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착, 그리고 변화 (4)

그 뒤로 옥황과 염라는 도월이 보낼 나비만을 기다렸다. 얕은 의중은 보여주지만, 진짜 의중은 보여주지 않는 도월이기에 이런저런 생각이 다 들었다.
‘어?’
‘나비다.’
보낸다던 나비는 언제 보낸다는 것인지, 슬슬 짜증이 올라오려고 할 때 푸른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집무실로 들어왔다. 드디어 다음 날 회의를 한다는 것을 알리는 나비가 왔다.
— — — — — —
다음 날, 옥황과 염라는 날이 밝자마자 보좌관에게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말만 남기고 제4의 공간으로 갔다.
도월은 이들이 언제 올지 몰라 해가 뜨기 직전에 문서들을 갖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서류들 사이에 두루마리 세 개가 있었다.
“먼저 와 있었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이리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옥황과 염라는 동그란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는 이곳에 다른 것은 더 없는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왔다.
“이건 뭔가?”
염라가 두루마리 세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랑구의 법서와 그대들 저승의 법서다.”
“설마 오늘 회의 사안이 법 개정은 아니겠지?”
“그것이 맞네.”
“이런 건 미리 말해줘야 했다고 생각하네.”
“이 자리가 그런 자리라면 난 돌아가겠다.”
염라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도월은 문들을 잠갔다. 고개만 돌려 노려보니, 도월도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염라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언제까지 고리타분한 법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가?”
“고리타분하기는 뭐가 고리타분해. 얼마나 혁신적인데.”
“아랫것들은 오래된 관행이니 따르겠지만, 망자들은?”
“...”
“흐르는 시간 속, 이승은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많은 것이 바뀌고, 과거를 발판 삼아 미래로 나아가겠지.”
이승은 느리게, 혹은 빠르게 변해간다. 일상도, 생활방식도, 사소한 것까지 전부. 하지만 저승은 수장이 움직이지 않으면 변하지 않는다. 같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망자들에게 어떻게 다음 생을 만들어 줄 수 있겠는가.
“우리도 같이 바뀌어야 하지 않겠는가?”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는가?”
“과거에 머무르는 신이 망자의 다음 생을 정해주는 꼴이라니. 우리도 이제 좀 달라집시다.”
옥황과 염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랑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일단 우리 저승의 선관들은 혼인에 제약을 두지 않을 것이다.”
“제약을 두지 않겠다고?”
“그건 우리 용납할 수 없다.”
“그대들이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이 법서도 가져왔네.”
도월은 저승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법서를 소매에서 꺼냈다.
“그대들은 이걸 한 번이라도 제대로 본 적 있나?”
당연히 그런 적 없다. 굵직한 내용만 대충 훑어봤을 뿐, 작게 적힌 세세한 부분까지 읽어보려 하지 않았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읽고 오길 잘 했네.’
“여기 작게 적힌 내용을 보면 ‘타 저승의 법에 간섭하지 않는다.’라고 적혀있다.”
“이게 진짜 법서인 걸 어떻게 믿지?”
“믿지 못하겠으면 절대신한테 물어보든가.”
염라는 불만이라도 있는 듯 콧방귀를 뀌며 삐딱하게 앉았다. 그의 기분을 신경 쓰는 것은 옥황뿐이었고, 도월은 아무렇지 않게 회의를 이어갔다. 법을 개정하는 부분은 빠르게 끝났다.
옥황과 염라는 본인들이 얼마나 과거에 살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이 법을 따른 선관들이 신기하군.”
“지옥법도 우리랑 다르지 크게 다르지 않았구나.”
“그리고 이곳에 한 가지 더 넣고 싶은 것이 있어.”
옥황과 염라는 도월을 바라봤다.
“망자들의 운명에 절대 손을 대지 않는다. 단 하나의 예외 사항도 없다.”
둘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뭔가 찔리는 것이 있겠지.
“적으시게.”
도월은 가벼운 손놀림으로 법을 적어 내려갔다. 옥황과 염라, 둘 중 한 명도 저 말의 반기를 들 수 없었다.
“축령들이 지옥으로 오면 제 모습을 잃고 요귀가 될 것이다. 이 부분은 어떻게 할 것이지?”
“한동안은 사자들이 입구까지 축령을 데려다주고, 선관이 어느 정도 모이면 직접 명부를 들고 데리러 갈 것이다.”
선관이 있는 곳에 명부를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나 현재 아랑구에 있는 선관은 해선뿐이었다. 의원은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사자들이 한동안 축령을 직접 아랑구로 데려다주는 것으로 얘기를 마쳤다.
“걱정과 달리 알아서 잘 하는군.”
“저런 것도 신이라고 납작 엎드리는 사자들 꼴이 우습군.”
“자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왜 갑자기 초를 치고 그래.”
끝까지 인정을 하지 않으려는 염라의 태도다 우스웠다. 저번에 그렇게 확인시켜 줬는데도 부족한가 했지.
“그대의 눈에 나는 아직도 선관으로 보이나?”
“그 시선이 쉽게 변한다고 생각하느냐.”
“일개 선관이라 그대의 팔을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생각하는가?”
“내가 방심한 탓이다.”
객기를 부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무래도 인정하기 싫겠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의 싹을 잘라 뿌리부터 없애고 싶겠지.
도월은 헛웃음이 나왔다. 손바닥 뒤집듯 변하는 그의 심기와 태도에 가소로웠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열을 받았다.
“그렇다고 하지. 그런데..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뭐라?”
“뭘 믿고 객기를 부리는 건가? 믿을만한 뒷배라도 있는가?”
당연히 없다. 신들에게 뒷배는 없다. 그저 자신을 믿고 움직일 뿐. 절대신을 뒷배로 두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감히 뒷배로 둘 수 없었다.
“남은 사지를 온전히 지키고 싶으면 함부로 기어오르지 말거라.”
뒷배가 없으니 마찰이 일어날 것 같을 때에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상황을 피한다. 지금까지 옥황과의 관계가 이러했다. 그래서 도월도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 물러날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그럼 얘기는 마무리된 걸로 알고 이번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다. 필요할 때마다 이곳에서 만나지.”
도월은 먼저 돌아갔고, 옥황과 염라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
“자네는 어찌하여 도월의 편에 있는 것 같지?”
“무슨 소리인지.”
옥황과 거리를 접히며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저런 놈한테 설설 기면서 자리를 위협받을 생각이야?”
“...”
“처음부터 싹을 잘라야 전처럼 계속 지낼 수 있다고. 지금 꼴을 봐. 우리가 저 녀석 수하랑 다를 게 없잖아.”
옥황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대등한 위치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이 아래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도월. 어느 순간 기에 눌려 도월이 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내 방식대로 할 것이네. 염라 그대도 알아서 하게나.”
“우리 둘 다.”
염라에게 선을 그으며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염라는 옥황의 뒷통수에 대고 말을 했다.
“도월한테는 적일 텐데, 뭘 알아서 하겠다는 건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경계하고 밀어내기만 할 텐데.”
“그건 자네가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여전히 적인 것 똑같지 않은가. 그런데 자네는?”
“내가 뭐.”
“자네와는 꽤 호의적으로 지네지 않았는가. 그런데 한순간에 원망을 샀지.”
“...”
“나와 함께 도월을 챙겨주는 건 어떤가?”
“지금 와서 손을 잡자는 건가?”
손을 잡자는 말에 옥황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 찼다.
“물리적으로 뭘 하자는 게 아니야. 우리도 심리적으로 파고들자는 것이지.”
“심리적으로?”
“아직 서툰 게 많을 도월을 위해 도움을 주는 거야. 한낱 선관이 기어오르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지.”
무력으로 안 된다는 것을 알았으니 심리적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한 번 놀아줘 볼까.’
나가자마자 말소리가 들려 문 앞에 있으니 재미있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앞으로 저들이 어떻게 나올지 기대가 됐다.
— — — — — —
빠르게 간섭을 할 줄 알았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며칠째 아무짓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관이 늘어서 당황하는 중이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선관 문완입니다!”
그것도 신입 선관 위주로.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데, 이곳에 환상을 품고 있는 건 아니죠?”
“없습니다. 혹시 그런 선배님들이 있었나요?”
“네. 그것 때문에 천국으로 돌아간 선관들도 있어요.”
“그렇구나. 저는 걱정 마세요. 아무 환상도 없습니다!”
참 해맑은 아이다. 그저 진짜 환상이 없는 것인지, 있어도 없는 척하는 것인지, 당장은 알 수 없었다. 일단은 믿어보는 수밖에.
“여기는 계절별로 지역이 나뉘어 있군요. 제가 앞으로 지낼 곳은 하역입니까?”
“그곳은 여름이라 조금 더울 수 있는데 괜찮습니까?”
“저는 여름이 좋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먼저 지도를 보며 지리를 익혔다.
“짐은 하역에 가서 풀면 되겠네요.”
“가면은 해선이라는 선관이 있을 겁니다. 의원으로서 할 일을 배울 거예요.”
“선관님은요?”
“네?”
“도월 님도 선관이지 않나요?”
도월을 당황하게 했다. 자신을 선관으로 봐주는 이가 있다니. 도월은 웃으며 대답해 줬다.
“아, 저는 선관이 아닙니다.”
“네? 그럼···”
자연스레 낙인을 찾아 눈동자가 내려갔고, 이제야 도월의 정체를 알게 된 선관은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몰라뵙고..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그런 거에 별로 신경 안 써요.”
다시 보니 그저 순박한 아이였다. 마음에 들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해선이나 저한테 물어보세요. 저는 무슨 일 없으면 대부분 월관에 있거든요.”
“네! 감사합니다!”
도월은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고, 문완은 자신이 지낼 하역의 약방으로 갔다. 의원으로 온 선관은 해선을 제외하고, 두 번째였다. 먼저 온 선관은 동역에서 지내고 있다.
“계십니까?”
“네~”
약재방에서 나온 해선. 그 모습을 본 문완의 얼굴을 발그레해졌다. 적당히 붉은 기를 가진 입술에 맑은 눈동자.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게 아담한 체구.
“일단 짐부터 정리하고 다시 볼까요?”
“넵!
해선은 천국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듯 익숙하게 움직였다. 아랑과 함께하면서 성과를 많이 거뒀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 가진 성과들로 충분했다.
“약재는 본관이랑 똑같이 정리해 놨어요. 앞으로도 이렇게 정리해서 사용하시면 되고-”
제일 기본적인 약재부터 시작했다. 해선이 문완에게 교육을 하는 동안, 도월은 아랑구로 들어온 두 망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망자님, 이곳은 동물들의 저승입니다.”
“그게 뭐요.”
“저희 애를 찾으러 온 것뿐입니다. 비켜주세요.”
“죄송하지만, 이 이상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잔뜩 날이 서있었다. 부부로 보이는 저 둘이 아이를 찾으러 왔다는 말의 진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비키라는 말 안 들려?!”
도월은 이제 참지 않는다. 아랑구에 조금이라도 해를 가하려는 망자에게 말이 안 통하는 순간 바로 제압을 했다. 둘은 뒤에서 시끄럽게 소리를 질렀고, 도월은 그런 둘을 지옥으로 끌고 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늦지 않았습니다.”
“이 둘은 놓치면 안 됐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닥쳐! 우리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선하게 살았는지 알기나 해?”
“제 핏줄을 죽인 것들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궁핍한 삶이 오래되었다. 그래서 한날한시에 동반자살이라는 이름 아래, 자식의 숨을 먼저 끊고 뒤를 따라갔다.
“네들은 세상이 얼마나 험한지 모르잖아. 힘이 없으면 궁핍함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현실을 뭘 알아!”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발버둥을 쳐보길 하였느냐?”
“...”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방도를 찾아보기를 하였느냐?
“...”
“그러지도 않았으면서 부모라는 것들이 그런 짓을 해!”
두 망자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런 적이 없으니까. 주어진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며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살이 잘리고, 뼈가 깎이는 노력해도 모자랄 판에 뭐를 해? 동반자살이라는 이름에 숨어 아이를 죽여?”
“어쩔 수 없었다고!”
“생명 가득한 아이의 목숨을 앗아가 놓고, 다시 그 아이의 뒤에 숨어 감히 천국으로 가길 원해? 뻔뻔해도 정도가 있지!”
진운의 말에 두 망자는 할 말을 잃었고, 뒤늦게 죄책감을 가진 망자는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지옥으로 가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잘 마무리된 듯하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소동이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뒤, 다른 일이 생겼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날이 추우니 옷 따뜻하게 입으시고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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