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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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벌써 한 시간째 아빠의 선행과 멋진 모습을 칭송하고 있었다.
아빠를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아빠가 보여 주었던 놀라운 희생정신과 같은 이야기였다.
“아빠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그만해도 알겠으니까 아빠가 군에 간다음에 벌어진 얘기를 좀 해봐.”
취기가 올랐는데도 엄마는 뭔가 모르게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엄마~”
“응?”
“엄마가 말하기 어려운 사연이지?”
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엄마가 우는 모습을 봤다.
이 여인은 절대로 울지 않을 것 같이 강해 보였지만 봉식이를 떠올리면서 너무나 아프게 울었다.
그것은 소주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 둘이 소주 네 병째 해치우고 있는 중이지만 절대 소주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 언젠가는 너에게 말을 해줘야 하겠지.”
엄마는 다시 또 한잔을 들이켰다.
와~ 봉식아 넌 알고 있었니?
네 마누라 진짜 술이 장난 아니게 쌔다.
“네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너희 친가는 잘 살았어.”
“증조 할아버지가 얼마나 장사수완이 좋았는지 돈을 많이 벌었지.”
“그리고 네 할아버지는 그 재산을 곱절로 불렸단다.”
“이천에서 우리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부자였어.”
난 엄마의 빈 잔을 채워주며 조용히 들었다.
“너희 아빠도 사업을 참 잘했단다.”
“그래?”
“응. 능력 있고 성실했지. 그런데 너희 아빠가 군대에 가고 나서 일이 터졌어.”
“무슨 일인데?”
“너희 할아버지가 30년을 데리고 가르치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맡기다시피 한 집사 새끼가 배신을 한거지.”
“뭐? 집사새끼가 배신을?”
“응. 아주 머리가 비상하고 사악한 놈이야.”
“그 새끼가 누군데?”
나도 모르게 엄마가 쓰는 욕을 나도 쓰고 있었다.
“그 새끼 이름은 최칠석이야.”
“대체 그 새끼가 우리 집에 무슨 짓을 한거야?”
엄마는 소주를 다시 들이켰다.
난 엄마가 걱정 되서 안주도 같이 먹으라고 동그랑땡을 하나 집어 입에 넣어 주었다.
“그때는 세상이 미쳐 있었어.”
“남들은 모두 피난을 가는데 우리는 마을 지키기 위해서 피난을 가지 않았어.”
“사실 최칠석 그 놈이 아버님을 꼬드겨서 자기가 인민군의 높은 사람을 안다고 우리 집에는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도록 손을 쓰겠다며 작지 않은 돈을 가져갔어.”
“할아버지는 그 말을 믿은 거고?”
“응. 평소에 워낙 성실했던 사람이라 아버님은 철썩 같이 믿었지. 그런데 그 놈이 가져간 그 돈으로 자기가 안다는 인민군 고위직을 동원해서 ···”
엄마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인민군을 데려와서 아버님을 공개 처형했어. 부르주아라고 하면서”
“그리고 집안 사람들을 하나씩 총살했어.”
“마지막 남은 게 나와 너였어.”
엄마는 말을 멈추고 잇지 못했다.
“난 종놈인 그 놈에게 빌었어. 살려달라고.”
“그 놈은 뻐기면서 조건을 달았어.”
“무슨 조건?”
“우리 재산을 모두 자기 앞으로 돌려 놓는데 협조하면 살려주겠다고.”
“그래서 엄마가 뭘 해줬는데?”
“관리 앞에 가서 아버님이 모든 재산을 최칠석 그 새끼에게 물려 줬다고 증언하고 확인서를 써줬어.”
이 말을 하고서 엄마는 서럽게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 개자식이 우리 식구들을 모두 죽였어.”
이 말을 반복하면서 엄마는 울고 또 울었다.
만취한 엄마는 그렇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
난 상을 치우면서 속에서 울분이 치미는 것을 겨우 참았다.
늦은 저녁까지 설거지를 하고서 잠을 청하려고 했지만 통 잠이 오질 않았다.
“최칠석, 최칠석, 최칠석,,,”
봉식이가 설사 살아서 돌아왔다고 해도 화병으로 죽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난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최칠석에게 빼앗긴 재산 내가 다 찾아올께 봉식아.”
“그래서 너의 아내와 아들이 당한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씻어줄께.”
다음날부터 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햄버거 사업을 시작할까?
미싱사로 살아서는 절대로 큰 돈을 벌 수 없다.
제 아무리 미싱의 신이라 인정받아도 뻔한 월급으로 집 한 채 사기도 어렵다.
내가 봉식이 가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막막했다.
영국에서는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내로라 하는 기업들에 들어가서 경영자로 활동하고 때로는 컨설팅을 하면서 그들을 살리는 일을 했는데···
여왕님께 훈장과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는데···
유럽연합의 최고 권위의 상인 올해의 EU 경영자 상을 세번이나 받았는데···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지금의 난 중졸이고, 육체 노동을 하는 미싱사로서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노동자이고, 월급은 쥐꼬리 만큼 밖에 안되고, 가진 재산도 없다.
내가 가진 제약점을 생각하기 시작하자 기운이 빠졌다.
“아니야. 내가 가진 자원을 생각해 보자. 그럼 반드시 실마리가 보일거야.”
그래서 난 적어 보았다.
-경영학을 배웠다.
-옥스포드 박사로서의 실력이 있다.
-망해가는 기업을 살린 경험이 많다.
-다양한 기업에서 경영을 한 경험이 있다.
-수많은 경영자들에게 경영을 가르쳤다.
-전세계의 정재계에서 인맥이 빵빵하다.
-당연히 영어를 완벽하게 한다. (네이티브가 영어를 잘한다고 말하려니 부끄럽지만)
-국제적인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다.
그러다가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강점을 생각했다.
-미싱을 잘한다.
-눈치가 빠르다. 다시 말해 일머리가 좋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
-출중한 외모를 갖추고 있다.
-미래를 먼저 살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 중 내가 아는 것이 있다.
어? 이거 굉장한데~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난 금광을 발견한 것 같이 유레카를 외쳤다.
“그래. 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아는 게 있어. 그건 엄청난 자산이야.”
사실 햄버거 사업도 그래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종이에 이것들을 적고 보니 움츠러들던 어깨가 한껏 펴졌다.
“맞아. 난 성공할 수밖에 없어. 시간이 문제일 뿐이야.”
엄마는 그날 그렇게 서럽게 울고서 다음날 눈이 팅팅 부었지만 아무 것도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내게 욕을 하고 등짝스매싱을 날렸다.
하지만 난 엄마의 그런 행동이 오히려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아들이 있어서 저렇게 라도 표현하고 의지하지 않았으면 저 여자는 아마도 화병으로 죽었을 것이다.
네네~~ 실컷 등짝 후려 패시구요.
눼눼~~ 맘껏 욕을 날리시라구요.
제가 다 받아드리겠습니다.
대신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봉식이와 한 약속을 백 프로 지키는 날이 올때까지 말입니다.
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통을 이겨내고 욕을 들을 때 치미는 욱함도 참아냈다.
알고 보면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여자일 수도 있으니까.
#
“오늘은 좀 특별한 작업이야.”
“네? 뭔데요?”
“우리나라에서도 국제 패션쇼를 한데.”
패션쇼라면 내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지만 아는 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차 주임이 모르는 건 당연하지만 명색이 미싱사로 옷을 재봉한다고 하는 사람이면 패션에 대해 공부를 좀 해야지. 안 그래?”
황반장은 위사람들에게 무언가 듣고 왔는 지 패션쇼에 대해 아는 체를 하느라 분주했다.
“새로운 옷들을 모델에게 입혀서 보여주는 행사라는 거지.”
“그래서요?”
“그래서요는~ 암튼 그 행사에서 보여줄 옷들을 만드는 작업이야.”
“그게 뭐 특별히 어려울 것도 없잖아요?”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은 제작 난이도가 아주 높아. 그래서 이번 작업은 차 주임에게만 맡기기로 했어.”
“알았어요.”
그때 김여옥이 화난 얼굴로 찾아왔다.
“반장님. 그 일 제가 하게 해주세요. 제가 한참 선배인데 이러는 경우가 어딨어요?”
“여옥 씨. 그렇게 설명했으면 됐지 왜 이래?”
“저 잘할 수 있어요. 왜 차 주임에게만 맡겨요.”
“여옥 씨 잘하는 건 나도 알지. 하지만 이건 실수하면 절대로 안되는 중요한 거야.”
“저는 실수할 거 같아요? 차별하지 마세요.”
급기야 공장장이 달려와서 김여옥을 달래서 데려갔다.
김여옥 미싱사는 나보다 선배이면서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진영상사의 대표 미싱사로 활동했던 유능한 기술자였다.
난 그녀의 기술을 인정했지만 가끔 보이는 저런 성질머리는 이해가 안 됐다.
내가 재봉할 옷은 총 200벌이었다.
뭐 작업복처럼 단순한 작업이라면 그까짓 200벌이야 반나절이면 다 쳐내겠지만 이건 황반장의 말처럼 난이도가 상당했다.
미싱의 신이 그깟 200벌을 만드는 데 3일이나 걸렸으니 말 다한 것이었다.
난 내심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내 미싱사 인생에서 이렇게 더디게 일을 해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차 주임. 너 그거 아냐?”
“뭐요?”
“네가 3일 동안 작업한 패션쇼 의상들 말이야.”
“네. 그게 왜요?”
“그거 아주 난리났다.”
혹시라도 뭐가 잘못 됐나 싶어서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 앉았다.
“왜 난리가 나요?”
“그거 만드는 데 열흘의 시간을 줬다는 거야. 그런데 네가 3일만에 다 끝냈잖아.”
“그래요?”
그런 거 였구나.
그렇다면 무너진 내 자존심이 좀 올라가네.
“그래서···.. 승현아~ 너에게 특별 보너스를 준~데~~~”
황 반장은 자기가 신이 나서 어깨 춤을 췄다.
“에이 뭐 그거 줘봐야 얼마나 주겠어요?”
“그래도 준다는 자체가 얼마나 대단한 거냐? 회사 역사상 아마도 처음일걸?”
“그래요?”
“응~ 처음이야. 너 혼자 먹으면 안 돼~ 삼겹살에 소주 한잔 사야 돼~”
난 알았다고 대답을 하며 웃었다.
“그리고 디자이너 선생님이 널 좀 보자신다.”
“누군데요?”
“앙리 킴 디자이너라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분이야.”
“그 분이 왜 절 보자고 해요?”
“일단 준비하고 있어. 이따 공장으로 오신다니까 부를거야.”
“알았어요. 이제 가세요. 저 일 밀려요.”
“알았어. 이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황 반장이 자리를 뜨고 나서 난 혼자 웃으며 밀린 일을 했다.
“차 주임님 사무실로 좀 오세요.”
일을 막 끝냈을 때 총무담당 이 양이 날 불렀다.
“네. 지금 갑니다.”
난 손을 얼른 닦고 토시를 벗고 사무실로 향했다.
“저기 회의실로 얼른 가세요.”
난 이 양이 시키는 대로 회의실로 가서 노크를 했다.
“네. 들어와요.”
안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진영상사의 사장인 최진영이 앉아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차 주임. 오랜만이죠?”
“안녕하세요 사장님.”
최 사장의 오른편에 약간 기괴한 복장을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분은 앙리 킴 디자이너님 이예요.”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차승현 주임님.”
그는 목소리가 남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부드럽고 친절했다.
“제가 최 사장님께 차 주임님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어요.”
“저를요?”
“네. 이번에 200벌 쇼에 나갈 의상을 너무 멋지게 빨리 만들어 주셔서 제가 칭찬을 많이 받았답니다. 고마워요.”
“아~ 네~ 제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아니예요~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거든요. 해외에서 오는 패션관련자들이 깜짝 놀랄 거예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제가 약소하지만 차 주임님께 보답을 하고 싶어서요.”
“감사합니다.”
난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앙리 킴 디자이너가 내게 준 봉투를 받고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서 난 회의실에서 나왔다.
어느새 알았는지 내 자리로 황반장이 달려왔다.
“얼마 받았니?”
“아직 몰라요.”
“한번 열어봐.”
“관심 끄세요. 이건 울 엄마에게 그대로 갔다 줄거니까요.”
“하여튼 매정한 놈. 그래도 소주는 사라.”
“그럼요. 삽니다.”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 보았다.
봉투에는 편지지와 명함과 현금 10만원이 담겨 있었다.
난 손이 떨렸다.
내 월급이 2만5천원에서 잔업이 많을 때는 3만원이었으니 약 4개월치 급여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많이 넣었지?’
그리고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차승현 님을 저희 의상실의 생산실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동봉한 금액이 제가 생각하는 월급이랍니다. 부디 승락하시길 바라며. 전화 꼭 주세요. -앙리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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