 같이 입구로 가고 있었다. 그렇게 탑이 있는 곳을 지나 중앙을 벗어날 즈음, 도월은 아무 이상이 없었던 방어막이 찢어진 것을 느꼈다.
“방어막이 찢어졌어.”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또 비사들이 쳐들어온 거야?”
“한 명이야. 이쪽으로 오고 있어.”
자신을 노리는 듯한 움직임에 도월은 탑에서 최대한 멀어지려 했다.
“도월!”
쾅!
그러나 도월의 위치가 발각되는 것이 먼저였다. 중앙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 아니라 곧바로 피해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탑에는 피해가 가지 않았다는 거였지.
“뭐 하는 짓이야!”
“넌 빠져!”
문강이 바로 검을 뽑았지만 뒤로 날아가며 무용지물이 되었다. 도월은 문강이 저리 당하는 것을 보고 다른 비사들도 태영을 막는 데에 소용이 없음이 눈에 보였다.
“우리는 아직 할 얘기가 남아 있지 않나?”
“문강! 따라오지 말고 자리 지켜!”
“거기 서!”
도월은 지금 시간이면 선관도, 망자도 없을 쉼터로 그를 유도했다. 청령이 중앙에 있는 것을 봤으니 빠르게 이동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최대한 침착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태영이 이번에는 뭔가 여유로워 보였다. 무슨 수를 숨겨 놓은 듯한 얼굴이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지만 이 싸움은 빨리 끝내야 했다. 조금만 시간이 길어지면 3일 동안 밤을 새버린 도월에게 불리해진다.
한편, 지옥에서는 아직 이 상황을 모르고 있었다.
— — — — — —
진운과 영원은 밖을 나가지 못했다는 것뿐이지, 크게 달라진 일상이 없어 적응할 것도 없었다. 영원은 염라의 부름을 받았고, 진운은 집무실에서 문서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스르륵 눈을 감게 되었다.
“선배? 진운 선배!”
염라가 시킨 일을 마치고 돌아온 영원은 엎어져서 자는 진운을 흔들어 깨웠다.
“어, 어?”
그러자 진운은 놀라며 일어났다.
“잠 못 잤어요?”
“아니. 갑자기 그냥 눈이 감겨서.”
영원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집으로 가는 문을 열어보니 수면향이 들어있는 병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설마..”
진운은 태영에게 붙인 감시구를 봤다.
“아, 안 돼! 선배, 당장 움직여요!”
태영이 천국으로 간 것을 보고 영원과 진운은 또 한 번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전의 상황을 돌려보니 영원이 나가자마자 태영이 움직였다. 진운이 수상함을 느끼지 않도록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의심을 받지 않도록, 눈치를 채지 않도록 말이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수면향에 노출된 진운은 스르륵 잠이 들었고, 태영이 그 틈을 타서 나간 것이다.
‘방심을 하면 안 됐는데!’
여러 번 당했으면서도 능력이 봉인되어 있으니 잠시 방심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안 됐는데. 염라가 근신이 풀리는 순간, 모든 비사들 모르게 능력을 풀어줬을 때 눈치채고 있어야 했다.
— — — — — —
저들이 눈치채고 오는 동안 도월의 상황은 매우 안 좋았다. 태영은 주술이 거린 사슬로 도월의 몸에 흑기를 주입하고 있었고, 손발이 묶인 도월은 당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아아악!”
“달아!”
“이제 나처럼 비사가 되는 거야, 달님~”
다른 선관들에게 상황을 전해 듣고, 도월의 흔적을 따라 급히 쉼터로 온 청령은 점점 잠식되어 가고 있는 도월이 보였다. 태영은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지. 어떻게··· 아!’
청령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부디 자책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사슬에 묶인 도월을 안았다.
“뭐 하는 짓이야! 당장 떨어지지 못해!
태영이 청령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사슬은 빠르게 청령에게로 넘어갔다. 그러면서 도월의 몸에 들어가던 흑기도 모두 넘어갔다.
“이 새끼가!”
자신의 일을 그르친 청령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진운과 태영이 늦지 않게 도착했다. 둘은 태영의 팔과 다리를 묶으며 더 날뛰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청령은 다량의 흑기를 견디지 못하고 점점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선배!”
“달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월은 청령의 곁으로 갔다. 사슬을 풀 수도, 흑기를 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주술이 잘못되었는지 몸 끝부터 점점 바스라지고 있었다.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해.. 나만 생각해서 미안해...”
“왜 마지막인 것처럼 그래요..”
“나처럼 한곳에 고이지 말고... 끝 없이 흘러가는 맑은 물이 돼야 해..”
“그러지 마...”
“우리 달이.. 우리 망나니... 여기에 묶이지 말고.. 새로운 곳에서....”
“선배. 선배!”
“....”
“아.. 아... 안 돼에에에!”
흐려져 가는 의식 속,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시간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청령은 손쓸 새도 없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처음 낙원을 만들 수 있게 길을 잡아준 이들을 모두 잃은 도월은 이성적인 사고가 멈췄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태영을 죽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도월 님! 안 됩니다!”
영원이 이성을 잃고 분노에 사로잡힌 도월을 발견했지만 한발 늦어버렸다. 도월이 비도를 태영의 목에 박는 것이 더 빨랐다.
뒤늦게 보고를 받고 도착한 옥황과 염라도 이 상황을 두 눈으로 보게 됐다. 둘 다 도월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 벙쪄있었다.
그렇게 태영의 습격은 일단락됐다.
— — — — — —
태영이 도월을 습격한 사건은 삽시간에 알려졌다. 그리고 이틀 뒤에 재판이 열렸다. 선관도, 비사도 없는 곳에서 염라가 옥황과 말도 없이 갑작스레 열었다. 이 사실을 늦게 접한 옥황은 판결이 정해지고 나서야 부랴부랴 도착을 했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이런, 이런. 판결이 난 뒤에 오시면 어떡하나.”
“이게 무슨 경우 없는 짓인가?”
“내가 무엇을 믿고 그대한테 말을 하지? 선관 간수도 못하여 내 팔을 잃게 만들고, 우리 비사는 사경을 헤메이고 있는데.”
도월은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모든 것을 잃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였다. 반박을 할 의지도 없어 보였다. 이대로 두면 도월은 꼼짝없이 최악의 경우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뭐, 감형 사유를 만들고 싶으면 하루의 시간을 주지.”
하루이지만 최악의 경우를 피할 사유를 만들 수 있겠다 싶어 안심을 했다. 그런데.
“아니지. 생각해 보니, 나와 우리 비사가 제일 큰 피해를 받았는데, 우리가 정하는 게 맞는 것 같네.”
염라는 비열하게 웃으며 말을 바로 바꿨다.
“먼저 습격을 하고 피해를 준 것은 그쪽 비사가 아닌가.”
“결과를 놓고 봐야지. 게다가 그쪽 선관 한 명이 죽었으니, 옥황 그대도 가볍게 넘어갈 생각이 없지 않은가? 도월 선관도 부정을 하지 않고 있으니, 시간을 줄 필요는 없지 싶은데.”
“그런 억지가 어디 있나!”
“할 줄 아는 게 없어 소리만 지르는 꼴이라니. 그럼 판결이 났으니 도월 선관은 내가 알아서 처리하겠다.”
옥황이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염라가 먼저 손을 썼다.
도월의 발밑으로 진법이 생기더니 몸을 띄우고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당겼다.
옥황은 염라의 멱살을 잡았지만, 그의 행동이 가소롭다는 비웃고 있었다.
“나는 법대로 했으니 이만 돌아가겠네.”
“염라!”
“고작 선관 하나 없어진 것으로 이 난리라니. 말세야, 말세.”
염라의 단독 판결은 하루 만에 모든 선관들에게 알려졌다. 남은 이들은 충격에 할 말을 잃었고, 문강과 해선은 옥황을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방울과 소윤이 그 둘을 막았다. 한낱 선관에 불과한 본인들이 할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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