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었다
로비로 가지 않고 계단으로 올랐다.
여기저기에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다른 팀에게 죽어서 탈락한 플레이어들의 흔적. 그래서 시신이 없다.
“확실히 소멸은 아니야!”
“일호! 탐지 스킬 사용해 봐!”
“잠깐만요!”
덜컹-
녀석이 2층 문을 열고 뭔가를 보았다.
탐지 스킬은 투시로 에너지 흐름을 본다.
“와, 이거 신기하네.”
“어떤데? 뭐가 보여?”
“세상이 녹색으로 보여요!”
일호가 위층을 보았다.
“3층도 희미하지만 보입니다. 사람은 없고요. 와, 많이도 죽었네. 핏자국이 왜 이렇게 많아.”
“다 잡고 올라갔나 보군.”
“5층으로 바로 가죠.”
5층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잡몹 잡고 올라온 이들이 5층에서 만난 듯.
2층과 3층에는 늪 같은 함정이 있다. 걸리면 못 나온다.
5층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다른 팀이 튀어나왔다.
먼저 올라간 덕기 형이 냅다 후려쳤다.
퍽-
먼저 나온 자가 날아가고.
뒤이어 나오던 이들은 멈췄다.
“저기요! 우리 파티 맺··· 커헉!”
말하던 자의 가슴으로 검날이 튀어나왔다.
남자가 쓰러지자 다른 파티가 보였다.
처음 보는 이들이다. 대충 20명.
“5층은 우리가 먹는다. 꺼져.”
“너희는 어디서 왔나?”
“알아서 뭐 하게?”
이들은 후발주자다.
5층 보스를 잡고 먼저 올라간 팀이 있다.
안 그랬으면 6층이 열리지 않았을 테니까.
“죽여!”
상대의 고함이 들리던 그때.
호산이 먼저 5층 사무실로 뛰어들었다.
티팅- 금속 방패로 막으며 거침없이 밀었다.
“아악!”
“밀리지 마!”
호산이 그대로 밀고 들어가며 길을 열었다.
동시에 나와 덕기 형, 일호가 진입했다.
그때부터 난전이 벌어졌다.
사무실 곳곳에 널브러져 있는 플레이어들.
놈들은 이곳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이긴 팀이다. 수도 많고 레벨업도 해서 실력 차이가 컸던 듯.
퍼컥- 인정사정없이 베며 나아갔다.
내가 본보기로 그렇게 싸우자. 덕기 형과 호산도 주저없이 싸웠다. 우린 전원 10레벨 이상에다 갑옷도 착용.
20여 명이 말 그대로 삭제되고 있었다.
결국 5명 정도가 계단 쪽으로 도망갔다.
쓰러져 있던 플레이어들도 빛의 입자가 되어 사라져가고.
“후······.”
다들 말없이 쓰러진 자들을 보았다.
진짜로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죽인 행위를 했으니까.
다행히 아무도 다치진 않았다.
“머지않아 익숙해지겠지.”
덕기 형의 말이었다.
이 와중에 일행은 또 레벌업했다.
죽은 플레이어가 떨군 회복약도 획득하고.
“보상은 누가 가져갔군.”
“형님. 저기 누가 있습니다.”
탐지로 살피던 일호의 말이었다.
적외선 투시처럼 신형이 보이는 듯.
“저기도 있고. 숨은 사람들 많네.”
일호가 돌아보면서 하나둘 짚어냈다.
결렬한 싸움이 벌어지자 저렙들은 살기 위해 숨을 수밖에 없었다.
아래층에서도 누가 뛰어 올라온다.
“이것들 잡아!”
다짜고짜 공격하는 팀들.
바로 돌파하며 나갔다.
“곧장 10층까지 간다!”
다른 팀은 계속 올라와서 공격할 거고.
그런 팀을 막다 보면 지체된다. 이미 9층까지 올라간 팀도 있을 텐데. 10층 공략은 상당히 어려울 거다.
6층 위 모든 층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위층으로 가면 갈수록 많은 팀이 모이는지라.
다른 팀을 최대한 제거해서 레벨업부터 하자는 계획.
“우와악!”
챙- 호산이 기습을 걷어내며 후려쳤다.
다른 팀이 보이면 무턱대고 공격부터 한다.
7층 저편엔 바닥 늪에 빠진 채 죽은 이들이 보이고.
호산과 덕기 형이 선두에.
나와 일호가 후미에서 계단을 뛰어 올랐다.
각 층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무시하고 계속 등반.
“10층이 막혀 있습니다!”
먼저 올라간 호산이 10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튕겨 나왔다. 빛의 장막으로 막혀 있었다.
9층에선 비명이 들려오고 있고.
일방적인 학살?
“어떤 팀인지 엄청 센데?”
나도 그들 거점이 어딘지 궁금했다.
무기를 고쳐 잡고 9층으로 들어갔다.
여기저기 빛의 입자로 사라지는 시신들.
핏자국 수만 30여 명이 넘는다.
사무실 중간 창가까지 갔을 때였다.
저편에 단검을 든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지친 기색으로 숨을 고르는 중이었다.
척 봐도 잘생긴 외모에 구부정한 모습.
검은 단검과 검은색 옷과 코트.
놀랍게도 남자 혼자 있었다.
“자네 혼자인가.”
그 말에 남자가 우리를 보았다.
그를 보는 순간 일순이 넋이 나갔다.
일호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릴 정도로.
“와. 개 잘생겼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남자였다.
천사가 강림한 듯한 아름다운 얼굴.
우릴 물끄러미 보는 두 눈은 우수에 젖어 있고. 고독해 보였다.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새하얀 피부에는 흠집 하나 없다.
그냥 있어도 화보. 고결하고 우아하다.
저런 외모인데 혼자 30명을 쓸어버렸다.
어떤 인생을 산 건지.
아니면. 누군가의 도움?
“그쪽 혼자 한 건가?”
덕기 형의 말에.
미남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키도 무척 크다. 묘한 오러를 풍긴다.
잠깐.
이런 강자라면 혹시.
“넌 어디서 왔지?”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날 보는 눈에 호기심이 서린다.
기대하지 않은 대답이 들려왔다.
“용산.”
용산 거점에서 얼마나 벗어났기에.
이곳 강남까지 날아와 버린 걸까.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중원.
한국 1위를 다투던 최강자.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다.
그런데 이상하네.
비망록엔 용산에 있었는데.
이중원이 날 가만히 보았다.
호기심이 점점 의문으로 변한다.
혹시 ‘그들’이 이중원을 돕는 걸까.
그들이 돕는다면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 말을 잘 듣는 용사를 만들기 위함.
그들이 용사를 육성하는 목적이 그거 아닌가.
이중원이 의문을 떨쳐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혹시 열쇠 가지고 있나?”
그래서 여기에서 멈췄군.
플레이어들이 올라오는 족족 죽이면서.
“열쇠를 왜 우리한테서 찾지?”
“대답해라.”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
이중원의 흠이라면 목소리다.
그래도 여성 팬이 어마어마했다.
“네가 뇌까지 잘생겼으면 어쩔뻔했어. 무작정 죽인다고 열쇠가 나와? 힌트부터 찾아야지.”
스으으으-
살기가 음파가 되어 들려온다.
이중원의 몸에서도 오러가 번지고.
“뭐야.”
일호가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아직 튜토리얼인데 이런 마력이라니.
게다가 히든 스킬도 가지고 있다. 암살계.
“누가 널 돕나 봐?”
이중원이 피식 웃었다.
“내 노력을 우습게 보는군.”
녀석은 전혀 모르고 있다.
말수가 없다던 녀석인데 내 말에는 꼬박꼬박 대답도 하고. 그만큼 나한테 호기심이 있다는 거겠지.
“열쇠 던져라.”
이제 시작인데 피폐해 보인다.
정신 상태가 원래 이랬나.
이중원의 마력이 더욱 증폭되었다.
내 존재도 상당한 오류지만.
이 녀석의 스킬도 꽤 불공평하다.
공식 1위인 ‘이규’야 그들이 키웠다고 해도.
“그런 열쇠 없다니까. 아까도···”
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중원의 단검이 코앞까지 쐐도!
엄청난 속도! 깜짝 놀라서 일단 피했다.
곧장 사무실 책상을 건너뛰며 거리를 벌렸다.
도망가는 척했다. 일행의 안전을 위해서.
이중원은 나와 같은 속도로 따라붙었다.
“다들 계단에서 대기!”
“오케이!”
안 그래도 아래층에서 다른 팀이 몰려오는 중이었다. 내 일행이 그들을 막는다. 몹과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고 올라온 이들을 우리 파티원이 잡아서 레벨업.
터텅- 챙-
이중원의 놀라운 반응 속도!
내가 방향을 틀자, 녀석도 바로 틀었다.
베어오고 찔러오는 이중원의 단검을 손쉽게 쳐내자. 녀석의 눈에 당혹감이 비쳤다. 지금까지 만난 플레이어 중에 내가 가장 강했기 때문이겠지.
게다가 은근슬쩍 ‘가속’이 붙는다.
이렇게 전투 중에는 무의식적으로 발동되기도 하나 보네. 이름 그대로 쓰면 쓸수록 빨리 지는 건지.
이중원은 놀란 마음을 감추려 했지만 눈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보다 빠르다는 것을. 녀석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터텅-
또 쏜살같이 날아드는 중원의 검.
이기면 ‘그들’이 날 더욱 주시하겠지.
쐐애액-
텅- 퍼벅-
나도 이중원도 반발력으로 퉁겨나갔다.
난 책상 위를 뒤로 굴렀다가 착지했고.
녀석은 창가 쪽으로 훌쩍 뛰었다.
날아든 이중원의 검은 페이크였다.
단검으로 시선을 유도하며 무릎으로 내 명치를 노렸고. 나도 녀석의 예쁜 얼굴을 강타했다.
아주 깜짝 놀랐을걸!
중원은 미간을 좁혔다.
더는 날 가볍게 보지 않는다.
“너야말로. 누가 돕나?”
“그럴 리가.”
녀석의 입가에 맺힌 핏방울.
나도 명치가 좀 울렁거렸다. 경갑을 입었음에도 타격 순간 마력이 실리는 바람에.
둘 다 아직 초보 수준.
이중원의 살기는 이제 사라졌다.
나도 검을 슬쩍 내렸다.
“이봐. 네가 획득하고 얻은 스킬들. 단순한 네 노력이 아니야. 은근슬쩍 누가 돕는 거지.”
이중원은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것이 우연일까.
넌 의심 안 했을까.
“이유 없는 호의는 없어. 그들이 누군지 몰라도. 언젠가 널 손에 넣으려고 할 거야. 강제로.”
이중원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근거로?”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여기서 죽인다면. 그들이 널 회복시킬 거다. 어렵게 기사회생이라도 한 것처럼. 정말 그런지 시험해 볼까?”
꽃미남 녀석을 빤히 보았다.
진심으로 싸우면 넌 죽는다, 이중원.
내가 여기서 전력을 다하면 안 되거든.
유명해지는 건 네가 해라.
그렇게 내 편이 되어서 이규는 물론.
그들이 육성한 전쟁 노예들과 싸워야 돼.
“넌 뭔가 아는군.”
“너보다는 어른이니까.”
“웃기지 마.”
이중원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 늘 내 말을 염두에 두고 살겠지.
반대로 그들을 날 항상 감시할 것이고.
“열쇠 내놔. 진짜 죽는다.”
녀석도 한 수가 있다.
암살계 히든 스킬.
“왜 그렇게 열심히 해?”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굳이 싸울 필요 있어? 파티 맺으면 되지.”
이중원의 눈이 이번엔 가늘어진다.
그건 생각 못 했지? 하고 싶지도 않겠지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 있네, 열쇠.”
이중원의 시선이 자신의 앞을 향했다.
책상 위에 HS 프로젝트라는 문서가 있다.
녀석이 설마 하며 문서를 펼치자 빛이 났다.
그래, 그게 열쇠라고.
이 모기 목소리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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