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기의 창
“다리가 점점 밑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카루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어느새 한참을 걷다 보니 다리가 바다 밑바닥의 깊은 계곡 속으로 들어가는 풍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신기한 건 좌우에서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지 않고 있어 수족관을 보는 듯 여러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다.
한 탈린군 병사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벽을 손으로 만지자 물결이 일렁이며 손이 안으로 쑥 들어 가졌다.
그 순간, 머리 위에 발광체를 달고 얼굴의 절반 크기의 흉측한 입과 이빨을 드러내는 앵글러피쉬부터 몸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정상적으로 긴 주둥이를 가지고, 도깨비 같은 모양의 구울피시 일명 고블린 샤크같은 괴상한 생물체가 양옆을 배회하자 탈린군 병사가 소스라치게 놀라 얼른 손을 빼고는 물러났다.
그사이에 돌연 파랗고 때론 녹색 빛을 발광하며 흉측하고 매우 날카로운 이빨에 긴 뱀의 몸뚱어리를 가진 덩치 큰 블랙 드래곤 피시가 나타나 이들을 우악스럽게 입속으로 삼켜버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블랙 드래곤 피쉬의 긴 몸체가 부드럽게 꿈틀거리며 눈앞에서 유유히 지나쳐 갔다.
평생 처음 보는 괴상한 여러 심해 생물에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잠시 지체되는 가운데 선봉장 카루가 합라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합라의 눈살이 찌푸러지면서 뒤를 보니 화염의 해일은 역시나 그들을 봐주지 않고 밀고 들어오고 있었다.
“전진.”
합라의 나지막하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바토르 선봉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정도 걷다 보니 투명한 몸에 신비롭게 발광하는 외계스러운 생물체들이 대거 등장하자 거대한 해저 계곡이 몽환적인 세계로 변했다.
그 가운데 유독 빛나고 큰 심해 해파리의 머리 위에 화려한 머리 장식을 한 신비로운 여인이 나타나면서 해저 계곡에 아름다운 음률이 울려 퍼졌다.
아~§ 아아아~~§
그 음은 단순했다. 그러나 너무도 고혹적이고 치명적인 마력을 품어냈다. 더구나 깊은 계곡의 공간은 그 여인이 발산하는 음률의 울림을 더욱 증폭시키는 오르간의 파이프 같은 역할을 했다.
그 음률이 가득 차오르자 탈린군 병사들의 눈동자가 점점 선명함을 잃고 흐릿하게 풀어졌다. 그리고 각자의 온갖 욕망과 그 욕망의 환희로 깊게 젖어 들었다.
그녀의 달콤한 음률은
내 피부의 촉감과 무수한 감각을 휘감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의 떨림처럼 섬세하고 깊게 다가오네.
그녀의 고혹적인 눈빛 속에서
내가 누리지 못한 모든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으리.
그녀의 보드라운 손이 나를 어루만지자
그 손길에 내 영혼은 항거 없이 무루 맡기네.
수천 명의 탈린군 병사들은 각자의 욕망 속에서 환희와 감각의 열락으로 빠져들었다. 누군 산더미 같은 금은보화로, 누군 온갖 질퍽한 욕정에, 누군가는 폭력의 쾌감 속으로······
그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수천의 팔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병사들에게 유혹의 속삭임으로 손짓하자,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점점 해저 계곡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쑥쑥 해저 속으로 사라졌다.
합라의 눈에서도 참을 수 없는 욕망의 향연이 펼쳐졌다. 자신의 앞에 탈린 제국의 눈부시고 고고한 황금의 옥좌가 놓여 있었다. 그는 고양된 권력욕과 우월감에 사로잡히며 양옆에 시립한 신하들을 굽어보며 그 황금의 권좌를 향해 높은 계단을 한걸음 씩 올라갔다.
치이이익!
그가 자신도 모르게 해저로 한 발이 들어가자 그가 차고 있던 검 자루의 옥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암청색의 안개빛이 귀와 코로 흘러 들어가 그의 정신을 깨웠다.
머리가 냉탕에 들어간 것처럼 차가워지면서 눈에 선명한 초점이 맺힌 합라는 자기 부하들이 집단 최면에 빠져 해저로 들어가는 상황에 아연했다.
합라는 얼른 자신의 품에서 특이한 무늬가 새겨진 작은 요령을 꺼냈다. 한 손에는 검을 세워 높이 치켜들고는 한 손은 요령을 세차게 흔들었다.
짤랑짤랑! 짤랑짤랑!
요령의 소리가 검에서 나오는 암청색의 안개빛과 어우러져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자 해저로 빠져들던 탈린군 병사들의 걸음이 일시에 멈췄다. 그리고 계속되는 요령 소리에 점차 깨어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덩치 큰 우사르의 폭침같은 고함 소리에 탈린군 병사들이 긴 잠에서 부스스 깨어난 것처럼 초점이 돌아왔다.
우사르 역시 유혹의 음률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지만 양손등에서 기이한 문자가 새겨진 수다르가 시베스(Sudarga Shivees : 주술 문신)가 돌연 나타나면서 몽롱한 의식을 자극했다.
처음에는 손등으로도 제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자 얼굴 양 볼에서 수다르가 시베스가 생겨나면서 점차 얼굴 전체를 덮고 나서야 정신이 선명해졌다.
그러나 거대한 해저 계곡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치명적인 매혹의 음률은 그들을 계속해서 미혹의 세계로 다시 끌고 갔다.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던 합라는 계속해서 요령을 울리면서도 부하들에게 귀를 막고 악을 지르며 속보로 돌파하도록 지시했다.
“전군 속보!”
악! 악! 악!
병사들이 더 이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거세게 악을 지르며 빠르게 해저 계곡을 주파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차 체력이 떨어지거나 쓰러지는 이들도 나왔지만 괘념치 않고 계속해서 이 미혹의 해저 계곡 돌파를 강행해 나갔다.
얼마 후.
뒤에서 누군가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와 쓰러진 병사들을 계곡 해저의 심해 속으로 발길질을 하거나 손으로 휙휙 집어 던지고는 다시금 탈린군을 향해 한가롭게 따라갔다.
* * *
지친 발걸음으로 끝이 없을 것 같은 해저 계곡을 지나자 어느 순간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에취!”
“빌어먹을!”
거센 눈보라를 뚫고 들어가자 눈부신 은빛 설원이 펄쳐졌다.
“하아!”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거나 누워 퍼졌다. 누군 허기를 때우기 위해 육포를 씹거나, 목마름에 눈을 씹어 삼키기도 했다.
합라는 차가운 눈을 한 줌 집어 촉감을 느끼고는 입 안으로 넣었다.
오득 오득.
‘이렇게 생생한 느낌인데 진짜가 아니라니···.’
치이이익!
검 자루에 박힌 옥에서 피어나는 안개빛이 아니었다면 자신도 아무 의심 없이 이곳을 현실 세계로 마냥 받아들였을지 몰랐다. 아득한 너머의 거대한 수미산을 바라보며 답답한 표정을 보였다.
‘이 모든 조화가 저 수미산을 중심으로 뻗어 나오고 있다.’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수미산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기운을 느끼면서 사색에 빠져 있던 합라의 귓가를 자극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르르! 구르르!
저 언덕에서 큰 눈 덩어리 대, 여섯 개가 이쪽으로 굴러오고 있었다.
눈매를 좁히면서 지켜보던 합라에 앞서 전방의 카루가 큰소리로 외쳤다.
“전투 태세!”
점점 다가오자 흰 덩어리가 단순히 눈이 아닌걸 알아챈 카루의 대응이었다.
신속하게 방어벽을 구축하던 탈린군을 향해 그대로 들이닥쳤다.
쿵! 쿠쿠쿵!
상당한 덩치의 뭉치가 그대로 핀을 넘어뜨리는 볼링공처럼 탈린군 전방을 사정없이 무너뜨리고는, 동그란 덩어리가 말려 있던 몸을 쭉 펴자 키가 삼 미터에 달하는 백색의 설인이 일어섰다.
눈동자마저 백안인 설인의 머리 양쪽에는 성난 뿔이 돋아 있었는데.
크아아아악!
쾅! 쾅!
일어서면서 터져 나오는 포효에다 가슴을 치는 육중한 소리에 놀란 나뭇가지의 눈송이들이 그대로 우수수 떨어졌다. 당연히 기가 약한 탈린군 병사들도 자지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는 이들도 나왔다.
그 포효와 함께 설인의 날카롭고 억센 손톱이 탈린군 병사들을 난도질하듯 마구 그어버리자 병사들이 수수깡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일선 후퇴!”
“이선 공격!”
일선 후퇴가 나오자 이선에서 바로 빗발치는 화살 공격이 나왔고 일선은 지체없이 상체를 숙이고는 뒤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래도 평소에 실전을 통해 단련된 합이 거의 반사적으로 신속히 발휘됐다.
툭! 투투투투툭!
설인들은 커다란 손으로 한쪽 눈을 방어하고 날아오는 무수한 화살을 파리를 쫓듯 쳐냈다. 몸의 가죽이 질긴 건지 화살에 제대로 박히는 건 몇 개가 되지 않았다.
잠시 주춤하는 사이.
설인의 출현과 갑작스러운 난동에 지켜보던 우사르가 자신의 애병인 대부월을 들고는 다시금 앞으로 나섰다.
그가 헤집고 나오면서 자신의 손등부터 목, 얼굴, 그리고 다리 지점에서 검고도 기이한 주술 문자가 생겨나더니 부위별로 온몸을 뒤덮어 나갔다.
주술의 문신인 수다르가 시베스가 우사르의 전신을 뒤덮자 마치 검은 갑옷을 두른 듯했다. 실제로 그의 피부에는 검고 짙은 막이 생겨나면서 강한 투기가 흘러넘쳤다.
이 수다르가 시베스는 탈린 제국이 제국으로 성장하기 이전 자신들의 고대 주술사의 힘을 빌려 싸우던 전사의 갑옷이었다. 다만 이게 너무 위험해서 천에 한, 두 명이 성공하면 다행이다 보니 제국에서도 이런 수다르가 시베스를 해낸 이들은 많지가 않았다.
그러나 이게 성공하기만 하면 인간이 낼 수 없는 초인적인 힘을 끌어낼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내부에서 알탄 사원의 팽창에 위기를 느낀 오고타가 무리를 하다 보니 희생자가 많아지고 있었다.
* * *
검은 갑옷의 전사가 된 우사르가 설인들의 가운데로 난입하면서 자신의 애병을 들어 올렸다. 대부월에서 짙고 검은 기운이 운무처럼 피어올라 뒤덮고는 파공음을 그리며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샤아아아!
퍽!
화살에도 끄덕하지 않던 설인의 한쪽 팔이 잘려나가면서 기괴한 울부짖음이 차가운 대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쿠쿠쿠쿠쿠쿠!”
그걸 시작으로 다수의 설인과 우사르 간에 치열한 공방이 가열되었다.
우사르는 고무줄처럼 유연한 설인의 길고 날카로운 손톱 공격을 표범처럼 날렵하면서도 표홀이 움직이며 사이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믿기 힘든 빠르기와 민첩성으로 상대의 공격을 옆으로 흘리고는 독수리처럼 날카롭고 유려하게 다리 사이를 돌아 곰처럼 강하게 뒷다리를 찍어 넘겼다.
쿵!
한쪽 다리가 잘려나가자 삼 미터의 설인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지면서 눈보라를 일으켰다.
그사이 뒷머리로 날아오르는 또 다른 날카롭고 긴 손톱 공격에 허리를 수평으로 뒤집어 틀어서는 거의 곡예에 가까운 몸짓으로 다른 설인의 팔을 그대로 가격했다.
쿠쿠쿠쿠쿠쿠!
설인의 피는 백색이었다. 허연 우윳빛 피가 허공에 뿌려지면서 또 다른 설인이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런 가운데 합라의 지시가 이어졌다.
“밧줄로 설인의 다리를 묶어라!”
말을 타면서 포박술에도 익숙한 탈린군 답게 정신없는 설인에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는 휙휙 밧줄을 돌려 다리를 낚아챘다. 신속히 여러 명이 힘을 합쳐 끌어당겼다.
얼마 못 가서 설인의 엄청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밧줄을 따라 저 멀리 처박혔지만 잠시의 지체를 우사르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잠시 멈칫하던 설인의 다리를 탈력감 있게 찍어버리고는 이미 균형을 잃고 넘어진 다른 설인의 옆구리를 재차 장작을 패듯 썰어버리며 쉴 새 없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전투 불능이 된 설인은 개미 떼가 모여 잘근잘근 분해하듯 탈린군 병사들이 근거리에서 둘러싸고는 상처 난 곳에 집요하게 쇠뇌와 도끼 투척 등을 가하면서 차근차근 약화시켜 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설인들은 설원의 하얀 눈의 일부가 된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
탈린군은 이후에도 바람의 성과 독화의 정원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동안 탈린군은 절반에 이르는 병력이 사상자로 이탈했고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오던 청록거인인 야차의 손에 의해 부상자는 여지없이 사라졌다.
“학! 학!”
뜨거운 모래사막을 걷고 있는 탈린군은 피부와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입술이 메마르고 모래가 씹히는 가운데 저 모래톱 너머에 푸른 물이 있는 야자수 그늘이 보였다.
“와아아아!”
탈린군은 자신들도 모르게 환호와 솟는 기력을 느끼면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갔다.
첨벙!
서로가 옷을 벗고 물을 꿀꺽꿀꺽 마시며 타는 갈증을 해소했다.
합라는 전방에서 용케도 아직 살아 있는 카루가 가져온 물주머니를 받아서는 한동안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민한, 얼마나 더 가야 할까요?”
“글쎄.”
합라는 물주머니의 남은 물로 뜨거워진 머리에 부었다.
얼굴을 씻어내고는 잠시 허공을 이리저리 주시하며 뜻 모를 눈빛을 보였다.
“한 식경 정도는 여기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움직인다.”
“알겠습니다.”
별다른 대답이 없자 찌푸린 얼굴로 돌아온 카루는 부하들에게 알리고는 그늘진 야자수 아래서 잠시 눈을 붙였다.
쿠쿠쿠쿠쿵!
모처럼 한가한 휴식에 그동안의 고된 피로를 풀고 있던 오아시스 근방에서 지축을 흔드는 소리가 짜증과 의구심을 불렸다.
“뭐지?”
“땅에서 울리는 것 같은데?”
“시발! 또 괴상한 괴물이야?”
카아아아앙!
탈린군 병사들이 대형을 짜기도 전에 지렁이 같은 형상에 엄청난 굵기와 길이의 붉은 피부에다 앞에는 그냥 커다란 구멍 둘레에 날카로운 이빨만이 있는 괴생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헉! 저거 우리 사막에서 보이던 데···스웸 아냐? 저게 왜···?”
북부의 탈린 사막 쪽에 서식하는 데스웸은 엄청난 방어력과 포식력에다 땅속에서 기민하게 움직이기에 여간 공격이 쉽지 않은 최상위 포식자였다.
데스웸의 그림자만 봐도 탈린군도 도망가기 바쁘다 보니 다들 얼굴에 공포가 짙게 물들었다.
그런 가운데 우사르는 이미 온몸에 검은 갑옷을 두르고는 탈린군 진영 앞으로 쭉 나가 데스웸을 노려보았다.
‘강하다!’
우사르 역시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눈이 없지만 저 둥근 아가리가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일촉즉발의 상황.
데스웸이 순식간에 땅속으로 파고들어 탈린군 진영으로 쇄도했다.
우사르의 바로 코앞에서 치솟을 때였다. 우사르 역시 대부월에 강력한 주술의 마력을 담아서 튀어나오는 데스웸의 옆구리를 치려고 비틀어 비껴 서려고 할 때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마력의 투기에 오싹함을 느끼고는 장단지와 대퇴부에서 주술의 문신이 짙은 검은빛으로 물들자 십여 미터를 고속으로 이동하고는 다시 후퇴를 거듭했다.
“후퇴해!”
콰아아아아앙!
땅에서 막 튀어나오려던 데스웸의 정수리와 몸통이 검붉은 거대한 혈기의 창에 그대로 강타당했다.
그 충격파로 인해 모래 먼지가 용오름처럼 솟아올랐다가 잠잠해지자 주위의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쿵!
운석에 충돌한 것 같은 수십 미터의 거대한 크레이터가 드러났다.
- 작가의말
월요일이 힘들긴 하네요.
다들 새로운 한 주 잘 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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