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두두두두 ̄
말을 타고 달리는 와중 이반은 자신의 무장 상태를 점검했다. 알렉세이의 재촉 탓에 갑옷은 챙겨입지 못했고 무기라곤 오른손에 쥔 창 한 자루가 전부였다.
‘차라리 활을 챙길 걸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었다. 전생에서도 활은 몇 번 쏴 보지 못한데다 이렇게 말을 탄 상태에서 활을 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에 반해 창은 전생에서도 주로 사용하던 무기였으니 이반의 나약한 몸뚱이로도 어찌저찌 쓸 수는 있었다.
다만 이것에도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기병에게 창이란 일회용 무기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활이나 창으로 주무장을 챙기면 부무장으로 검이나 둔기 같은 것을 챙기는 것이 정석인데···’
어쩌겠는가. 이미 일은 벌어진 것을.
‘내가 직접 싸우는 일은 없길 바라는 수밖에.’
그렇게 걱정이 차오르는 것을 애써 억누른 이반은 말을 재촉하여 앞서 나가던 알렉세이와 말머리를 나란히 했다.
“알렉시. 어디로 가는 거야?”
“아 참! 우리 이반은 마을을 벗어난 적이 이번이 처음이지? 외워두렴. 지금 가는 길이 우리 부족의 사냥터로 가는 길이란다.”
“우리 부족의 사냥터? 그런 것도 있었어?”
이반은 의아했다. 초원인들에게 땅이란 잠시 머무르는 곳일 뿐 특정한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특정 부족의 사냥터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한데 알렉세이가 이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우리 부족의 사냥터를 운운하니 이반으로서는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얘는. 사냥터를 우리 부족만 사용하면 그게 우리 사냥터지 달리 뭐가 우리 사냥터겠니?”
“···? 우리만 사용한다고? 혹시 사냥터가 여러 군데 있는 거야?”
“얘가 자꾸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한 장소에 사냥터가 여러 군데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잖니.”
“그런데 뭘 자꾸 우리 사냥터···”
순간 이반의 머릿속에 소름 끼치는 가설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다 죽인 거야?”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반이 조심스레 묻자 알렉세이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엄. 한 숲에 포식자가 여럿일 순 없잖니?”
이런 미친. 이반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이 동네가 살기 팍팍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비정하다곤 해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몇이야?”
“응? 뭐가 말이니?”
“우리 부족이 독차지하려 할 정도면 사냥터가 어지간히 큰가 본데 그 정도면 고작 한두 부족이 같이 쓰고 있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대체 몇 부족이나 지워버린 거야?”
“글쎄···자잘한 부족까진 세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대충 기억나는 곳만 열 곳은 넘었었지 아마?”
아무렇지 않게 답하는 알렉세이의 모습을 보던 이반은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생의 이반은 수많은 위험을 마주했고, 때문에 종종 생사를 넘나들곤 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거나 혹은 직접 사람을 죽이는 과정도 자주 겪었으며 대규모 병사들이 맞부딪치는 전장도 여러 번 경험했었다.
그렇기에 사람이 여럿 죽는 것 정도로는 이반의 정신에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초원인들의 잔혹한 습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 이반. 얼굴이 새하얀데 어디 아프니?”
“···아냐. 그냥 오랜만에 말을 타서 그래.”
“흐응~ 정말 그것 때문이니?”
알렉세이의 샛노란 눈동자가 이반을 빤히 응시했다. 마치 속내를 파헤치는 듯한 시선에 이반은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그렇다니까. 아, 뭘 그렇게 자꾸 노려봐. 앞을 봐. 앞을.”
“뭐, 우리 막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린 알렉세이가 말을 재촉하며 앞으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이반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결심했다.
몸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는 대로 이 빌어먹을 야만의 땅에서 벗어나겠다고.
...
흰 사슴 부족의 거주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땅.
지평선 너머로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숲이 이반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산지가 아닌 평지에 위치한 드넓은 숲의 풍경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의 장관을 연출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장엄한 광경에 이반은 저도 모르게 ‘이 정도면 독차지하려들 만 하네.’하고 중얼거렸다.
“마음에 드나 보네?”
“여기 숲 말이야. 혹시 이름이 있어?”
“있지? 부족의 노인네들은 여길 늑대의 숲이라고 부르더라. 내가 보기엔 사슴의 숲이 더 어울리는데 말이야.”
“사슴의 숲? 여기에 사슴이 그렇게 많아?”
“많지. 아직 겨울이 오기 전이니까 운이 좋으면 볼 수도 있겠네. 족히 수천 마리는 되어 보이는 사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걸 보면 너도 당장 그 속으로 뛰어들어 정신없이 피를 보고 싶어질걸?”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알렉세이가 어깨를 들썩들썩 거렸다. 사슴 떼가 이동하는 장관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이 피라니. 참 알렉세이답다고 생각한 이반은 얕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늑대의 숲을 바라보았다. 봐도 봐도 참 멋지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 이게 판타지지.’
이제야 판타지 세계에 첫발을 내디뎠다는 생각에 이반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반. 우리 심심한데 내기나 할까?”
“내기? 갑자기?”
“갑자기는 무슨. 사냥터에 왔는데 내기가 빠지면 되겠니? 사냥감 숫자로 내기를 하기엔 우리 이반이 불리하니까···그래. 누가 더 큰 사냥감을 잡는지로 내기하자. 시간은 해가 지기 직전까지로. 어때?”
“그래도 내가 불리한 것 같은데···”
“어머, 자신 없니?”
“당연히 없지! 내 몸을 봐. 이 몸으로 사냥이 가당키나 해?”
이반이 뼈만 앙상한 제 팔뚝을 휘휘- 내저어 보이며 투덜거리자 알렉세이가 허리춤의 곡도를 뽑아 이반의 목을 툭-툭- 두드렸다.
“우리 이반···아직 훈련이 부족한가 보구나? 내가 누차 말했지? 사냥에서 중요한 건 육체가 아니라 기술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훈련도 시켜줬는데···정말 자신이 없니?”
알렉세이의 살벌한 협박에 이반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내기를 받아들였다. 만약 거절했다간 그 후환을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하자. 해. 됐지?”
“좋아.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알렉세이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반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젓곤 반대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
두두두두─
울창한 숲속을 내달리는 한 필의 말.
그리고 그 앞에는 털갈이 중이었는지 흰색과 갈색이 뒤섞인 얼룩덜룩한 털의 토끼가 좌우로 재빠르게 방향을 전환해 가며 도망치고 있었다.
“후읍···후우···”
토끼를 쫓아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대는 탓에 몸이 이리 휘청, 저리 휘청거렸지만, 이반의 두 눈 만큼은 도망치는 토끼에게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기회는 한 번뿐.
결정적인 순간에, 토끼가 이동할 방향을 한발 먼저 예측하여, 가능한 모든 힘을 쥐어 짜내 창을 내질러야 했다.
“스읍···”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본능이 외치는 이상적인 타이밍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토끼가 달리는 경로 앞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이대로라면 좌측과 우측. 두 방향 중 한 곳으로 몸을 틀 수밖에 없었다.
확률은 2분의 1.
토끼를 쫓으며 파악한 패턴을 바탕으로 토끼가 도망칠 방향을 예측한 이반은 토끼가 방향을 전환하려는 낌새를 보인 순간 예상 경로를 향해 거침없이 창을 내질렀다.
푸욱─!
온 힘을 다해 창을 내지른 탓에 창날이 땅에 꽂혔다. 숙련된 기병이라면야 단숨에 창을 뽑아냈겠지만, 현재 이반의 몸으론 다시금 창을 회수하기란 불가능했다.
괜히 창을 붙잡고 있어봤자 달리는 말에서 떨어질 확률이 높았다. 하여 이반은 미련 없이 창을 놓았고 그와 동시에 말이 나무 기둥을 스치듯 지나치며 나아갔다.
“워···워워.”
재빠르게 말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을 멈춰 세운 이반은 말머리를 돌려 창이 꽂힌 곳을 향해 돌아갔다. 창을 내질렀을 때 손끝에 감각이 제법 묵직했기에 이반은 내심 기대를 했다.
“에이씨. 놓쳤네.”
하지만 막상 도착하니 땅에 꽂힌 창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쉬움에 창을 뽑으며 주변을 둘러본 이반은 창이 꽂혔던 곳 근처에서 붉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스읍. 스치긴 했나 보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이반은 고민했다. 이대로 핏자국을 따라가 볼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은 짧았고 이반은 토끼를 포기하기로 했다.
말 위에서 핏자국을 따라가기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니 추격을 하려면 말에서 내리는 수밖에는 없는데 현재 이반의 몸 상태로 말에 타지 않은 채 숲속을 거니는 것은 몹시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끄응. 역시 창으로 뭘 잡으려면 사냥감의 덩치가 있는 편이 좋겠어.”
제법 자주 마주치는 사냥감은 토끼이지만 발견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방금도 그랬듯 추격전도 추격전이고 무엇보다 표적이 작은 탓에 정확히 맞추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찾기는 좀 어려워도 덩치가 큰 사냥감을 목표로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일단 좀 돌아다녀 볼까?”
그렇게 얼마간을 헤매었을까.
저 멀리 도망치는 사슴을 발견한 이반은 곧장 말을 재촉하며 뒤를 쫓았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탓인지 도망치는 사슴의 속도는 몹시도 빨랐지만 체감상 토끼보단 느린 것 같았다.
그렇게 숲을 배경으로 한차례 추격전을 벌인 끝에 점차 사슴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고 창이 맞닿을 거리까지 접근하자 망설임 없이 창을 내질렀다.
푸욱─!
순식간에 사슴의 왼 다리를 찌르고 빠지는 창. 갑작스레 한쪽 다리에서 힘이 풀린 탓인지 사슴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땅바닥을 뒹굴었고 이반은 그런 사슴의 목덜미에 정확히 창을 꽂아 넣었다.
푸욱─!
창을 쥔 손에 부르르- 거리는 진동이 느껴졌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사슴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이반은 사슴의 목에서 창을 뽑아내곤 말에서 뛰어내렸다.
“이야. 근데 이걸 어떻게 옮긴담.”
가장 먼저 떠오른 방법은 사슴을 말 위에 얹는 방법이었는데 여기엔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사슴의 덩치가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쫓을 땐 몰랐지만 잡고 보니 이반보단 훨씬 크고 말 보단 조금 작은 크기였다. 이반 혼자선 이걸 말 위에 얹을 수도 없고 얹는다고 해도 말이 버텨낼지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어찌한담···”
잠시 고민하던 이반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사슴을 밧줄에 묶은 후 안장과 연결하여 질질 끌고 가기로.
“가죽이 좀 상하긴 하겠지만···아. 몰라.”
좀 상한다고 못 쓸 정도는 아닐 것이라 판단 한 이반은 챙겨온 밧줄을 안장에 묶은 후 반대쪽은 사슴의 허리를 휙휙 감아 묶었다.
그렇게 이동할 준비를 끝마친 이반은 말 위에 올라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의 위치를 보니 약속 시간까진 제법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만약 알렉세이였다면 다른 사냥감을 찾아 움직였겠지만 이반은 그럴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원해서 한 내기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사냥감을 잡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내기에서 이기건 지건 이젠 더 이상 알렉세이의 뒷감당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인지 긴장이 탁- 하고 풀렸다.
그 탓인지 몸이 물먹은 솜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몹시도 무거웠다.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씻고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 이반은 조심스레 말을 몰아 숲의 입구를 향해 이동했다.
...
도착한 이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렉세이는 아직 사냥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알렉세이가 잡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과 멧돼지 몇 마리가 한 곳에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야. 그새 많이도 잡았네.”
알렉세이가 잡아 둔 사냥감에 비한다면 이반의 성적은 사슴 한 마리뿐인지라 몹시도 초라했지만 그렇다고 다시 사냥을 나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내기는 누가 더 많이 잡냐가 아닌 누가 더 큰 사냥감을 잡냐였으니 한 마리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렉세이의 잔소리가 있긴 하겠지만 크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 오려나···”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알렉세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이반은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끼곤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휙휙 돌려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딱히 눈에 띌 만한 것은 없었다.
“뭐지?”
뒷머리를 긁적거린 이반이 다시금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부스럭─
아주 작게 들리는 인기척.
이에 이반이 재빠르게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릉─
은빛에 가까운 새하얀 털이 몹시도 아름다운.
거대한 몸집의 늑대가 그곳에 있었다.
“다이어 울프···”
초원의 가장 위대한 사냥꾼.
달과 사냥의 여신 루아테르의 전령.
온갖 수식어를 가진 초원의 최상위 포식자가 이반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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