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았던 상처 (1)

“이 뒤는 하현 님도 아는 얘기예요.”
“네...”
“어쩌다 보니 얘기가 좀 많이 길어졌네요.”
도월의 과거 이야기는 며칠에 나눠서 풀어졌다.
과연 이 이야기를 잘 이끌어 갈 수 있을지 단언할 수 없었다. 일부러 그날의 이야기를 피한지 오래됐으니까.
“중간에 떨거나 그러지 않았죠?”
“...”
“왜.. 그래요?”
하현은 화단에 물을 주며 머쓱하게 웃는 도월을 말없이 바라봤다. 지나간 이야기지만 듣는 것으로도 화가 나고 마음이 아팠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을지를 생각하니, 그 어떤 말도 쉽게 뱉을 수 없었다.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 동정은 싫어요.”
그 전쟁으로 도월이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아는 선관들은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왔다. 본인은 괜찮으려고 애쓰는데 주변에서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지.
찰나로 지나가 잊혀지는 동정에는 질린지 오래다.
“동정이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기까지 얼마나 아팠을까. 어디에 말도 못 하고 혼자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해서요.”
“동정은 싫다니까...”
도월의 눈앞에 뿌예졌다. 그리고 한 방울, 두 방울씩 도월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턱 끝에 모여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 왜 이러지. 미쳤나 봐.. 잠시만요. 미안해요..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도 안 와요. 그냥 울어요.”
처음엔 다들 나름의 위로를 건줬다. 그러다 점점 도월이 먼저 얘기를 꺼내지 않는 한, 그날의 얘기를 거론하지 않았다. 도월을 포함하여 모두 그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다.
“이제 괜찮은데.. 진짜 괜찮은데...”
7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 겉에 드러난 상처는 회복 과정과 흉터의 유무를 볼 수 있었지만, 마음 깊이 자리 잡은 상처는 알 길이 없었다.
알 길이 없던 상처가 지금은 아물지 않았을까 했지만, 여전히 아물지 않고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청령과 현진을 생각하면 죄책감에 사무쳤고, 계속 꼬리를 물며 이어진 생각은 그때 죽었어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그런 날은 봤던 보고서를 일부러 다시 보며 밤을 지새웠다.
“혼자 견디느라 고생 많았어요.”
여전히 옥황과 염라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환멸을 느끼고 있다.
도월은 한참을 울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울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점차 시간이 지나며 오래 알고 지낸 이들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보이기 싫었다.
“무뎌져서 그래요.”
젖은 눈으로 눈높이를 맞춰준 하현을 바라봤다.
“오래됐다고 해서 그때의 시간이 안 아픈 건 아니잖아요.”
‘아...’
“진짜 괜찮아질 때는 원망도, 설움도 다 토해냈을 때예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저 기다리면 괜찮아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있는 아이에게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과거에 갇힌 아이는 같이 흘러가지 못했다. 그저 다 큰 어른인 척하며 자신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마음을 다 보여줘도 뒷걸음치지 않을 존재였다.
— — — — — —
평소와 똑같이 일상을 보냈다. 명부가 오면 이승에 다녀오고, 보고서가 오면 읽고, 망자와 축령의 일로 매달 보름에 보고서를 교환했다.
“도월 님, 저희랑 동역으로 갈래요? 지금 눈 내린데요~”
“저는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잠시 쉴 겸 같이 가요, 네?”
“월관을 비울 수 없어서요.”
“하현 님도 있어서 괜찮지 않을까요?”
지역들을 자주 오며 가며 보지만, 때로는 조용히 쉬고 싶은 날도 있었다. 지금이 바로 그런 날이고. 그래서 조금 곤란했다.
“도월 님-”
“네~ 저를 찾는 분이 있어서. 제 몫까지 시간 잘 보내고 오세요.”
전과는 한 가지 달라진 점도 있었다.
“아쉽네.”
“어쩔 수 없네요.”
“그런데 도월 님 있잖아. 전보다 뭔가 얼굴이 밝아진 것 같지 않아?”
“너도?”
“선배도 느꼈어요?”
“하현 님이랑 있을 때, 제일 좋아 보였어.”
“혹시 둘 사이에 뭔가 있나.”
도월의 표정이 눈에 보일 정도로 좋아졌다는 것이다. 편해 보이려고 애쓰는 인위적인 얼굴이 아닌 자연스럽게 편안한 얼굴이 나왔다.
“이승에 놀러 가자고요? 왜요?”
“잠시 쉴 겸, 환기도 하고. 혹시 안 되는 거였어요?”
“그건 아니긴 한데..”
“전에 한 선관이 갔던데.”
“누구요?”
선관들이 사적인 이유로 잠시 이승으로 내려갈 때, 도월에게 승낙을 받고 내려간다. 한동안 이승에 가도 되냐고 말을 해오는 선관은 없었고, 최근에는 더더욱 없었다.
“키 크고, 하얀 머리칼이 턱선까지 내려와 있고, 이목구비는 뚜렷한 선관이요.”
“혹시 이마에 보석이 박혀 있었어요? 아직도 금이 가있는 거.”
“네.”
누군지 모를 수가 없었다.
“걔 선관 아니에요.”
“네?”
아랑구로 배정받은 선관들은 이무기의 생김새를 모른다. 인간의 형상으로 있을 때를 본 적이 없다 보니 옆을 지나가면 훤칠하게 생긴 선관이라 생각하는 그쳤다.
“저기 오네요.”
–"날 찾았나?"
“언제 이승에 내려갔다 왔어?”
–"그랬지. 며칠 전에 다녀왔지. 축령들에게 얘기를 듣다 보니 얼마나 바뀌었나 궁금해서 말이야."
“말을 하고 가야지.”
–"그대가 이 아이와 얘기를 하고 있어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다녀왔지."
“그, 그.. 이 모습은 잘 안 보여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었지. 그런데 지금은 본모습을 잘 안 보여주고 있어."
도월과 만난 뒤로 본모습이 아닌 인간의 형상으로 다니는 날이 많아진 아랑. 그 모습으로 다니는 것이 편하여 본모습을 잘 안 보여준지 한참 됐다. 그래서 아랑이 이무기인 것을 선관들은 모른다.
–"언제 한 번 둘이 내 둥지로 놀러 와. 안 온 지 한참 됐잖아. 월성초랑 월성목도 가져가고."
“씨를 말려줄 테니까 각오해.”
딸랑-
맑은 종소리가 명부가 왔음을 알렸다.
–"안락사라. 안타깝게 됐구나."
“가시죠.”
— — — — — —
경기장에서 달리던 경주마. 좋은 성적을 가져오던 말에게 복합골절이라는 비극이 찾아왔다.
“다음 생은 사람으로 태어나야 돼..”
어쩔 수 없이 안락사를 하게 되었고, 현장의 분위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말은 뒤에서 바라보다 미련 없이 도월과 하현의 뒤를 따라갔다.
“원하는 곳에서 지내면 된단다. 뛰고 싶으면 뛰고, 자고 싶으면 자고, 쉬고 싶으면 쉬고. 그러다 때가 되면 주인과 함께 환생길에 오르면 된단다.”
말은 도월에게 이마를 맞대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추역으로 들어갔다.
“안쓰러워?”
–"좀. 인간이었으면 이리 되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고."
“먼저 사연 없는 축령 없다고 그랬으면서.”
–"안 되겠어. 나 이 기분으로 둥지로 돌아가기 싫어. 오늘 하루만 월관에서 묵어야겠어."
“그걸 왜 네 마음대로 결정해?”
–"온전히 혼자 있어야 할 것 같으니, 그대들은 이승에서 쉬다 오게."
“뭐라는 거야. 그걸 왜 네 마음대로 정해. 나 자리 안 비워. 안 가.”
–"그럼 잘 다녀오고. 그대를 찾으면 내가 잘 얘기해 주겠네."
“뭐 하는 거야? 야. 아랑!”
도월과 하현의 발밑으로 포탈을 만들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당한 도월과 하현은 그대로 밑으로 떨어졌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고 와~"
‘돌아가면 두고 보자, 아랑.’
당황한 것도 잠시, 도월은 하현의 허리를 감싸며 땅으로 살포시 착지를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오랜만에 이승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가보고 싶은 곳 있어요?”
“글쎄요. 도월 님 따라다닐게요. 길을 잘 몰라서.”
“알고 가자고 한 게 아니었어요?”
“네. 처음부터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긴 했어요.”
어떻게 됐든 도월은 이승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뭔가 둘한테 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지.
“그럼 일단 외양을 산 사람처럼 바꾸죠.”
손짓 한 번으로 머리는 흑발로, 눈동자는 갈색으로 바뀌었다. 옷도 좀 더 현대스럽게 바뀌었지. 옷부터 신기함을 느낀 하현은 많은 것이 새로웠다.
“최근까지 살다 온 거 아니에요?”
“절대신 아래에서 오랫동안 있다가 왔어요.”
이미 죽은 지는 오래됐었다. 그러나 반은 늑대, 반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신은 많은 고민을 했다. 이대로 저승에 보낸다면 정해진 곳 없이 저승 밖에서 길을 헤맬 것이 뻔했다. 도월이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환생길에 오를 때가 문제였지.
“절대신이 고민을 좀 오래 했어요. 절대신이랑 같은 공간에서 있다가 온 거라 이승은 잘 몰라요.”
“옥황한 테는 어쩌다 간 거예요?”
“옥황님이 먼저 욕심을 냈어요. 그런데 의도가 뻔히 드러나는 것도 싫었고, 사람보다는 동물이 좋아서 아랑구로 간다고 했어요.”
이제 하현이 왜 아랑구로 왔는지 이유를 알았다.
“이유가 어찌 됐든, 덕분에 입구에서 일이 좀 줄었어요.”
“고맙죠?”
옆에서 눈높이를 맞추며 개구지게 웃어 보였다. 처음에 이런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싶었지만 뭐 어떤가. 전보다 관계가 좋아졌으면 됐지.
“네. 너~무 고맙네요.”
“알면 됐어요.”
“그럼 고마우니까 요즘 애들이 어떻게 노는지 제가 잘 알려줄게요.”
둘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번화가로 들어갔고, 각종 오락과 먹거리를 즐겼다.
“돈은 다 어디서 난 거예요?”
“축령들 가족이 보낸 거예요. 저희가 어떤 방식으로든 대접을 받으면 대우를 해줘야 돼요.”
물건으로만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의 동물들을 데려가는 이에게 잘 부탁한다는 의미로 돈도 같이 보낸다.
“다들 돈으로 해요?”
“아니요. 대부분 물건으로 하는데, 동물이 좋아하던 건 주머니 넣고 태워서 동물한테 직접 적으로 보내줘요. 그럼 동물들은 낯선 곳에서 금방 익숙하게 지내게 되고, 어떤 마음으로 보냈는지 아니까 잘 지낼 수 있도록 돌보는 거죠.”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최선에서 보낸 것임을 알기에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환생길에 오르는 날까지 무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한다.
“거기 잘 어울리는 커플분들! 저희가 커플이 같이 참여하면 안주류 중 아무거나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쿠폰을 드리고 있습니다! 한 번 참여해 보세요!”
불쑥 다트촉을 내밀며 참여 유도를 하고 있었다.
“아, 저희는”
“가운데 맞히면 됩니까?”
“정확히 가운데를 맞추면 한 장만 나가는 쿠폰을 다 섯장 드립니다~”
“저녁도 먹고 갈 거죠?”
“네.. 그러죠, 뭐.”
오랜만에 이승으로 내려온 하현이 들뜬 것 같아 옆에서 조용히 있었다. 커플이라는 말이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한 번 보고 안 볼 사람들에게 기를 쓰고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아~ 아쉽게 중앙을 벗어났습니다. 여친분이 응원 한 마디해 주시면 어떨까요?”
“ㄴ, 네?”
“남친이 여친 맛있는 거 먹여주려고 하니 응원 한 마디 해주세요~!”
“파, 파이팅..”
“부끄러움이 많으신 분인가 보네요. 다정하게 애칭 부르면서 조금만 더 크게 해볼까요?”
‘아, 아.. 왜 저한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부끄러움에 어버버 거리고 있는 것을 본 하현은 망설임 없이 다시 던졌고, 바로 정가운데를 맞혔다.
“퍼펙트! 응원하는 마음이 전해졌나 봅니다~!”
“쿠폰 유효기간은 1년입니다. 기간이 되기 전에 언제든지 오셔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참여 감사합니다~ 나도 참여하겠다 하시는 분!”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리게 됐다. 그렇지만 도월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먹고 갈까요?”
“여기 말고 다른 데는 어때요? 저 여기서 더 못 있겠어요..”
“그래요.”
얼굴이 붉어지다 못해 터지려 하는 도월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오늘 이 시간은 하현을 위한 시간이 아닌, 과거에 머문 아이를 위한 것이 아닐까 싶다.
-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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