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 (3)

“오늘 옥황님 보고 바로 가는 거예요?”
“네.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요.”
아쉬웠다. 2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그리워했던 이를 만났는데, 헤어짐이 어찌 안 아쉬울까. 하지만 이제는 본인들과 다른 위치에 있는 도월을 전처럼 잡아둘 수는 없다.
“종종 가도 괜찮을까요?”
“올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요.”
그렇게 도월은 소윤의 배웅을 받으며 흑립을 쓰고 길을 나섰다.
소윤은 도월이 나아가고자 하는 길에 가시밭이 없길 바랄 뿐이다.
— — — — — —
일과를 한참 보내고 있는 시간. 도월은 일부러 이 시간에 움직였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만들기 위해서였지. 그리고 의도대로 됐다.
“거기 잠깐 멈추십시오. 누구신데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옥황을 만나러 왔다.”
“그분은 함부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글쎄. 난 아무 때나 만나도 될 것 같은데.”
“아까부터 계속 불쾌하게 하네. 답답하게 말장난하지 말고,”
“잠깐만.”
“왜 그래?
희미하게 보이는 이목구비를 유심히 바라보던 선관. 도월은 놀리는 것은 여기까지 하고, 면사를 살짝 거둬 얼굴을 보여줬다.
“도, 도월!”
“ㄴ, 너!”
뒷걸음질 치며 귀신이라도 본듯한 얼굴을 했다.
“뻔뻔하게 이곳에 발을 들여? 이번엔 무슨 꿍꿍이야?!”
“세상 좋아졌네. 일개 선관이 신한테 입도 놀리고.”
“뭐라는 거야. 한 번 더 죽더니 정신도, 개념도 같이 없어졌냐?”
도월은 비소를 머금었다. 그러곤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선관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그대들이 해선, 문강, 소윤, 방울에게 질타를 했지.”
“뭐, 뭐라는 거야! 이거 놔!”
“그들의 비통함을 왜 그대들이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지? 감히 무슨 자격으로.”
“...”
“그대들이 무슨 권리로 그들의 감정을 짓누르는 것이지? 내 그 이유가 알고 싶은데.”
옥황과 망자들 앞에서는 위선으로 가득한 모습을 보이는 저들이 처음부터 꼴사나웠다.
“야.. 그냥 가자.”
“갈 거면 너나 가. 야,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몰아가면 안 되지.”
한 선관은 도월의 손을 보고 눈치 있게 물러나려 했지만, 한 명은 눈치가 그렇게 좋지 않았다.
“네가 신? 그럼 나도 신이다, 신!”
저리 말하는 것이 웃기기만 했다. 제 동료들은 이미 눈치를 채고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은 안 보이는지, 계속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으면 그렇게 믿고.”
“야!”
모두의 시선이 이곳으로 집중됐나. 오히려 잘 됐다. 저들이 얕보는 선관들의 뒷배가 누구인지 확시하게 알려줄 수 있으니.
“다시는 내 친우들을 건들지 말거라.”
“...”
“여러 번의 기회를 줄만큼 나의 성정은 그렇게 온화하지 않으니 명심하거라.”
한순간에 표정을 굳힌 도월. 그에 방금까지 큰 소리를 치던 선관을 비롯해 근처에 있는 모든 선관들이 겁을 먹었다.
도월은 다시 옥황을 향해 나아갔다. 자리에 남은 선관들은 시야에서 도월이 사라지니 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도월 님 맞지 않아?”
“잘못본 거 아니지?”
“도월 님이 맞아..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다들 도월이 살아있는 것에 대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선명한 낙인. 왼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지만 오른손은 가려진 것이 없어 선명하게 보였다.
“선관님, 잘 못 걸려도 한참 잘 못 걸린 것 같아요.”
“도월 님 표정 제대로 못 봤죠?”
“오늘 운이 좋았어요. 방금 돌아섰을 때 얼굴이 맹수가 따로 없었어요.”
면사 너머로 보였던 얼굴을 생각하니 소림이 돋는 듯 팔을 문지르는 선관, 몸서리는 선관, 반응이 다양했다.
“그 녀석이 진짜 신이 됐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끝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큰소리 치는 선관에 다들 고개를 저으며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 — — — — —
오려면 언제든지 올 수 있겠지만 전과는 다른 상황 탓에 다르게 느껴졌다. 잡생각을 그만하고 문을 들어가려고 할 때, 안에서 보좌관이 나왔다.
“반가운 건 알겠지만 길 좀 열어주겠나?”
“예? 예.”
놀란 보좌관을 뒤로하고 들어가니 더 놀란 표정을 짓는 옥황을 만날 수 있었다.
“잘 지냈나?”
“그대가 어찌···”
“어떻게 살았냐고 묻고 싶겠지.”
“연유가 어찌 되었든 무사히 돌아온 걸 보니 반갑구나.”
곧 반가운 얼굴로 바뀌며 다가오는 옥황과 거리를 벌렸다. 도월의 표정은 옥황과 달리 한껏 굳어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반가운 사이는 아니지.”
지난날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 듯한 그에게 선을 그었다.
“그대가 나는 반가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게 무슨 말인가..”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잠깐 사이에 기억력에 문제라도 생겼나.”
도월의 반응은 차갑다 못해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싸늘했다.
“그날, 반박을 할 수 있음에도 왜 말을 아꼈지?”
“그건···”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지 않는 곳. 이곳에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아랫것들을 지키지 못한다.”
옥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도월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들을 뿐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자기주장을 펼치지 않았는가?”
“...”
한마디 한마디가 날칼처럼 사납게 파고들었다. 도월은 여전히 대답이 없는 그를 보고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의 일을 교훈 삼아 억울한 일을 당하는 선관을 만들지 말거라.”
“미안하구나..”
잔뜩 기가 죽은 옥황에 더 뭐라고 하지 못했다.
“앞으로 곤란한 일이 있거든 아랑구로 오거라.”
“아랑구?”
“축령들 저승의 이름이다. 그대와 대등한 위치에 있게 됐음을 알리기 위해 온 것이다.”
“잘 되었구나.”
“내가 선관일 적 썼던 말투도 좀 바꿔 줬으면 하는데.”
“아. 신경 쓰도록 하지.”
볼일을 마친 도월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도월 님.”
“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월이 이제는 선관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보좌관은 밖까지 따라나왔다. 도월과의 대화를 마친 보좌관은 미소를 보이며 배웅을 했다.
— — — — — —
도월의 다음 행선지는 지옥이었다. 바로 가려 했으나 아랑구에 비사 둘이 들어온 것을 느껴 아랑구에 잠시 들렸다.
들어오니 확실하게 비사가 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몸에 무의식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태영이 먼저 떠올랐다.
‘아랑. 비사들 지금 어디 있어?’
–’춘역에 있다.’
춘역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심호흡을 했다. 이런다고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았다.
‘왜 둘이 같이 온 걸까.’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질수록 식은땀도 같이 나는 것 같았다.
“어?”
“누구십니까?”
“아.. 놀래라...”
진운과 영원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니 다리의 힘이 풀렸다.
“저희를 아십니까?”
“접니다, 저.”
흑립을 벗으니 저들은 눈이 커지며 입을 틀어막았다.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도월 님-!”
저들은 반가움에 악수를 했다. 연유가 어찌 되었든 일단 도월이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제가 없는 동안에도 자주 오셨습니까?”
“주인이 없어도 보살핌이 필요하니 종종 왔습니다.”
“선관님들이 불편할까 봐 최대한 마주치지 않을 시간에 왔습니다.”
“아랑구를 보살펴주셔서 감사했어요. 앞으로는 제가 있으니 번거로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이곳 수장이 접니다. 그리고 이 저승의 이름은 ‘아랑구’입니다.”
도월의 말을 바로 이해했는지 잘 됐다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그러니 앞으로 오기 전에 기별을 줬으면 합니다.”
“이유 없이 오지 않겠습니다.”
“입구 이상은 가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게 돌아온 것입니까?”
이들에게도 같은 설명을 해줬다. 절대신이 개입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절대신은 자신이 개입하는 순간 보이지 않는 질서까지 무너진다 하여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다고 하였다.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뀌겠구나.’
그런 절대신의 움직임은 도월로 인해 저승에 다시 바람이 불 것임을 알려줬다. 이미 그 바람은 이미 불고 있을지도.
“오늘은 충분히 있다 가세요.”
“어디 가시게요?”
“염라를 만나러 가야죠.”
그 말에 둘은 집에 있는 태영을 생각하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저.. 태영은 여전히 저희와 같은 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도월 님이 돌아올 줄 모르고 염라님의 부당한 명으로 움직인 것처럼 기억을 바꿨습니다. 그래서 도월 님을 보면 이전처럼 다시 곁에 붙을지 모릅니다.”
태영과 마주칠 자신에게 염려의 말을 하는 둘에게 괜찮다고 했다. 어차피 예상했던 것이고, 지옥은 천국처럼 입구로 갈 것이 아니었기에 괜찮았다.
“이동술로 움직일 것이라 괜찮습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편히 있다 가세요.”
그 길로 도월은 염라의 집무실로 갔다.
— — — — — —
예의상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보좌관님.”
“도월 님..”
“묻고 싶은 게 많지만 염라와 제가 하는 얘기를 듣고 짐작해 주세요. 오늘 같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예. 염라님은 안에 계십니다.”
보좌관은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승에서 보낸 세월이 얼마나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있었으니까. 도월을 다시 만난 이들 중 제일 덤덤했다.
도월은 옥황의 집무실에 들어갔던 것처럼 염라의 집무실도 갑자기 문을 열며 들어갔다.
“누구냐.”
“여기까지 오는데 덕분에 고생 좀 했어.”
“묻는 말에나 대답하거라.”
“잠깐 없었다고 내 목소리도 잊은 것인가? 나일세. 그대가 죽인 선관.”
염라의 눈이 심히 흔들렸다. 분명 죽었을 것이라 생각했던 선관이 제 눈앞에서 웃고 있는 곳이 믿기지 않았다.
“일개 선관이 타 저승의 수장이 되어 돌아온 것이 안 믿기겠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하네.”
“이게 어떻게... 어떻게 돌아온 거야!”
“그건 알 것 없고. 내가 축령들 저승인 ‘아랑구’의 주인이 된 걸 알려주려고 왔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여전히 목청은 커.”
도월은 염라에게 다가갔고, 그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 벽에 부딪혀 갈 곳이 없어지니 도월과의 거리는 좁혀졌다.
“이전처럼 억지 부려봐. 당신 그거 잘하잖아.”
“묻는 말에나 대답하거라.”
“앞으로 많은 것이 바뀌고, 많은 일이 생길 것이다.”
“한낱 선관이었던 네놈이 어떻게! 감히 무슨 수로!”
염라는 도월의 목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숨통을 조일 정도로는 잡지 않았다.
“그대도 나와 같은 방식으로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닌가? 뭐가 그리 궁금하여 역정을 내며 묻는 것이지?”
염라는 차마 어떻게 수장이 되었는지 말하지 못했다. 말을 못 하고, 약점이 잡힐 바에 아랑이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 없애기로 했다.
“내 이무기를 건드릴 생각이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사지가 잘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염라는 오른팔을 잡으며 표정을 구겼다. 온전한 신이 되기 전에 자신의 팔을 자른 도월에게 무의식적으로 공포감을 느꼈다.
“앞으로 칼을 겨누는 일이 없었으면 하네.”
그러고 도월은 집무실을 벗어났다. 뒤에서 올라오는 분을 누르지 못하고 책상을 뒤엎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지.
“도월 님, 알아야 하실 게 있습니다.”
지옥의 보조관도 천국의 보좌관과 같은 말을 했다. 도월은 지옥 보좌관에게도 같은 답을 해줬다.
— — — — — —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알아야 하실 게 있습니다.”
진지한 얼굴을 하고 도월의 발길을 붙잡은 보좌관들. 둘의 입에서 나오려는 말은 같았다.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아는 도월이 먼저 입을 열며 저들의 입을 막았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네?”
“기다리십시오.”
당장 무슨 수를 쓸 줄 알았는데 기다리라니. 두 보좌관은 낙심한 듯했다.
“언제가 되었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날이 올 겁니다.”
“하지만..”
“그런 날을 만들 겁니다.”
“...”
“그러니 조급해 하지도, 불안 떨지도 말고 기다리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두 보좌관은 도월을 믿기로 했다.
- 작가의말
다사다난 했던 한 해가 지나고, 새로운 해가 왔네요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올해 좋은 일들이 가득하길 바라겠습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