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치는 안개

화살을 재고 있던 승도들의 팔찌에서도 같은 파동의 감응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폭죽을 쏘듯 화살촉에서 주홍의 빛이 어렸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 어둠을 가르며 탈린군을 향해 폭풍 같은 기세로 날아갔다.
슈우우우우!
퍽! 푹푹푹!
“컥! 커억!”
각 소로마다 경계를 서고 있던 탈린의 보초병들이 귀로 소리를 감지하는 순간 어느새 눈앞에 동시다발로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꼬꾸라지기 시작했다.
임시 경계 숙소로 서고 있던 주택 안에서도 화살이 연이어 쏟아지며 외마디 비명과 함께 탈린군이 나자빠졌다.
“웬 놈이냐!”
밖의 신음 소리에 실내에서 급히 뛰쳐나오던 십호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컥!”
개중에는 급소를 피해서 비틀거리면서 숨어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가온과 일행은 비호처럼 달려들어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놓았다.
곳곳에서 확인 사살이 있고 나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서두릅시다.”
가온의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대로와 이어지는 주택가 쪽으로 지체 없이 다시 움직였다.
* * *
“험! 험!”
“민한,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옷을 추스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실내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급히 안으로 들어온 백호장이 실내를 슬쩍 곁눈질했다. 한 여인이 실신한 채 누워 있었다.
“이상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소로쪽 부대에서 올라오던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그런 건 몇 명을 추슬러 보내면 될 것 아냐? 그만 나가 봐!”
짜증이 묻어난 말투였다.
“네!”
고개를 숙이는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 * *
“바타르, 어딨나?”
쩌렁쩌렁한 소리가 울리자 입안 가득히 씹으며 달려오는 이가 있었다.
“네!”
그의 손이 입가를 슬쩍 닦아냈다.
“밑에 있는 얘들 데리고 반대편 소로쪽으로 정찰 좀 가 봐.”
잠시 멀뚱거리며 눈을 굴렸다.
“정신 안 차릴래!”
정강이를 가차 없이 걷어찼다.
“윽!”
“주기적인 연락이 안 오고 있잖아! 얘들 데리고 가서 잘 살펴봐.”
“네!”
한 식경이 지나갔다.
“다와, 바타르에게선 연락이 없었나?”
“네, 뭐가 사달이 벌어진 듯합니다.”
“안 되겠군. 얘들 집결시켜!”
“알겠습니다!”
백여 명의 중무장 인원이 횃불을 들고는 주택가를 가로질러 내달렸다.
두두두두두!
어두운 전방을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이 탈린군다운 강군의 기세를 여지없이 내뿜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무성하게 자란 오동나무가 심어진 주택가를 지날 때였다.
슉! 슈슉!
난데없이 양 갈래에서 화살이 엄청난 속도로 빗발쳤다. 지붕과 담장, 잎으로 가려진 나무 등 특정 짓기 힘든 여러 지점에서 화살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히이잉!
인마(人馬)의 낙마와 충돌로 중심부 일대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앞서가던 쪽에서 천둥같은 소리가 터졌다.
“방패 들어!”
이미 그 소리보다 앞서 사선을 넘나들면서 단련된 그들의 본능이 몸을 틀거나 방패로 각자의 상체를 보호했다.
퍽! 퍽!
"윽!"
중심부를 제외한 곳은 상당 부분을 방패로 빠르게 막아 냈지만 엄청난 속도로 틀어박힌 화살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부르르 떨었다. 일부는 급소를 피해 들어오는 화살들이 몸에 박히자 크게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후속 탈린기병들은 그 짧은 거리에도 속도를 죽이고는 급습지점으로 역공을 가했다.
전방에서도 거친 음성이 연속해서 터져 나왔다.
“반격!”
그들의 기민함은 동물적이었다. 말의 움직임과 반대로 틀어진 자세로 활시위를 당겼다.
퉁! 투퉁!
전방과 후방에서 탈린병들의 역공에 기습을 가했던 정체불명의 공격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컥! 윽!”
그러나 다시 예상하지 못한 전방 쪽에서 상대의 재차 반격이 나왔다.
전방의 탈린병들이 중심부를 향해 반격을 가하는데 신경이 쏠리다 보니 또 다른 숨어있던 저격병들에게 그대로 노출되었다. 마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유기적인 시간차 저격이었다.
“쟈간, 괜찮으십니까?”
다와가 방패로 쟈간을 보호하자 일부가 다시 신속히 에워 샀다.
“나는 괜찮아.”
빰에 화살이 비겨간 길쭉한 찰과상이 보였다. 엄청난 속도에 의한 마찰로 피부를 인두로 지지는 듯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주위에는 이십 명 이상의 인원이 낙마해 쓰러졌지만 몽골의 재차 반격도 신속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상대 진영에선 침묵만이 감지됐다.
* * *
가온 일행은 소로 쪽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자 다시 움직였다.
후속병이 진입하는 지점에다 인원을 은밀하게 배치했다. 빛나는 눈동자만이 전방을 조용히 응시했다.
두두두두두!!
쿵, 콰당!
히이잉~! 히잉!
명령을 받고 신속히 움직이던 바타르 일행이 선두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말들이 넘어졌다. 바타르는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허공으로 내팽개치던 몸의 균형을 잡고는 재차 구르더니 신속히 일어섰다.
퍽! 퍽!
그가 굴러 지나간 자리에 화살이 연속으로 박혔다.
바타르는 잽싸게 쓰러진 말 쪽으로 몸을 숨기더니 반대 방향으로는 방패를 잡고는 급소를 가렸다. 이내 전방을 빠르게 훑었다.
“헉! 큭!”
예기치 못한 낙마와 충돌에 여러 몽골병들이 미처 대처를 하지 못한 채 사살당했다.
길바닥에 쳐 놓은 짙은 색감의 줄이 언뜻 형체를 드러냈다.
바타르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미 자신이 덫에 걸려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살아남은 일부 병사들이 방패로 몸을 숨기면서 반격을 가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 둘 쓰러져갔다.
바타르가 아랫배에 힘을 주면 큰 소리를 토해냈다.
“이 겁쟁이들아, 무엇이 두려워 어두운 곳에 숨어서 쏘기나 하느냐! 당장 모습을 드러내라!”
그사이 일부는 되돌아 도망을 쳤다. 그러나 돌아온 골목길에서 검은 인영이 불쑥 튀어나와 막아섰다.
바타르는 후방을 주시하다 인기척을 느끼고 전방을 다시 돌아봤다. 그곳도 여러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옆 담장과 지붕에서도 다수의 인영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살아남은 탈린군의 어깨가 힘없이 내려앉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죽음은 우리가 내린다! 텡그리의 품으로!”
바타르의 일갈이 어둠을 꿰뚫었다.
“텡그리의 품으로!, 텡그리의 폼으로!”
급격하게 떨어지던 부하들의 사기가 바타르의 투지 어린 외침에 다시 들끓었다.
“으아악!”
바타르가 살기 가득한 눈으로 방패를 앞세워 전방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도 뒤를 따랐다. 만곡도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기이익, 기익.
가온과 일부 수원승도가 탈린군을 주시하며 등에 메고 있던 것을 빠르게 돌려 끼워 결합시켰다. 군더더기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이후 그들은 내달리듯 손에 쥔 무기를 전방으로 내던졌다.
쾅!
일제히 쏟아진 창들이 돌진하던 탈린병들의 방패를 때리거나 부숴버렸다. 순간 노출된 탈린병의 몸뚱어리에는 여러 발의 화살이 연이어 꽂아 들었다.
“으억!”
달려오던 탈린병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털썩 쓰러진다. 골목은 고함과 피가 뒤섞인 숨결이 폭발하다 점차 가쁜 숨소리로 내려앉는다.
헐떡이던 호흡들이 어느새 잦아지면서 말을 잃은 골목의 어두운 담벼락처럼 완전한 침묵으로 녹아들었다.
뚜벅, 뚜벅.
가온이 한 발자국씩 걸어 나갈 때마다 발끝에 닿은 땅은 끈적이는 핏빛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묵직한 발걸음으로 주검을 지나 자신이 내던진 창을 집어 들어 분리했다. 등 뒤에 꽂아 넣고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바타르는 마지막까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있었다. 그의 눈을 감겨주었다.
‘다음 생에는 좋은 인연으로 만납시다.’
차갑고 무심한 바람이 골목길 피비린내를 훑고는 허공으로 흩어졌다.
가온 일행은 다시 강맹한 눈빛을 발하며 속보로 전진했다.
* * *
“오···지마! 죽어 괴물아!”
숨어있던 고려의 병사 하나가 다가오는 괴수의 그림자에 더 이상 물러날 길이 없자 떨리는 손으로 창을 힘껏 찔렀다.
훈 초노의 눈이 세모꼴의 차갑고 짙은 파란 눈빛으로 변하더니 그림자 안개처럼 스치며 그대로 병사의 목을 칼날 같은 손톱으로 날려버렸다.
쿵!
머리는 저 멀리 붕 떠서 날아가고 몸통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넘어졌다.
훈 초노가 심장을 꺼내어 입으로 우걱우걱 씹다 사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되자 먹잇감의 출현에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크르르르릉”
훈 초노가 입가에 선혈을 닦지도 않은 채 어둠 속으로 내달려갔다. 회오리치는 안개는 죽음의 체취가 넘실거렸다.
& 쟈간 : 백 명을 지휘하는 탈린군의 백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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