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 주는 거 다 주라 (3)
시현은 알레프의 폭탄 발언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어려운 부탁을 하기 전보다 더 평온한 마음가짐으로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생각이 많아 보이더니, 그것 때문이었어?”
“···.”
알레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현을 바라보며 결심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좌석에 등을 기댄 시현은 팔짱을 끼고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하게, 이런 일이 처음 있었던 건 아니다.
셰릴과 멜리스토라는 이름의 드래곤이 그랬고, 저번에 언급했던 참모장 바란이 그랬다.
다만 셰릴은 특이한 케이스였고 멜리스토는 드래곤, 그중에서도 특히 강하고 영생을 산다는 용왕족이었기에 감성이 뒤틀려 있었다.
거기에 바란은 한술 더 떠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다만 딱히 문제를 겪고 있지도 않고, 오랜 세월 살아 대부분을 경험해 본 불멸자도 아니며, 이미 죽은 사람도 아닌 자가 언데드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는 건 확실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느새 다 비어버린 술병을 땅에 내려둔 시현은 알레프가 건넨 술병을 열었다.
이걸로 세 병째다.
반 비어있으니 두 병 반인가?
제법 마셨는데 전혀 질리지 않았다.
“이유는 묻지 않을게. 거절도 안 하고. 생각 많이 했을 거니까. 다만 알아둬야 할 게 있어.”
“뭐지?”
“네 자아를 잃을 수도 있다는 거.”
그러자 평정심을 유지하던 알레프의 표정이 살짝 무너졌다.
눈썹을 살짝 찌푸리는 정도.
하지만 확실하게 마음의 동요가 느껴졌다.
알레프가 마음의 동요를 느끼고 있든 말든, 시현은 그녀에게 이를 똑바로 말해줄 의무가 있었다.
그녀의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은 시현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다시 말해 특별한 아이만이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거야. 강함과 레벨과는 무관하게 말이야. 뭐, 몇몇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 자아를 갖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그럼···.”
“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후자의 경우도 흔치 않은 일이야. 천 명 중 한 명꼴? 그리고 내 경험상, 너는 좀 많이 힘들어 보여.”
겁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수도 없이 많은 네크로맨시를 하며 겨우 일곱의 군단장을 배출해냈다.
그리고 군단장이 되지 못한 존재 중엔 멜리스토와 같은 용왕족도 있었다. 시현조차 제대로 원인을 파악 못 했을 정도.
다만 혼의 강함이 어느 정도 영향을 준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시현이 보기에 알레프의 혼이 엘리트 언데드가 될 정도로 충분히 강한 것 같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엘리트 언데드가 되는 케이스는 더욱 드물다. 언데드로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혼이 성숙하여 존재가 격상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게다가 드물다고 했지만, 시현도 한 번밖에 본 적 없어서 이게 다른 언데드에게도 적용되는 건지 확실하지 않았다.
술을 홀짝인 시현은 한 번 더 알레프에게 물었다.
“어때, 그래도 언데드가 되고 싶어?”
“··· 무언가, 착각하고 있나 보군. 내가 놀란 건 자아를 잃을 수도 있다는 대목이 아니다.”
알레프는 시현의 물음에 특유의 무덤덤한 얼굴로 답했다.
걱정했던 시현이 무색하게.
“나는 애초에 자아 없이 너에게 종속될 것을 각오하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언데드가 자아를 가진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오히려 자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켁! 나는 싫어! 자아를 잃는다니? 그래서 완전 반대했던 건데!”
폴리머는 시현에게 날아와 매달리듯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그러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시현을 올려다보았다.
“인간! 아니, 시현! 할 수 있는 거지? 나랑 알레프 자아 잃지 않을 수 있는 거지?”
“글쎄, 어렵다니까.”
“아악!”
시현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피식 웃고는 이 가여운 페어리를 내려다보았다.
보아하니 꿍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구나.
시현은 알레프를 바라보았다.
이래도 그 생각 무르지 않을 건가?
하지만 알레프는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동의했었잖아, 폴리머.”
“으으! 그건 알레프가 끈질기게 부탁해서···.”
“우리는··· 그때 거기서 죽은 거야. 만약 그때 인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물론 요정 마을 전체가 사라졌을 거야.”
“그러니까! 신께서 내린 기회라고 생각하고 그냥 살아가자고! 그러면 되는 거잖아!”
이제는 아예 울음을 터트리며 알레프에게 매달리는 폴리머.
하지만 알레프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제 뜻을 굽히진 않았다.
시현은 침음을 흘렸다.
그가 보기에도 폴리머의 말이 백번 옳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가 시체와 언데드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인명 경시 사상을 가진 건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이 살린 생명이 직접 자신을 죽이고 언데드로 만들어달라는데 시현도 당황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뭐, 어떻게 할까.
본인이 원하는데 해줘야지.
회귀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새내기 헌터처럼 말이다.
다만 여기서 하지는 않을 거다.
“뭐, 지금 당장 할 생각은 없어. 안 그래도 미운털 박힌 처지인데, 요정들 앞마당에서 너 죽이고 탈주할 생각은 없거든.”
“그러냐. ··· 작별 인사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안주 가지러 내려간 사이 다 하고 온 참이니. 긴 여행을 떠나고 오겠다고 말한 참이었다.”
오호라. 그래서 오래 걸렸던 건가.
딱히 그런 걸 걱정했던 건 아니지만, 작별 인사는 끝내놨다고 하니 다행이네.
“그래. 어찌 됐든, 내일 마을을 나가서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할게. 그래야 뒤탈 없을 테니까.”
“그러지.”
“으으··· 인간, 잘 부타캐··· 제발··· 나 살려줘···.”
살려달라는 건 엘리트 언데드로 만들어 달라는 건지, 아니면 꺾이지 않을 것 같은 알레프의 의지를 꺾어달라는 건지.
쓰게 웃은 시현은 비어버린 두 술병을 챙기고 마을 회관으로 내려갔다.
“어디 가지?”
“쓰레기 버리고, 잠깐 바람 좀 쐬게.”
시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알레프는 아직도 훌쩍이는 폴리머를 달래기 시작했다.
시현은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으으으···.”
“끄어어···.”
회관 안으로 들어가니 엘프 좀비들이 여기저기 기어 다녔다.
저게 진짜 좀비였다면 시현이 웬 떡이냐 하며 달려들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진짜 좀비는 아니었다.
“염병. 술을 떡이 되도록 처마셨네?”
시현이 느긋하게 마시긴 했어도 겨우 2병 반을 마셨다.
많아 봤자 3병, 4병 정도 마실 시간인데 뻗는다고?
도대체 술이 얼마나 약한 거야?
자기가 술고래라는 점을 인지하지 못한 시현은 엘프들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그사이를 걸어 다녔다.
널브러진 엘프들과 덩달아 실신한 페어리를 피해 발을 옮기느라 제법 곤욕이었다.
‘미친놈들. 누가 밟으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있는 거지?’
시현에게 빼앗길까 조심할 때는 언제고.
혀를 끌끌 차며 마을 회관 밖으로 나간 시현은 밤공기를 쐬며 술기운을 몰아냈다.
뭐, 취기가 올라올락 말락 한 상태여서 깰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목적을 달성해서 시원한 기분이었다.
‘이걸로 설백윤 공략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사람을 대상으로 공략이라고 하는 게 좀 그랬지만, 어쨌든 이제 준비 만반이었다.
언데드는 현지 조달하고, 만약 운이 좋아서 알레프와 폴리머도 엘리트 언데드로서 합류해준다면 난이도는 훨씬 내려갈 것이다.
거기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전력이 되어 줄 호아까지.
‘··· 그래도 절대 방심할 수 없다는 게 흉성의 무서운 점이지.’
어쩌면 네크로맨서보다 더 까다로울 수도 있었다.
둘의 강함을 비교하면 당연히 네크로맨서가 더 강하긴 하겠지만, 시현은 그의 힘 대부분을 억누르고 싸웠기에 비교적 쉽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백윤은 달랐다. 힘을 억제할 방법이 없었고, 단순 스탯만 따지면 네크로맨서보다 더 높을 거다.
순수 육체적 강함만으로 S급 헌터에 맞닿아 있을 거란 얘기.
그런 부류는 오히려 시현의 밥이었지만, 그것도 적당히 차이가 나야지.
백윤 정도면 물량은 의미가 없으니 고기 방패 정도로밖에 쓸 수 없을 거다.
그래도 질 게임이었으면 시작도 안 했다. 충분히 승산이 있었고, 심지어 제법 높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어디서 자지? 노숙할 수도 없고, 떡 된 놈들은 나한테 적대적이고.”
“우리 집에서 재워줄까?”
흠칫 놀란 시현은 조용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녹초가 되어 잠이 든 폴리머를 품에 넣은 알레프가 있었다.
“인기척 좀 내고 다녀라.”
“흥, 제법 놀랐나 보군.”
시현이 놀란 기색을 보이자 그녀는 드물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성격 참 나쁘군.
덩달아 피식 웃은 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제안을 수락했다.
뭐, 하룻밤 정도 신세 지는 것쯤이야. 딱히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현은 폴리머의 안내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
짹- 짹짹-
빌어먹을 참새 소리.
에흐프리머에도 참새가 있던 건가?
왠지 지각한 것 같은 기분에 인상을 찌푸리며 기상한 시현은, 자신의 상태를 보고 깜짝 놀란다.
“··· 아니 옷이 왜 다 갈가리 찢겨 있냐?”
다행히 속옷은 무사했지만, 입고 있던 옷이 전부 갈가리 찢겨 있었다.
애초에 네크로맨서와 싸우는 탓에 너덜너덜해지긴 했지만, 그래봤자 마지막 일격을 막아냈을 때 소매 부분이 터져나가고 곳곳이 헤진 정도였다.
이렇게 작정하고 칼로 그어 놓은 듯 북북 찢어지진 않았었다.
그리고 이거, 손톱으로 한 것 같은데?
인상을 찌푸린 채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침대에서 떨어져 소파로 기어들어 온 알레프가 보였다.
··· 씨, 씨발 이게 뭐야?
우당탕!
기겁하며 시현이 몸을 뒤틀자 소파가 넘어져 두 사람이 땅을 굴렀다.
소파가 넘어지는 소리와 땅에 떨어진 충격에 일어난 알레프는 인상을 찌푸리며 시현을 노려봤다.
“으으, 아침부터 이게 무슨 소란··· 너, 옷이 왜 그 꼴이냐?”
“내가 묻고 싶은데? 그리고 네 옷도 그리 정상은 아니다?”
“그게 무슨··· 꺅!”
어이쿠.
저 엘프 입에서 저런 비명을 듣게 될 줄이야.
거실에서 TV를 보다가 욕실에서 나와 알몸으로 배회하는 채현을 본 기분이었다.
그래도 걔보단 낫지. 어찌나 당당한지 아예 속옷까지 찾아달라고 했었다.
‘시현스, 여기 보지 마. 변태야?’
아 짜증 나.
기분이 더 나빠진 시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알레프 잠버릇이 고약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똑같이 엉망인 그녀의 옷을 보고 다른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 추잡스러운 소동의 범인을 찾아냈다.
“··· 호아?”
“캥?”
태평하게 침대 위에서 웅크려 자는 작은 여우를 불러 깨우는 시현.
은여우보다 더 새까만 녀석은 이름을 부르자 캥? 하고 반응하며 졸린 눈으로 시현을 올려다보았다.
아, 귀여워!
우리 아가, 누굴 닮았길래 이렇게 귀여운 걸까?
우구궁, 그래쪄요~? 손톱이 간지러웠구나~?
··· 이게 아니지.
“··· 호아야. 너, 그 모습은 뭐냐? 완전히 작아졌잖아. 망향도 안 흘러나오고.”
“넌 이 상황에 그게 신경 쓰이냐? 그리고, 저길 봐라.”
어느새 멀쩡한 옷으로 갈아입은 알레프가 집 한구석을 가리켰다.
어제 돌풍에 휘말려 사라졌던 네크로맨서의 사지와 머리였다.
특이사항으로는 침 범벅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저것도 누가 범인인지 알 것 같았다.
“너, 어제 온종일 안 보이더니 저거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거구나? 지금은 힘을 다 써서 작아진 거고.”
“캉!”
아이, 귀여워라.
흐뭇한 미소를 지은 시현은 고개를 털어내곤 다시 생각에 잠겼다.
뭐, 힘을 상실한 거야 그냥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만으로 망향을 줄줄 뿌리고 다녔으니까 이해는 됐다.
작은 모습도 망향을 과도하게 소모해 이렇게 됐다고 볼 수 있겠지.
··· 근데 주변 생태계 괜찮으려나? 그 많은 망향을 거의 다 썼다는 건데···.
“그런데 저 더러운 건 왜 가지고 왔어? 지지야, 지지.”
“캐앵! 캉캉! 끼이잉···.”
시현이 저 시체를 더러운 것이라고 하자 호아는 서럽게 짖더니 앓는 소리를 냈다.
호아가 불쌍한 모습을 보이니 시현은 죄책감에 물든 얼굴로 쩔쩔매기 시작했다.
아니, 상처 입힐 생각은 없었는데···.
이 불쌍한 생명체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줄까 당황하고 있는데, 어째 시선이 이상했다.
호아는 세 개의 눈으로는 시현을, 그리고 두 개의 눈으로는 각각 알레프와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꼴에 주인이라고 눈을 세 개나 할애해준 거에 기쁨을 느낀 시현은 호아가 입맛을 다시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설마 저거 먹으려고? 먹기 전에 나한테 보여준 거야?”
“헥헥헥!”
정답이라는 듯이 기쁘게 헐떡이는 호아.
허어, 아니. 시체를 먹는다니? 그것도 네크로맨서의 시체를?
그거 진짜···.
“몸보신에 좋겠는데? 우리 공주님, 바로 대령해드리죠!”
헤벌쭉 웃은 시현은 곧장 집구석에 처박혀 있던 네크로맨서의 시체를 호아 앞에 대령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얼굴을 원래의 모습으로 변형시켜 시체를 꿀꺽 삼키는 호아.
작은 몸에 흉측한 여우 괴물의 대가리가 달렸으니 그 모습이 기괴하였지만, 시현은 사랑스러운 눈으로 그걸 바라볼 뿐이었다.
“아구, 우리 공주님 복스럽게도 먹네. 체할라. 아빠는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
“··· 적어도 옷이라도 입고서 해라!”
뒤에서 그 모든 기행을 지켜보던 알레프만 죽을 맛이었다.
- 작가의말
원래 물결표 잘 안 쓰는 편인데···
하! 저 말투를 맛깔나게 살리려면 쓸 수밖에 없네요. 아니면 예전에 하던 대로 길게 늘어 써야 하는데···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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