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났다
“차 주임님 오늘은 미국으로 수출하는 작업복입니다.”
일감을 수레에 싣고 다니며 각 미싱마다 배달해 주는 보조원이 씩씩한 소리로 내게 외쳤다.
‘이제 정말 시작이군.’
난 일감을 쳐다보았다.
나를 둘러싼 사방의 미싱(재봉틀)들은 드르륵 드르륵 소리를 내면서 열심히 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난 작업물을 노려보았다.
그때 내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져스트 두 잇!”
응?
이게 원 소리야?
“져스트 두 잇!!”
어라?
또 같은 소리네.
“일단 해 보라고~”
알고 있다고. 나 영국사람이라고.
훗날 전세계적인 대성공을 거두며 운동화와 운동용 의류와 용품 시장의 선도 브랜드가 된 나이스의 브랜딩을 컨설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진짜 나도 그 브랜드가 그렇게 클 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컨설팅 수수료를 주식으로 받았겠지.
아무튼 그때 전세계에 있는 그들의 공장을 모두 돌아봤던 경험이 떠오르면서 작업자들이 일하던 모습을 촬영했던 영상이 머리에 스치듯 지나갔다.
“그래. 할 수 있다.”
“이제 시작해 볼까?”
그때 누군가 내 뒤통수를 딱 때렸다.
“아우치~ 왓 더 헬!”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이자식이 정말 뭘 잘못 먹었나? 그게 무슨 말이냐?”
돌아보니 황 반장이었다.
“차 주임, 일 하기 싫어? 왜 시작 안하고 일감을 노려보고 있어?”
분명 소리는 딱하고 찰지게 났는데 아프지는 않았다.
아~ 이 두사람은 이러고 놀았구나.
“이제 막 시작하려고 했어요.”
“하긴 네가 하도 손이 빠르고 정확해서 한 시간쯤 늦게 시작해도 제일 많은 수량을 쳐내니까 지루할 수도 있을거야.”
“제가 손이 빨라요?”
“그래. 너는 미싱의 달인이야. 다른 말로 해줘?”
“뭔데요?”
“미싱 고수~”
그는 지분 거리면서 돌아서 가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미싱의 신”
“알았어요~ 그만 하세요.”
“너 치사하게 내가 방심할 때 뒤통수 때리면 죽인다.”
푸흡~ 이건 뭐 대놓고 그렇게 해달라는 부탁으로 들리는데.
“글쎄요~ 그건 반장님 하는 거 봐서.”
히죽거리며 돌아서 황 반장이 갔다.
내가 미싱 고수라고?
아니 심지어 미싱의 신이라고?
그 소리가 마음 속에서 울리면서 자신감 지수가 쑥쑥 오르고 있었다.
“그래. 쪄스트 두 잇이다.”
난 일감을 하나 집었다.
어? 이럴수가!
일감을 손에 들자 내 손이 날라다니기 시작했다.
몸통 앞판과 뒷판을 드르륵 한 번에 매끈하게 붙였다.
망설임이 뭐지?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내 손은 움직였고 한참 늦게 시작했는데도 이십분이 지나기 전에 작업물량이 다른 이들에 비해 앞서가기 시작했다.
20벌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황 반장이 다시 곁에 와있었다.”
난 의기양양하게 그를 바라봤다.
“역시~ 미싱의 신이야. 근데 왜 가만히 있냐?”
“네?”
난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작업이 끝나면 일어나서 춤을 춰야지 다음 작업물을 가져다주지.”
“엥? 춤을 춘다구요?”
“그래. 왜 모르는 척 바보같이 그래?”
난 벙쪄서 그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얼른 춰. 그거 싫으면 노래를 하든지.”
난 그를 째려보면서 일어나서 어깨를 둠칫둠칫 흔들었다.
“이렇게요?”
그때 옆자리에 있는 중년의 여성이 지겹다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바빠 죽겠는데 반장님은 맨날 차 주임님을 놀려요~”
“그러게 말이야.”
“차 주임 춤을 췄으면 이번엔 노래도 좀 해봐.”
그때 엄격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작은 체구의 남자가 호통을 쳤다.
“황반장! 거기서 또 장난치고 있어? 가서 일이나 해~”
황반장은 꼬리를 내리고 얼른 사라졌다.
“차 주임 다 했으면 손을 들어야지 같이 그렇게 장난치면 어떡해.”
아~ 다 하면 손을 드는구나.
나는 그제서야 앉아서 손을 들었다.
그는 지나치면서 내게 들리게 우렁차게 소리쳤다.
“작업 중에는 절대 집중해. 그러다 사고 난다.”
“네. 알겠습니다.”
“너 잘하는 거 아는데, 그럴수록 겸손하자.”
난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나 보다 겸손한 사람이 있을까?
내가 살린 회사들이 몇 개인데~ 올해의 경영자상만 세 차례나 수상하기도 했다.
영국항공을 살렸을 때는 여왕님으로부터 훈장과 백작위를 하사 받기도 했는데 그런 내가 미싱 앞에 앉아 있으면 충분히 겸손한 거 아닌가?
어떻게 더 겸손해야 하지?
이런 생각을 했지만 티를 내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분명했기에 더 겸손히 대답했다.
“네. 죄송합니다.”
하루 작업을 마친 후 난 깨달았다.
정말 난 미싱의 신이었구나.
내가 작업한 양은 다른 작업자들 대비 3배가 넘었다.
“이야~ 우리 미싱 고수님이 오늘은 더 많이 했네.”
황반장이 완성된 마지막 제품을 보면서 내게 말했다.
“그러게 말이예요. 차 주임 때문에 주눅이 들어서 못살겠어.”
“그래~ 좀 천천히 해. 우리가 다 찐따처럼 보이잖아.”
주변에 앉은 미싱사들이 내게 원성을 쏟아냈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이야~ 내가 몸을 쓰는 일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이거 대박인걸!’
80이 넘으면서 여기 저기 아프고 허리통증을 달고 살던 나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통증은 느껴지지 않고 몸이 너무나 자유롭게 느껴졌다.
종일 미싱을 돌렸는데도 피곤이 느껴지기는 커녕 이제 몸이 워밍업을 끝낸 것 같이 힘이 났다.
“스물 한 살의 젊음이 정말 좋기는 좋다.”
나도 모르게 히죽거리며 혼잣말을 하고 말았다.
“아이고~ 그래. 넌 젊어서 좋겠다.”
그걸 그새 듣고 비아냥대는 황반장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난 일어섰다.
“반장님. 저 오늘 아버지 제사 때문에 먼저 갑니다.”
“아~ 그렇구나. 이거 어쩌지···”
그는 방금 전 놀린 게 미안했는지 말을 더듬었다.
안 주머니를 주섬거리며 뒤지더니 약간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아이~ 왜 이러세요?”
“받아둬. 아버지 소고기라도 좀 대접해.”
난 황반장과 나의 관계가 보통 이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오늘 하루 그와 함께 했는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늘 내 곁에 있었던 사람은 그였다.
‘왠지 이 사람과 오래 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집으로 돌아오는 셔틀버스를 타자 비로서 생각이 났다.
전쟁이 막 끝나고 사방에 무너진 집들과 시체들이 득실거릴 때 난 이천에 갔었다.
봉식이 그러니까 지금은 아빠인 차봉식의 마지막 부탁을 받고서 그의 군번줄을 가지고 통역을 대동하고 갔었지.
하지만 막상 봉식이네 집에 갔을 때 그 집에 사는 사람은 봉식이의 가족이 아니었어.
이틀을 그 주변지역을 샅샅이 뒤지면서 봉식이 가족의 행방을 알만한 사람을 찾아 다녔잖아.
드디어 생각이 났어.
그때 한 집에서 일어났던 일이었어.
마당에서는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씻기고 있었고 집 안에서는 남자가 혼자 안주도 없이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지.
“혹시 저기 살았던 차봉식 씨의 가족이 어디로 갔는 지 아세요?”
여자는 우리를 보더니 손 사레를 치면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몰라요. 얼른 가세요.”
그때 방에서 술을 마시며 그 소리를 들은 남자가 밖을 내다보며 소리쳤다.
“봉식이네를 찾수?”
“네. 그분들이 어디로 갔는 지 아십니까?”
“그건 모르지만 죽지는 않았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당에 있던 그 여자는 기겁을 하면서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저 양반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려.”
“뭔 쓸데없는 소리래? 내가 없는 말을 하나?”
“그 소리 해서 뭐해요~ 다 지난 일이구만. 그런 말 해서 좋을 거 없으니까 입 다물어요.”
나는 마음이 다급해서 그에게 제발 아는 대로만 말해달라며 약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그럼 잠깐 들어오슈~”
여자도 돈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는지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내가 여기서 망을 볼 테니 안에 들어가서 얘기 나눠요. 너무 오래 하지는 말구.”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서 봉식이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그로부터 들었다.
“자~ 우선 막걸리 한잔하셔요.”
난 한국에 참전하고서 종종 막걸리를 마셨었다.
부대원 중에는 한국의 인심과 막걸리와 탁주 등의 술을 마셨던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고 그게 몹시도 궁금했었다.
처음 막걸리를 마신 날 나는 신세계를 경험했었다.
텁텁하고 뒷맛이 시큼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자꾸 끌리는 그 맛은 위스키와 비교할 수 없었다.
난 그가 따라 주는 막걸리를 한 잔 단숨에 비웠다.
“서양양반이 잘 드시네.”
우리는 그에게 얼른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니까 그 집에 생긴 일이 참 딱했어요.”
“차봉식이 집안은 대대로 부자였어요. 우리도 그 집 땅을 소작해서 먹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난리 통에 그 집 집사새끼가 주인집 재산을 홀라당 다 가로챘다니깐요.”
“인민군하고 내통해 가지고 봉식이 아부지와 엄마를 인민군을 통해서 도륙을 했어요.”
“겨우 봉식이 처와 두 살 배기 아들만 목숨을 건져서 도망쳤어요.”
“그럼 봉식이 처와 아들이 어디로 갔는 지는 모르세요?”
“그걸 우찌 알겠어요. 만일 알면 그들도 위험해질텐데 차라리 모르는 게 낫다 이 말이요.”
난 그에게서 막걸리를 한 잔 더 받아 마셨다.
“어쩌자고 봉식이 그 놈의 자식은 전쟁 통에 죽어가지고 집안을 지키지도 못하고··· 아무튼 그 집은 풍비박산이 났으니 더 이상 찾지 마슈.”
몹시도 가슴 아픈 사연이었다.
가만··· 가만 있어보자.
방금 생각 난 그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네.
두 살 배기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도망친 그 여자가 내 엄마이고.
갑자기 뒤바뀐 모든 것들로 인해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지만 생각이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봉식이는 나를 살리고 죽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찾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어쩌면 신이 나에게 그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약속을 지키고 오라는 특별한 명령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생각을 하자 난 지금의 상황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봉식아~ 미안하다. 너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평생을 나만의 영광을 누리고 살았던 날 용서해줘.”
“이제 너와 너의 가족을 위해서 살께.”
“내가 네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울께.”
이 말들을 나지막이 하는데 가슴이 뜨거워졌다.
“기사님 저기 입구에서 세워주세요.”
“오늘은 집 앞에서 내리지 않네요?”
“네. 아버지 제사라서 소고기 조금 사가려고요.”
“아~ 그러시군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 주임님.”
“네 기사님. 수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푸근하게 웃고 있는 버스 기사를 보며 나는 목례를 하고 내렸다.
“소고기를 사가면 엄마가 욕은 안 하겠지?”
“근데 엄마는 언제 그렇게 찰진 욕을 배웠을까?”
“아무튼 앞으로 엄마와 앞으로 할 일이 많겠어~”
난 혼자서 중얼거리며 소고기를 사러 정육점을 찾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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