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공의 사계수

* * *
혜명은 고려 왕의 막내 아들이었다. 그러나 무신의 패악질과 왕실의 무능함, 조정의 권력 암투에 신물을 느끼며 어느 날 한 신비로운 고승을 만나서 금강산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자신의 스승으로부터 삼밀가지(三密加持)의 밀교 수행을 통해 현생에서 즉신성불에 이르는 최고의 수행법을 전수받아 어느덧 십여 년의 고행과 뼈를 깎는 수행으로 깊은 삼매에 들어갔다.
우주의 태초의 생명의 소리이자 맑고 밝은 진언인 ॐ(옴)이 울리는 가운데 절대계로 향하는 법계의 문이 열리고 불사의 지혜와 고귀함을 가진 황금과 순수한 깨달음이 담긴 백색을 두른 대일여래(비로자나불)와 친견하며 일체화되어갔다.
가부좌한 자신이 곧 연좌에 앉은 대일여래와 하나의 합일된 의식과 법신체로 승화되고 고양된 상태에서 어느 천공의 세계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뿌리는 대지 깊숙이 내려앉아 있었고, 가지는 우주의 수많은 비밀을 간직한 별들 사이로 뻗어 있는 나무가 있었다.
그 잎새는 놀랍게도 한 줄기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모두 담고 있었다.
봄의 파릇한 새싹과 여름의 진한 녹음이 시계 방향으로 돋아 나 있었고, 황금빛 어린 맑은 가을과 차갑고 고요한 겨울의 모습을 다 간직한 채 숲을 닮은 짙고 아름다운 초록의 에메랄드빛과 강렬하고 몽환적인 파란 사파이어빛이 어울려져 신비한 빛을 뿜어냈다.
천공의 세계에선 그 나무를 영원한 순환과 시간을 노래하는 사계수로 불렀다.
혜명이 대일여래와 일체화된 상태에서 내려다보니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한 사람은 바둑판을 앞에 두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특이한 형태의 판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텔레파시처럼 그것이 서양의 체스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어찌 된 일인지 맞은편에는 상대가 없이 각자 홀로 앉아 있는 게 이상했다.
체스를 바라보던 사나운 기도의 매서운 눈매를 가진 남자가 갑자기 퀸을 쑥 전진 배치했다. 처음 시작은 졸에 해당하는 폰이 일반적인데 처음부터 강수를 두자 바둑판을 보던 선하게 생긴 남자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켜세워졌다.
“흠!”
그 남자가 콧소리를 내며 바둑판의 정중앙인 천원(天元)에다 바둑알을 강하게 내려놓았다.
딱!
그 순간 바둑판과 체스판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주위의 풍경이 돌변했다.
자세히 보니 그 두 사람의 눈은 수정체가 없었다. 그 속에는 회전하는 거대한 별 무리를 담고 있었고 각자의 독특한 안광을 품어내고 있었다.
푸르고 하얀 빛무리가 녹아 있는 바둑판의 선한 인상의 신과 검붉고 사이한 빛을 뿜어내는 패악적 기도의 마왕은 각자의 한 수를 두었을 뿐인데 한동안 진척이 없이 무수한 수 싸움의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신과 마왕은 각자의 바둑판과 체스판을 하나둘 두기 시작했다.
혜명은 그런 신과 마왕의 판을 위에서 자세히 쳐다보았다. 마왕과 신이 한 수 한 수를 둘 때마다 곳곳이 전란과 화마로 휩싸이고 일진일퇴의 공방 속에 비명과 통곡의 장면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참혹한 전란은 단순히 특정 지역이나 동대륙에 국한되지 않고 서대륙에서도 불어와 온 세상이 전쟁터로 변해갔다.
혜명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좀 더 집중하자 고려의 모습이 보이면서 여러 사건들이 줄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더욱 집중해서 혜안을 열자 자신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의 운명과 얽힌 실타래가 흐르는 강물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들이 두는 한 수 한 수에 풍광이 계속해서 급변하면서 어느 순간 일그러지더니 어둠 속에서 신과 마왕의 두 눈만이 빛났다. 그리고 그들의 손짓에 따라 별빛들이 시시각각 움직이며 기묘한 운명의 조각들로 소용돌이쳤다.
그들이 무심한 듯 던지는 한 수가 인간들의 운명을 요동치게 했고 그들의 저의가 지상에 기이한 힘과 전운을 실어나르고 시간의 축마저 뒤틀리면서 얽히고 설켜갔다.
한참을 그렇게 지켜보고 있었지만 신과 마왕은 혜명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삼매에서 눈을 뜬 혜명은 깊은 사색에 빠졌다.
자신이 대일여래를 친견하면서 본 그 신과 마왕은 선악이 공존하는 상대계이자 우주의 인과율이었다.
자신은 그런 우주의 인과율에서 벗어난 초월적 깨달음의 법계에 있다 보니 신과 마왕은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인과율에 따라 변화되고 진행되던 사건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예견하는 시간의 또 다른 흐름의 축이자 시작점을 보여주는 광경임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더 막중하게 해야 할 일을 깨닫고는 세속에 직접 관여하지는 못한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자 자리를 털고는 잠시 금강산을 내려가 출가하기 전 자신도 몰랐던 새로운 인연에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놈들은 검은 망토같은 불길한 안개를 휘날리며
영혼을 지배하는 공포의 권능을 내뿜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던 곳의 마을이 화마로 불타고
사람들의 비명으로 들끓었다.
한점의 빛도 허락하지 않는 상처받은 세상에
검붉은 불타는 눈을 가진 마왕의 존속들이
실제 내 눈앞에 강림하던 날,
이곳이 단순한 중세가 아님을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어린 나의 몸뿐 아니라 지난 생에 살아온
수십 년의 어른으로서의 경험과 삶을 간직한
기억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엄동설한에 그대로 벌거벗은 아이처럼
쉴 새 없이 벌벌 떨면서 엄마를 꼭 부둥켜안고서는,
질식할 듯한 조그만 목구멍의 숨통을
겨우 좁쌀 구멍만큼 틔워 숨 쉬며
이 비현실적인 악몽 같은 시간이 그저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그런 내 몸뚱어리로, 자애롭고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엄마가 목걸이를 쥐고는 알 수 없는 진언을 부드럽게 읊었다.
그러자 아늑한 빛이 엄마와 나를 포근하게 감쌌다.
“크르르르릉”
얼마 있다 성인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위압적인 늑대 형상의 괴수가 불길한 안개를 두르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야생의 눈빛으로 우리 앞에서 으르릉 거렸다.
그 괴수는 뭔가 이상한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괴수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우리들 바로 눈앞까지 다가와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마치 거울 반대편에서 그 괴수를 보는 듯 신기한 공간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괴수는 우리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공포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얼마 있다 괴수가 사라졌지만 우리는 쉽게 나가지 않았다. 한참을 지나자 이 신기한 공간이 저절로 사라지고서야 엄마가 입을 열었다.
“가온아, 잠시만 여기에 있어. 엄마가 밖으로 나가서 안전한지 보고 올 테니. 그동안 나오면 안 돼. 알겠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힘이 없기도 했다.
엄마는 짚단으로 나를 숨기고는 헛간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밖을 나갔다. 문을 열자 날리는 매캐한 연기가 안으로 확 들어와 코끝을 자극했다.
잿더미로 불타버린 마을은 폐허의 쓸쓸함과 적막감을 동시에 간직하며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 재로 덮인 을씨년스러움으로 가득했고 하늘의 구름마저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나마 끔찍한 정체불명의 괴수가 보이지 않자 작은 안도감을 안고 다시 헛간으로 간 그녀는 문을 열고자 손잡이를 잡을 때였다.
“크르르르릉”
온몸의 작은 솜털까지 솟구치게 하는 오싹한 소리와 기운이 등 뒤에서 벼락처럼 울렸다.
힘든 세월의 흔적으로 어느새 주름이 잡힌 그녀의 곱고 우아했던 손가락이 잔 경련을 일으켰다.
그녀는 일찍이 없던 민첩함으로 얼른 헛간으로 들어가 걸어 잠그고는 가온을 꼭 껴안은 채로 다시금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근한 빛이 힘을 다해 상당히 약해져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이전처럼 저편 너머로의 다른 공간처럼 자리하지 않았다.
저벅! 저벅!
그 괴물이 다가오는 소리가 귀가에 천둥처럼 느껴졌다.
이를 깨문 그녀는 가온에게 목걸이를 걸어 주고는 그를 꼭 껴안고는 다시금 주문을 간절히 읊었다. 그러자 가온의 모습과 기척이 사라졌다.
퍽!
날카로운 칼날 같은 괴수의 손톱이 헛간 문을 거침없이 파고 들어왔다.
쾅!
그 순간 괴수가 튀어나온 손톱으로 문짝을 종이장처럼 찢어 박살 내며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엄마는 나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돌려 그 무서운 괴수를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괴수의 눈빛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의 몸에서 사이안 안개가 엄마를 끌고 가서는 목을 움켜쥐었다.
그 모든 것이 저 반대편에 투사된 영화관의 공포 영화를 보는 듯했지만 이것이 현실임을 아는 나였기에 몸으로 전해지는 충격과 공포의 무게가 연신 영혼을 짓눌렀다.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벌벌 떨면서 보고만 있었다.
‘엄···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그 괴수가 바로 눈앞에서 엄마의 심장을 꺼집어낼 때는 내 심장까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 흉폭한 괴수가 엄마의 심장을 우걱우걱 씹는 동안 눈에서는 짙은 암갈색의 빛이 흘러나와 몸을 감싸고 있던 불길한 안개와 섞여 심장의 생명의 에너지를 취하듯 동시에 빨아 들렸다. 그러자 엄마의 형상을 가진 영혼도 따라서 그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걸 그대로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엄마의 영혼의 울부짖음이 내 심혼을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아 머리를 감싸고는 미친 듯이 흐느꼈다. 어느 순간 뇌에서 뭔가 뚝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혼절해 버렸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사이한 안개에 둘러싸인 알 수 없는 공포 그 자체가 엄마의 심장과 영혼을 삼키는 악몽 같은 늪지대에 온 정신이 잠식되어 헤어나오지 못했다.
* * *
허공에 떠 있는 가온의 주위로 기이한 빛의 자기장이 끊임없이 맴돌면서 위헬의 안개를 밀어냈다.
훈 초노는 의식이 없는 상태의 모습에도 쉽게 다가갈 수 없는 힘이 서린 걸 느끼고는 눈빛이 가라앉았다.
특히나 가온의 양미간 사이에 드러난 옴(ॐ)의 범문이 황금색 휘광으로 더욱 강렬해지면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눈과 피부를 따끔거리게 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