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자의 멸마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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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카
작품등록일 :
2024.10.28 11:28
최근연재일 :
2024.12.24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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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6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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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황금의 문

DUMMY

맑고 푸른 하늘 아래 흰머리산의 웅장한 생명력을 본받아

전날 밤 내린 비가 모든 생명의 색과 향기에 싱그러움을 더하며

한 폭의 그림처럼 산자락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산길을 따라 피어난 연보라 금강초롱꽃은

숨겨둔 소망을 담아 들꽃 사이로

고요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투구꽃도 새색시 마냥 부끄러운 듯 힐끔거렸다.


부드럽게 돌아 흐르는 강 근처에는

이름 없는 들풀이 달콤한 향기를 피어냈다.

맺힌 물방울은 떠나간 옛 여인을 그리워하듯

맑고 투명한 모습으로 못다 한 애절함을 달래며

한 방울씩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고려는 동경이나 개경, 서경 등 대도시에는 상설 시장인 방시라는 시전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지방이나 외곽에는 향시라는 물물교환의 임시 시장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일종의 오일장이었다.


이른 아침 향시에 갔던 엄마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가온이었다.


푸른 구름과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며 멍을 때리고 있다 보니 문득 지난날들이 스쳐 생각났다.


사실, 나는 환생자였다.


고아 출신으로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던 소심한 성격이었다. 성인이 되자 고아원을 나와 힘든 사회생활을 하던 중 귀갓길에 산책 겸 마포 대교를 지나다 투신하려던 사람을 발견하고는 급히 그를 구해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시 들어가려고 나와 씨름을 하다 그만 내가 중심을 잃고는 강물에 빠졌는데 그 이후 눈을 떠보니 중세같은 시대에 아기로 환생해 있었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아름다운 여인이 빙그레 웃고 있었고 점차 주위 환경에 익숙해지자 아빠라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엄마 손에서만 자랐지만 나의 엄마는 얼굴만큼 마음씨도 고와서 부족하고 불편한 생활에도 과거 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 어느새 졸았나 보다. 귓가에 부드럽고 따스한 음성이 흘러들어와서 눈을 떴다.


“많이 기다렸지? 엄마가 오늘 우리 아들 주려고 뭘 사 왔을까요?”


허리 뒤로 무언가를 감추고 서 있는 고운 얼굴의 여인은 어린 가온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녀가 보자기에 싸인 무엇인가를 내보였다.


킁, 킁.


냄새를 맡는 어린 가온의 표정이 너무도 귀여웠다.


“뭔가 달콤한 냄새가 나요.”

“펼쳐 보렴.”

“와~, 모양이 이뻐요.”


연화 모양의 틀에 넣어 만든 꽃 모양의 떡이었다.


“먹어봐, 맛은 더 기가 막힌단다.”


오물오물.


냠냠.


마루에 걸터앉은 가온은 작은 손으로 연신 먹기에 바빴다.


정신없이 먹다 문득 엄마를 바라봤다.


“엄마는 안 먹어요?”

“엄마는 시장에서 이미 배불리 먹고 왔어. 기다린다고 배고팠을 텐데 많이 먹어요.”


곁에 앉아 있는 엄마는 가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가온의 눈가에 웃음이 만연했다. 그리고 세상 제일 맛날 것 같은 처음 본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현대에 살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난 내게 그보다 더 화려한 여러 음식들도 먹어 보았지만 그 떡보다 맛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온이 맛나게 먹는 동안 엄마는 곧잘 부르는 동동(動動)이라는 고려속요를 멋들어지게 불러줬다.


3월 지나며 핀 아아~, 늦봄의 진달래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태어나셨구나.

아으 동동(動動)다리~


4월 아니 잊고 아아~, 오는구나 꾀꼬리 새여~.

무엇 때문에 녹사님은 옛 나를 잊고 계시는가.

아으 동동(動動)다리~


이 동동은 고려 팔관회에서 그 달의 운수를 점치는 월운제의를 할 때 불렀다.


마을 사람들은 이쁜 엄마의 노랫소리를 가끔 들을 때면 궁중의 여악(女樂)이었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가온은 엄마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다만 이 동동을 부를 때면 엄마의 눈은 깊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듯 보였다. 아마도 곁에 없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가온이 맛있게 먹는 게 좋았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배부른 표정의 엄마는 노랫소리도 흥겨웠다.


그렇게 맛나게 먹던 게 밤가루와 달콤한 꿀이 들어간 고려율고 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엄마의 손가락에서 늘 떠나지 않던 가락지가 보이지 않았다.


* * *


어느 날, 스님 한 분이 찾아왔다.


어린 가온이 보기에도 몸 전체에 예사롭지 않는 기품과 고고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고 인물도 좋았다.


엄마는 그 스님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며 눈가에 눈물이 글썽했고, 스님은 여인을 담담한 시선으로 맑고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에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엄마와 스님은 그동안의 안부부터 이런저런 말들을 조용히 주고받았다.


내가 잠들어 있는 줄 알았지만 나는 자는 척을 하고 있었고 가끔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지곤 했다.


“이미 그런 권력의 암투에 신물이나 출가한 나에게는 다 지나간 속세의 허명일 뿐이라오.”


중간중간 맥이 없이 생략되고 오가는 말들에 정확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나름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던 것 같았다. 하긴 왕족도 불가에 귀의하는 게 특별나지 않는 세상이니 그러니 했다.


“올해 아이가 몇 살인가?”


스님의 부드러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열한 살 입니다.”

“음···. 그동안 고생이 많았네.”


스님은 말없이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스님은 한동안 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나와 친근하게 놀아주면서 정을 주었다.


사이 사이에 알 수 없는 걸 가르쳐 주기도 했다. 진언이라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에다 손으로 하는 몇 가지 특이한 동작도 가르쳐 주었다. 이걸 계속하면 머리가 맑아지고 병치레를 하지 않는다고 하니 없는 살림에 엄마를 생각해서 열심히 했다.


그 외에도 아름다운 무늬를 같이 새겨 놀기도 했다. 때론 맑은 계곡 아래에서 나에게 호흡하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 스님과 함께 호흡을 하면 이전보다 훨씬 숨이 길어지고 편안했다.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고 눈 감은 이마 앞에 환한 빛과 맑은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반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그날은 피곤했던지 일찍 잠들다 드문드문 들리는 말소리에 살짝 잠이 깼다.


“나는 내일이면 이만 가봐야 할 것 같네.”


그런 스님의 말에 여인의 눈동자가 바람맞은 등불처럼 마구 흔들렸다.


“겨우 반년도 안 되고 떠나시는 겁니까?”


여인이 어린 가온을 쳐다보다 고개를 숙이며 낮게 흐느꼈다.


“사실 여기에 너무 오래 있었어. 자네와 아이 때문에.”


스님의 눈은 여전히 맑고도 고요했지만 정 역시 따스하게 흐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명심하게. 내가 여기 온 이유이기도 하니.”


스님의 목소리가 좀 더 진중하고 깊은 음색으로 바뀌며 여인의 눈동자를 투명하게 바라보았다.


“조만간 큰 전란이 불어닥칠 것이네. 그 전란은 단순히 인간들만의 전쟁이 되지 않을 것이라오. 너무도 무섭고 사이한 것들이 천지를 휩쓸고 다니며 온 산하가 피로 물들 것이네.”


여인의 고운 아미가 산처럼 솟더니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물결쳤다. 그런 여인을 바라보며 스님의 측은하고 안타까운 눈빛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자네와 가온에게도 큰 위기가 닥칠 것이네. 그때를 대비해서 내가 어느 정도 조치를 취해 두었네만 자네가 저 아이를 잘 보호해야 하네.”


스님이 잠시 숨을 고르며 말에 알 수 없는 힘을 불어넣었다.


“저 아이가 반드시 살아남아야 훗날 모든 사람들의 미래 역시 기약할 수 있다오.”


그러면서 스님이 기이한 범문이 새겨진 물방울 모양의 목걸이를 그녀에게 걸어 주었다.


“만약 절체절명의 위기가 왔을 때 이 목걸이에 손을 얹고 내가 하는 진언을 외우게. 나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스님은 엄마에게 어떤 알 수 없는 주문을 몇 번이고 가르쳐 주었고 엄마에게 목걸이를 손에 잡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스님이 어떤 진언을 외우니 방안에 아늑한 빛이 목걸이에 어렸다 엄마의 손을 타고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날 밤, 스님은 자는 나의 이마에도 손을 대고는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주문을 외우자 청량한 바람이 이마 한가운데에 스며들더니 어두운 눈앞에 기이한 문자가 새겨진 황금의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고요히 사라졌다.


다음날, 스님의 떠나는 모습에 엄마는 말없이 보내고는 내가 보지 못하는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런 엄마의 슬픔을 나도 한 몸처럼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스님과의 정도 깊어졌든지 한동안 집안이 허전하고 텅 빈 것 같았다.


그 해가 지나자 스님이 말했던 무시무시한 전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가온과 그녀는 숙명처럼 맞닥뜨렸다.

금강초롱 1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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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멸마 대전의 서막과 푸른 눈의 마법사 -1 24.12.24 161 0 14쪽
28 소천계에서의 대혈투 -4 24.12.20 178 0 14쪽
27 소천계에서의 대혈투 -3 24.12.18 180 0 11쪽
26 소천계에서의 대혈투 -2 24.12.17 164 0 13쪽
25 소천계에서의 대혈투 -1 24.12.11 251 1 11쪽
24 혈기의 창 24.12.09 210 1 15쪽
23 청록 거인의 죄수 24.12.06 223 2 11쪽
22 남섬부주 24.12.05 203 2 13쪽
21 첩첩산중 24.12.02 210 2 12쪽
20 포악수 24.11.29 508 2 10쪽
19 수천, 수만 발의 화살도 24.11.28 167 2 12쪽
18 신비롭고 아름다운 시게송 24.11.27 167 2 9쪽
17 대륙의 전쟁 24.11.26 150 2 14쪽
16 청록빛의 돌, 바아파 24.11.25 108 2 12쪽
15 바즈라파니의 벼락 24.11.22 113 2 11쪽
14 폭식의 하르 망가스 24.11.21 235 2 13쪽
13 버드나무가 바람결에 날리듯 24.11.20 140 2 13쪽
12 천공의 사계수 24.11.19 115 2 11쪽
11 깨어나는 힘 24.11.18 112 2 12쪽
10 해골늑대 24.11.15 112 2 11쪽
9 카드반가의 사파이어빛 24.11.14 113 2 9쪽
8 마족과의 첫 격돌 24.11.13 253 2 10쪽
7 회오리치는 안개 24.11.12 112 2 9쪽
6 빛의 폭풍 24.11.11 126 2 10쪽
5 맹수의 눈빛 24.11.10 149 2 13쪽
4 폭력과 공포가 잠식된 세상 24.11.08 210 2 13쪽
3 마(魔)를 태워 멸하라! 24.11.07 263 3 11쪽
2 사이한 존속들(수정) 24.11.06 456 3 16쪽
» 황금의 문 24.11.06 782 4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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