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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뇨
그림/삽화
니나뇨
작품등록일 :
2024.10.28 21:05
최근연재일 :
2024.11.21 23:00
연재수 :
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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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0.2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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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2화

DUMMY

“형제들이여!”


맹수의 포효가 그러하듯.

안드레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자 저마다 무리를 지어 떠들어대기 바쁘던 광장에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


잠시 뜸을 들이며 사람들의 시선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될 때까지 거만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알렉세이는 ‘정말 안드레이 답다. 그치?’라며 이반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러대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무작정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선 저렇게 오만한 태도로 깔보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세상에서 본인이 제일 잘났고, 제일 강하다고 생각하는 안드레이다운 모습이었다.


“형제들이여.”


한참을 침묵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던 안드레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며 쿵- 하고 발을 내려찍었다.


“보이는가! 보았는가! 이 많은 식량들을! 이 많은 금붙이들을!”


[와아아아아!]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사람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질렀다.


“그래. 모두가 알다시피 이 모든 것들이 내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고작 스물도 안 되는 전사들이. 고작 하루 동안 약탈한 결과물이지. 그렇다면 형제들이여! 더 많은 전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질 수 있겠는가!”


[와아아아아!]


다시 한번 함성이 터져 나오자 안드레이는 그 열기에 취한 듯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단상을 이리저리 오가며 함성을 유도했다.


“신났네. 신났어.”


알렉세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 신이 날만 하잖아. 저만큼이나 큰 수확을 가져왔는데.”


말하며 이반은 단상 아래 쌓인 약탈품들을 바라보았다. 안드레이의 말대로 저것이 고작 하루 동안 약탈한 성과물이라면 대체 내지는 얼마나 부유한 땅일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글쎄에~ 고작 저런 것 때문에 저리 신난 것 같지는 않은데?”


알렉세이의 의미심장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드레이가 손을 뻗으며 사람들을 진정시키곤 푸짐한 약탈품으로 인해 한껏 달아올랐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겨울이 머지않았네. 형제들이여. 오, 겨울! 고요한 죽음의 계절이여! 이번엔 또 얼마나 많은 형제들을 데려갈는지.”


슬픈 표정을 지어 보인 안드레이가 솥뚜껑만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저 얼굴에, 저 몸집을 가지고선 저렇게까지 처량해 보일 수 있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이봐, 그래도 이번에 정탐을 나갔던 곳이 그렇게 비옥하다며? 그럼 그곳을 거하게 한번 약탈한다면 올해는 좀 덜 죽어 나가지 않겠나?”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게 이 땅에 얽매인 우리네들의 운명이니.”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드문드문 위로인지 체념인지 모를 말들이 튀어나왔다.


그러자 안드레이는 이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성난 표정으로 목청을 높였다.


“그것이 우리의 운명인가! 굶주림에! 추위에 죽어가는 것이! 그것이 진정 우리의 운명이란 말인가!”


안드레이의 몸에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목격한 이반은 두 눈을 부릅떴다.


처음에는 김이 피어오르는 것인가 했다. 하지만 이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추운 날씨와 높은 체온에서 흐르는 땀이 만나 피어오르는 김은 수분이 증발하는 것이기에 흰색이었다.


그러나 저것은 선명한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하여 이반은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하여 두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바라보았지만 붉은 아지랑이는 여전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라면···”

이반이 놀라거나 말거나, 안드레이는 움켜쥔 주먹을 하늘을 향해 치켜들며 소리쳤다.


“나는 그 운명을 거부할 것이다! 운명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존을! 우리들만의 낙원을! 반드시 이 손에 쥐고야 말 것이다! 설령 그것이 초원을 하나로 뭉쳐야만 가능한 일이라 해도!”


[와아아아아!]


사람들이 함성을 터뜨리고, 이반이 부릅뜬 두 눈으로 안드레이의 몸에서 피어나는 붉은 아지랑이를 지켜보는 가운데 알렉세이의 얼굴에는 선명한 분노가 떠 올랐다.


“뭘 하려나 했더니만···”


이를 악문 알렉세이가 불쑥- 손을 뻗어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반의 뒷덜미를 낚아채더니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광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




알렉세이에게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이반의 얼굴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안드레이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붉은 아지랑이. 그것은 절대 평범하지 않은 것이었다.


‘혹시 오러일까? 오러! 기사들이 쓴다는 소드마스터의 상징! 아냐. 오러까진 아닐 거야. 뭐, 오러가 아님 어때. 그건 분명 마나로 이루어진 무언가일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선명한 붉은 빛을 내뿜진 못하겠지. 흐흐흐. 역시 이 세상은 판타지 세상이 맞았어. 그래. 하늘에 달이 두 개나 떠 있는데 판타지 세상이 아닐 리가 없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제외한다면 이 세상이 판타지 세상임을 그다지 실감하지 못했다. 물론 전생에서 고블린 같은 몬스터를 만난 적은 있지만, 그것도 판타지 세상에 내던져졌을 당시 만났던 것이 전부였고 이후엔 이종족은 커녕 몬스터의 그림자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판타지 세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과 이종족. 둘 모두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이반은 이 세상이 자신이 알던 판타지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마나와 관련된 단서를 두 눈으로 목격했으니 이반의 가슴이 북을 치듯 거세게 두근거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일단 최대한 몸을 만들어서 이 거지 같은 동네부터 벗어나자. 그 뒤에 돈을 벌면서 마법사를 찾는 거야. 돈이 얼마가 들지는 모르겠지만 간단한 마법 정도는 배울 수 있을지도 몰라. 그 뒤엔···’


잔뜩 흥분한 이반은 신이 나서 앞으로의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나갔다. 그러던 중 머리에 큰 충격이 느껴져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치켜드니 거기엔 이반의 머리를 때린 것으로 추정되는 주먹이 있었다.


“뭐야, 알렉시. 갑자기 왜 때···”


자신을 때린 것에 항의하려던 이반은 이내 알렉세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것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우리 이반. 뭐가 그리도 신나니?”


평소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도. 눈이 돌아갔을 때 나오는 사나운 얼굴도 아닌 저렇게 한껏 일그러진 얼굴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반은 이 정신 나간 형이 대체 무엇 때문에 이리도 화가 난 것인지 고민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에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알렉시. 대체 뭣 때문에 그리 화난 거야?”


“무엇 때문이냐고? 오. 이반. 순진한 이반. 내 동생아.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니?”


이반의 물음에 알렉세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반의 멱살을 잡아채더니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반. 넌 안드레이가 저렇게 사람들을 선동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응? 단순히 약탈품을 자랑하려고? 아니면 내지 약탈에 사람들의 호응을 끌어내려고?”


“뭐···”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안드레이가 멍청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변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소 그가 사람들을 이끄는 방식은 압도적인 무력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로 사람들이 절로 따르도록 하는 것이지 광장에서 그랬듯이 언변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방식은 아니었다.


“너도 뭔가 이상한 것 같지? 그럼 왜 그랬을까? 자랑? 자랑을 할 거였다면 약탈품을 분배하는 걸로도 충분했어. 호응? 어차피 저만한 약탈품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부족민들이 먼저 내지 약탈을 나가자고 졸라댔겠지.”


“그럼 알렉시는 뭣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추김.”


“누가 안드레이를 부추겼다고? 누가? 뭣 때문에?”


“뻔하잖니. 블라디미르. 그 빌어먹을 들개 놈이 안드레이의 옆구리를 쑤셨겠지.”


“블라디미르가? 블라디미르가 왜? 요즘 흩어진 부족민들을 찾으러 다닌다고 이리저리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다지 않았어?”


블라디미르.

이반이 속한 흰 사슴 부족의 동맹이었던 붉은 늑대 부족의 후계자로 적대 부족의 습격에 부족이 멸망하고, 노예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던 와중 흰 사슴 부족의 전 족장이 그를 구해준 이후로 흰 사슴 부족에 합류한 안드레이의 의형제였다.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부족민들을 되찾는 일은 진작 끝났고 요즘은 재건한 부족의 덩치를 부풀리기에 열중하는 중이란다.”


“그래서. 그거랑 블라디미르가 드미트리를 부추기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건데? 아니, 그전에 블라디미르가 부추긴 게 확실한 거야?”


이반의 물음에 알렉세이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이반. 내가 누차 이야기했지만 이 혹독한 초원에서 살아남으려면 누구보다 영악해야 한다니까. 생각이란 걸 하란 말이야. 드미트리의 능력으로 방금 광장에서 본 것처럼 언변으로 사람들을 휘어잡는 게 가당키나 하니?”


“그건 아니지.”


“그래. 그러면 누군가 옆에서 지도해 줬을 게 뻔한데 드미트리의 측근 중에 저런 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지. 그게 누구니?”


“···블라디미르.”


“정답. 그럼 질문 하나 더. 초원의 부족들이 세력을 부풀리는 방법은?”


“···전쟁과 약탈?”


“그리고 요즘 드미트리가 집중하는 일 하나 있잖니? 그건 뭐였지?”


“···초원 부족 통합. 아니, 잠깐만. 방금 광장에서 한 연설이 내지 약탈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 초원 부족 통합 전쟁을 위한 사전 준비란 말이야? 그리고 블라디미르는 제 부족을 키우기 위해서 드미트리를 부추겼고?”


이반의 물음에 알렉세이는 ‘그래도 네가 아주 멍청하지는 않구나?’하는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게 알렉시가 화난 거랑 무슨 상관인데? 블라디미르가 옆에서 부추겼건, 아니 건 어차피 드미트리는 부족을 키워서 전쟁을 벌였을 거잖아. 블라디미르는 옆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면서 부족을 키워나갔을 거고. 굳이 블라디미르의 잘못을 지적해 보자면 사전 준비 작업을 좀 빠르게 진행 시킨 것 말곤···”


말을 하던 이반은 순간 깨달았다. 알렉세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를.


블라디미르가 드미트리를 부추겨 초원 통합 전쟁의 사전 준비 작업을 앞당긴 것은. 그것이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부족의 운명을 지을 중요한 문제에 대해 블라디미르가 영향력을 뻗친 것에 있었다. 이는 국가로 치면 엄연한 내정간섭이었다.


(아무리 블라디미르가 흰 사슴 부족과 인연이 깊고, 족장인 드미트리와 의형제라곤 해도 그는 엄연히 타 부족의 족장이었다.)


“그래서 어쩌려고?”


일의 심각성을 깨달은 이반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알렉세이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답했다.


“어쩌긴 뭘 어쩌니? 드미트리 성격에 옆에서 뭐라고 한다고 듣기나 하겠니?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어휴. 열받아. 안 되겠다. 피를 좀 봐야겠어. 이반. 따라오렴.”


“응? 어디 가려고?”


“말했잖니. 피를 좀 봐야겠다고.”


알렉세이가 성큼성큼 앞장서 걸어갔고 이반은 순순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알렉세이가 당장 제 머리를 몸에서 분리해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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