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도적들의 습격이 있을 당시.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싸움을 해본 적이 없던 로렌초는 재빠르게 마차 아래로 도망쳤다.
상황을 지켜보다 상단 측이 이길 것 같으면 남아있고, 질 것 같으면 마차에 연결된 줄을 끊고 말을 타고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비겁하지만, 생존 측면에선 현명한 판단이었다.
그렇게 마차 아래로 숨어든 로렌초는 전투의 향방을 주시하였고 슬슬 도적 측으로 승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도망칠 준비를 시작했다.
품 안에 숨겨둔 단도를 칼집에서 꺼내 마차와 연결된 줄을 끊기 위해 슥삭슥삭- 칼날로 줄을 긁어대었다.
줄은 상당히 굵었고, 로렌초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언제 전투가 끝날지 모르기에 로렌초의 마음은 다급했다.
“빨리. 빨리.”
팔뚝이 터질 것처럼 욱신거렸으나 로렌초는 이를 악물고 견뎌내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 없다는 집념이 그 결실을 보려던 순간이었다.
“기, 기사다아아!”
처절한 비명과 함께 싸우는 소리가 멎어 들었다. 이에 로렌초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치켜든 순간. 중무장한 기사 하나가 단숨에 도적 셋을 창으로 꿰뚫는 광경이 로렌초의 두 눈 가득 틀어박혔다.
“진짜 기사네···”
로렌초가 무심코 중얼거리는 사이에도 기사는 말을 몰아 두 명의 도적을 들이박았고, 말에 치인 두 도적은 허공을 나는가 싶더니 땅바닥에 고꾸라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도적들을 해치운 기사는 도적들의 대장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이리저리 꼬아대기 시작했다.
대체 저 기사가 뭘 하나 싶었던 로렌초는 도망쳐야 한단 생각도 잊고서 멍하니 기사를 응시했다.
...
‘음. 실패했네.’
바실리사의 비전 주술인 로실리스의 불꽃으로 도적 대장을 단숨에 태워버려 적들의 전의를 꺾어버릴 생각이었던 이반은 불꽃은커녕 손등이 화끈거리는 통증에 미간을 움찔거렸다.
‘현실에서는 처음이긴 했어도 분명 제물은 부족하지 않았는데 왜 실패한 거지?’
주술 발동에 실패한 이유에 대해 고민하던 이반은 건틀릿을 낀 손에 시선이 갔다. 아무래도 이것 때문에 수인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단 저것들부터 정리하고 생각해야겠다.’
다음부턴 수인을 맺을 때 손에 뭘 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이반은 남은 잡념들을 날려버리며 고삐를 휘둘렀다.
히이잉─
신호에 맞춰 말이 달려 나가고, 이반은 창대를 겨드랑이에 끼고 단단히 고정했다.
표적은 너무 놀란 탓인지, 아니면 공포에 질린 탓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가 손쉬운 먹잇감이 되길 자처한 덕분에 이반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단숨에 표적의 몸을 창으로 꿰뚫었다.
푸욱─
표적. 도적 대장의 몸을 꿰뚫은 창을 몸을 지렛대 삼아 살짝 들어 올린 이반은 허리를 비틀며 창을 휘둘렀다. 창에 꿰뚫린 몸이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며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일이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탓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들의 대장을 구할 생각이 없었던지. 멍하니 지켜보던 도적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쓰러진 순간 인질들을 내버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흩어져! 뭉치면 더 쉽게 당한다!”
“아니야! 뭉쳐야 사는 거야! 날 믿어! 내가 참전 병사인가 다들 알지? 말 탄 것들은 보병이 뭉치면 힘을 못써! 날 믿고 빨리 뭉쳐!”
흩어져 도망치던 도적들은 한 녀석이 강하게 주장하자 다시 뭉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빤히 지켜보던 이반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저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기병이 강력한 이유는 인간보다 훨씬 큰 생명체가 정면에서 달려드는 것에서 나오는 위압감과 육중한 덩치와 빠른 속도가 어우러져 발생하는 충격력. 이 두 가지에 있었다.
저 말마따나 보병들이 밀집하여 방진을 이루고 정면에서 대응한다면 기병은 큰 힘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다만, 그러고도 전열의 희생은 불가피하며 기병이 전열을 깎아내리고, 후퇴하고, 다시 돌격하여 전열을 깎아내리는 짓을 반복한다면 결국 방진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뭉치자는 주장은 나름 합당한 판단이었다. 저렇게 등 돌리고 도망치지 않았다면 말이다.
밀집한 보병이 위협적인 것은 보병을 장애물처럼 만들어 기병의 속도를 강제로 끌어 낮추는 것에 있는데 저렇게 등 돌려 도망치면 밀집 대형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되려 어서 빨리 자신들을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꼴이었다.
흩어지면 일일이 쫓아가 죽여야 하니 운이 좋다면 한 둘쯤 도망칠 수 있겠으나, 뭉쳐서 도망간다면 하나씩 천천히 잡아먹으면 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야. 내지인들은 도적놈들도 친절하네. 인질들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으면 귀찮았을 텐데.”
말 위에서 자세를 잡은 이반은 말을 몰아 도망치는 도적들을 추격했다. 이제부턴 즐거운 사냥 시간이었다.
...
한바탕 사냥을 끝마친 이반은 야영지로 돌아가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손등에 난 화상이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살집을 키운 덕인가?’
단순히 그렇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 격하게 몸을 움직였는데도 근육통 하나 없이 몸이 가뿐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근육이 상당량 상승한 것으로 보였다.
‘핏줄이 남다른 건가?’
안드레이의 근육질 몸을 생각하면 그런 것 같기도 했지만, 또 알렉세이의 호리호리한 몸집을 생각하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니지. 알렉세이가 그 호리호리한 몸으로 잘만 싸우는 걸 보면 근육도 상당하단 뜻이니까···’
물론, 이반이 살집을 키우는 동안 별다른 운동을 병행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핏줄 덕이라고 하기엔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에이.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따로 운동 안 해도 근육이 발달하는 특이 체질일 수도 있는 거고.’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이반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흠···”
야영지에 도착한 이반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고 살아남은 이들은 엎드린 것도, 당당히 서 있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이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새 또 제법 죽었네.’
도적들이 인질을 잡을 당시만 해도 스물 좀 넘게 살아있던 것으로 기억했다. 한데 돌아오니 살아있는 이는 열 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반이 짐작하기로 도적들이 도망치는 와중에 불필요한 충돌이 있었거나 아니면 도적들이 얼떨결에 죽이고 도망친 보였다.
‘근데, 대화가 통하려나?’
문득, 초원인과 내지인들의 언어 체계가 다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곧 도적 대장과 짧지만 대화를 주고받았던 기억을 떠올리곤 언어 체계가 동일하거나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랑 대화를···음. 저 사람이 좋겠다.’
언어 문제가 해결되자 이반은 누구와 대화를 나눠야 할지를 두고 고민하였고, 이내 살집이 투실한 사내를 발견하고 그를 선택했다.
경험상 저렇게 살집 있는 사람들이 신분이나 지위가 높은 경우가 잦았기 때문이었다.
“흠흠.”
말을 몰아 사내에게 다가간 이반은 잠시 목을 가다듬을 겸 헛기침을 두어번 했다. 그러자 사내가 바닥에 납작 몸을 엎드리며 말했다.
“나, 나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평소 말투로 질문을 건네려던 이반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기사?’
그러고 보니 자신의 복장이 기사와 다를 것이 하나 없었다. 순간 이반은 기왕 이렇게 된 것 기사로 사칭하고 다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기사는 작위는 없으나 귀족 취급을 받는 일종의 준 귀족이었고, 이 말은 기사를 사칭하는 것은 곧 귀족을 사칭한다는 것과 같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알 게 뭐야?’
이반이 생각하기에 기사의 본분은 잘 싸우는 것이고, 이것만 지킨다면 사칭이 탄로 날 일은 없을 듯싶었다.
특히, 앞으로 세상을 돌아다녀야 함에 있어 기사라는 위장 신분은 이반에게 큰 편의와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 분명했다.
들킬 위험이 낮고 도움이 되는 일인데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을 것 같았다.
“으흠. 네가 이 무리의 책임자인가?”
이반이 전생에서 먼발치에서나 만났던 기사의 말투를 흉내 내었다. 다행히 어색하진 않은지 사내가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전 단순한 동행인일 뿐 책임자는 따로 있습니다.”
“그러한가? 그러면 그 책임자는 어디 있는가?”
“그것이···”
사내가 말끝을 흐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쯤이면 상단의 책임자가 나서야 하는데 나서지 않아 그런 듯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어딘가를 빤히 응시하던 사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무래도 죽은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 되었군. 그러면 다음 책임자는?”
“마찬가지입니다. 남은 이들은···”
재차 주위를 둘러본 사내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단에 고용된 인부들만 남았네요.”
“그렇다면 결국 자네와 대화를 나누는 수밖에는 없겠군.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로렌초. 로렌초라고 합니다. 기사님.”
“좋네. 로렌초. 그럼 이제 어찌해야겠는가?”
“···예?”
사내, 로렌초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이에 이반이 물었다.
“자네. 내 나이가 몇으로 보이나?”
“어···그게···”
이반의 물음에 로렌초는 이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무잡잡한 구릿빛 피부에 검은 머리칼, 황금빛 눈동자.
‘잘생기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자신의 첫사랑을 빼앗아 갔던 동네 양아치가 떠 오른 로렌초는 양아치네. 하고 중얼거리려는 자신의 입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양아치보다야 잘 생기긴 했다. 활동적인 인상의 잘생긴 미남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양아치 혹은 한량이란 단어가 자꾸만 떠 올랐다.
“그으···스물? 혹은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십니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간신히 억누른 로렌초가 답하자 이반은 속으로 자신이 그렇게 노안인가 싶었지만 제 나이대로 보이는 것보단 낫겠다 싶었다.
이반의 나이는 열다섯이고, 내지에서 열다섯이 성인으로 취급되는지 아이로 취급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맞네. 보다시피 내가 나이가 어린 탓에 부끄럽게도 영지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네.”
“아아···그래서···”
로렌초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크롤리베츠 가문의 기사님께서 이 먼 곳까진 무슨 일로···아앗! 아닙니다. 제가 기사님께 실례되는 말을 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로렌초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반은 혼자서 잘 논다 싶었지만 이내, 로렌초가 자신을 크롤리베츠 가문의 기사라고 착각한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들었다.
“자네. 내가 크롤리베츠 가문 출신인 것은 어찌 알았나?”
“예? 그게···그, 기사님께서 걸치고 계신 하프 케이프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 그렇다고 제가 샹뤼달 왕국의 가문 문장들을 전부 아는 것은 아니고 크롤리베츠 남작령이 제가 가려던 곳이어서 외우고 있었습니다. 네.”
로렌초의 말에 이반은 힐끗- 자신의 어깨에 걸친 하프 케이프를 바라보았다. 붉은 천 위에 포효하는 늑대가 금색 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그렇군. 한데 크롤리베츠에는 무슨 일로 방문하려 했는가?”
말하면서 이반은 생각했다.
크롤리베츠 남작령은 초원인들의 침공에 생존자는커녕 사람의 흔적마저 싹 다 지워진 상황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크롤리베츠 가문 출신임을 내세워도 크롤리베츠 가문과 알고 지내던 이들이 아니라면 사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크롤리베츠 가문 출신임을 주장한다면 자신의 위장 신분에 신빙성을 더해줄 테니 더할 나위 없기도 했다.
“들으셨는지 모르겠으나 조만간 불라타의 독립 전쟁이 시작된단 소문을 듣고 식량을 좀 구해보려 했습니다. 상인들에게 전쟁은 큰 기회이고, 저 같은 행상인이 거기에 발이라도 걸치려면 식량 같은 흔한 물품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수밖에는 없으니 말입니다.”
로렌초의 말에 이반은 눈앞의 사내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란 소문을 듣고 기회를 잡기 위해 행동하는 과감성과 적극성도 그렇고,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을 구분하여 틈새시장을 공략하려는 관찰력과 눈치도 마음에 들었다.
“음. 자네에게 안타까운 소식이네만···크롤리베츠 남작령은 사라졌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며칠 전, 초원인. 그러니까, 야만족들의 침공이 있었네. 크롤리베츠 남작님을 비롯해 영지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분전해 보았지만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 몰살당했다네.”
말하면서 이반은 최대한 분하다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를 썼다. 이제부터 크롤리베츠 가문 출신의 기사라는 위장 신분을 내세워야 하니 당연히 해야만 하는 연극이었다.
“아아···그런···”
로렌초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반은 그런 로렌초에게 살며시 제안했다.
“그래서 말이네만. 자네, 나와 함께하지 않겠나?”
이반의 제안에 로렌초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보다시피 여기엔 주인 잃은 물건들과 그것들을 옮길 인부들이 있네. 또한, 물건을 처분할 상인과 보호해 줄 기사가 있지. 죽은 이들이야 안타깝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지요.”
맞장구치는 로렌초의 눈동자에 희망이 감돌기 시작했다.
“어떻게. 함께 하겠나?”
이반의 제안에 로렌초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숙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기사님!”
누가 보면 충성을 맹세하는 줄 알 정도로 로렌초의 태도는 깍듯했고, 재능있는 상인을 일시적으로나마 영입하게 된 이반은 만족스레 웃었다.
“나도 잘 부탁하네. 로렌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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