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이반의 생각대로 로렌초는 유능했다. 한순간에 고용주를 잃은 인부들에게 적절한 임금과 포상금을 제시하며 그들을 회유한 로렌초는 망가진 수레들을 모아 망가진 부품만 교체하는 식으로 응급조치를 하여 물자 이동 수단을 확보.
이후엔 물자의 가치를 신속하게 판별하여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은 물건들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가치 높은 물건들로만 수레를 채우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버려지게 된 물자만 해도 제법 값이 많이 나가는 터라 인부들이 자신들이 지고 갈 테니 가지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요청했지만 로렌초는 단호했다.
“자네들의 마음은 이해해. 나라고 왜 욕심이 나지 않겠나. 이게 다 돈 들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해야 하네. 피 냄새를 풍겼으니 곧 짐승들이 몰려올 걸세. 혹은 도적놈들의 잔당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멀어져야만 한단 말일세.”
인부들을 납득 시킨 로렌초는 인부들이 분류한 짐들을 수레에 싣기 시작하자 이반에게로 다가와 행선지에 대한 논의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기사님 말씀은 당분간 샹뤼달 왕국에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이 말씀이시지요?”
“그렇다네. 승패야 어찌 될지 모르지만,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은 왕국 전체가 초원···아니, 야만인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 분명하네. 그들은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하나같이 훌륭한 기수들이니까.”
“과연. 동쪽의 야만인들은 말에서 태어나 말로 살아간다더니. 실로 무시무시하군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예전에 들은 소문입니다만, 동쪽의 야만인 중에는 말과 교배하여 태어난 말 인간이 존재한다던데 혹시 보셨습니까?”
순간 이반은 이놈이 초원인들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냐고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 글쎄···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런 소문이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들었네만.”
“아···그렇습니까. 아쉽네요.”
“···아쉽다고?”
이반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물론 초원의 동족들이 말을 제 자식이나 연인처럼 애지중지하긴 했지만 그건 말이 초원에서 필수적인 생존 수단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생겨난 문화였다.
물론, 몇몇 이상 성욕자가 말과 붙어먹는단 소문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런 놈들이야 초원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당장 이반의 전생만 하더라도 양이나, 닭 같은 가축과 붙어먹는 이상 성욕자가 버젓이 존재했는데 이곳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말과 인간이 교배해서 말 인간이 태어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뭐, 판타지 세상이라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반이 알기로 그런 존재가 탄생한 적은 없었다.
“혹시, 말 인간이 실존하면 잡아서 팔기라도 할 생각인가?”
이반의 물음에 로렌초가 세상 흉악한 말을 다 듣는단 표정으로 질겁했다.
“아니. 그게 무슨 무서운 말씀이십니까. 행여라도 그런 짓을 했다간 저기, 이스트 하이페리온에서 수인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서 저 하나 죽이자고 우르르 몰려들 텐데요.”
인간과 타 동물의 신체적 특징을 한 몸에 지닌 종족. 수인獸人. 이 가슴을 울리는 두 단어에 이반은 잔뜩 흥분하여 물었다.
“수인이라고 했지? 자네, 방금 분명히 수인이라고 말했지?”
“예. 그랬지요. 아, 동부에선 짐승 인간이라고 부르던가요? 그런데 이 짐승 인간이란 단어가 동부에선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동부 외의 지역들에선 일종의 종족 혐오 단어 같은 것이거든요. 특히나 이스트 하이페리온 같은 국가는 고대부터 수인들이 정권을 장악해온 국가라···”
로렌초가 앞으로는 짐승 인간이란 단어 자체를 잊고 사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주의를 주며 왜 그래야만 하는지 주절주절 떠들어 대었지만, 이반의 귀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수인이 실존한단 말이지? 그래. 주술도 있고, 신도 있고 하물며 이능력도 존재하는데 수인 같은 이종족이 없을 리가 없지.’
이종족이 실존한다니! 그들을 만날 수 있다니! 여행을 떠나길 잘했다며 스스로를 칭찬한 이반은 들뜨는 마음을 억누르며 슬며시 물었다.
“크흠. 그 수인족 말인데···”
이반이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냐고 물으려던 순간, 로렌초가 말 잘했다는 듯이 말했다.
“수인족! 그렇죠. 기왕 수인족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제가 불라타의 독립 전쟁이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었지요?”
“그, 그랬네만.”
“아시다시피 이스트 하이페리온에 합병된 이후 불라타 왕국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습니다만, 왕국의 영토였던 지역은 여전히 불라타로 불리고 있지요. 그만큼 정체성이 뚜렷한 곳이니 독립 전쟁을 벌인다는 소문은 사실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니 자네가 이 먼 곳까지 상행을 왔겠지. 이 이야길 다시금 꺼내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무례하게 들리실진 모르겠지만, 기사님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목표?”
“예. 가령 가문을 재건한다거나···”
로렌초가 힐끔- 이반의 눈치를 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 모습에 이반은 로렌초가 왜 갑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나 싶었다.
“글쎄···그것이 가능할까의 여부는 둘째치고 당장은 대륙을 여행해 볼 생각이었네만.”
“그러시면, 명성을 쌓는 것은 어떠십니까?”
“···명성?”
“예. 명성을 쌓으시면 여행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명성의 가장 큰 장점은 어딜 가시든, 무슨 일을 하시든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거든요. 후에라도 가문을 재건하시는 일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고요.”
훌륭한 제안이었다. 애당초 이반이 크롤리베츠 남작령의 기사라는 위장 신분을 내세우려던 이유도 어디 가서 억울한 처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전생의 경험상 신분 낮은 이는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이반은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고, 위장 신분에 명성까지 더해진다면 적어도 어딜 가든 홀대받지는 않을 것이었다.
‘여행의 목적 중 하나인 저주를 해결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시대를 불문하고 정보란 귀중한 자산이며, 가치란 희귀할수록 높아지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희귀한 정보. 즉, 중요한 정보는 높으신 분들이 독점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연줄이나 인맥 없이 이 높으신 분들과 접촉하기에 가장 손쉬운 방법은 명성을 쌓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게 무얼 제안하고 싶기에 이리도 뜸을 들이는 건가?”
“기사님만 괜찮으시다면 저 물건들을 처분한 후에 저와 함께 이스트 하이페리온으로 가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전쟁만큼 명성을 쌓기 쉬운 환경도 없으니 기사님께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만···”
말만 들었을 땐 서로 상부상조하잔 소리였다. 이반은 로렌초에게 안전을 보장하고, 로렌초는 이반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그런 상부상조 말이다.
하지만 이반이 보기에 로렌초가 숨겨둔 속내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약탈···아니, 주인 잃은 물자들을 처분하기 위해 동행하기로 했는데, 처분을 어디서 할지를 두고 나누던 대화가 어느샌가 명성을 쌓고, 전쟁터로 함께 가는 일로까지 변화했다.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가 진행되어 대화를 나누는 동안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렇게 제안을 받고 고민을 하고 있자니 의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확인해 봐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
일단 로렌초의 속내를 파악하기 전까진 확답을 해 주지 않기로 결정한 이반이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물자들을 처분할 때까지 동행하는 것이야 내가 제안한 일이니 그렇다 치세. 한데, 그보다 더 오래 함께하자니 의도가 궁금하긴 해.”
“내가 없었어도 전쟁터로 향했을 정도로 과감하고 적극적인 자네가 새삼 안전이 걱정되었을 리는 없고, 함께 하면 안전은 해결될지언정 동행 내내 눈치 보며 비위를 맞춰 줘야 할 수고를 자처하면서까지 애송이 기사 나리와 함께하려는 이유가 뭘까···”
로렌초의 속내에 대해 고민하던 이반은 문득, 수레에 짐을 다 싣고선 이쪽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인부들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니 답이 떠 오른 이반이 씨익- 웃었다.
“알겠군. 자네, 날 뒷배 삼아 전쟁 상인들 사이에 끼고 싶은 것이지?”
이반의 물음에 로렌초가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생각지도 않게 목돈이 생긴데다, 본인 하기에 따라 기사 나리를 뒷배로 삼을 수 있다면. 단순히 한 발 걸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전쟁 상인 중 한 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자네 같이 능력 있는 상인이 욕심내지 않을 리가 있나. 으하하핫.”
“나, 나리···잘못했습니다!”
이반이 정답을 맞춘 듯 로렌초가 황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상단주도 아니고 일개 행상인이 기사를 이용해 먹으려 했으니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반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로렌초가 이반을 속인 것도 아니고, 본인의 능력으로 상황을 유도한 것에 불과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이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이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그리고 상대를 속인 것은 로렌초가 아닌 기사라는 위장 신분을 내세운 이반이었다. 그러니 불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즐거웠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자신의 안목이 정확했음을 증명받았는데.
“뭘 이런 일로 엎드리고 그러나. 그만 일어나게.”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뭘 용서까지야. 자네가 날 속인 것도 아니고, 그저 내가 자네의 속내를 들춘 것뿐인데.”
“관대한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로렌초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났다.
“단. 다음부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게. 나름 재밌었긴 했네만, 재밌는 일도 자주하면 질리거든.”
이반의 말에 이것을 경고로 받아들인 것인지 로렌초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러면···제 제안은···?”
“받아들이지. 서로에게 나쁠 것 없는 제안이었으니.”
“감사합니다!”
로렌초는 자신이 좋은 기회를 잡았다며 기뻐했지만,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쪽은 이반이었다.
로렌초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기사란 신분은 사실 위장 신분이지만, 로렌초는 정말로 능력 있는 상인이었으니까.
...
아헨베르크 왕국, 샹뤼달 왕국, 공국 연합.
이 세 국가는 동부의 끝자락에 위치한 국가들로 대륙 최대의 식량 생산국이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겨울인 현재 이 세 국가만큼 식량이 풍족한 국가는 드물었다.
그러니 획득한 물자들을 제값 받고 처분하면서 동시에 식량을 대량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이 세 국가를 찾아가는 수밖에는 없는데 로렌초의 추천은 공국 연합이었다.
“솔직히 가장 좋은 방법은 샹뤼달 왕국에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만, 기사님께서 당장이라도 떠나는 것이 좋다 하셨으니 제외. 아헨베르크 왕국은 제일 북쪽에 있어서 거리가 좀 있는 데다, 워낙 외부인을 배척하는 동네라 인맥이나 연줄이 없으면 상거래가 힘든 동네이니 또 제외. 그러니 소거법에 따라 저희의 행선지는 남쪽에 자리한 공국 연합이 될 수밖에 없지요.”
“공국 연합이라. 그곳은 어떤 곳인가?”
“아. 그러고 보니 영지 밖은 처음이라고 하셨죠? 공국 연합은 트베니르, 올록토스, 이야치바, 누베니아. 이 네 개의 공국이 손을 잡아 탄생한 연합 국가로 흔히들 도적 연합이라 불리는 국가입니다.”
“도적···연합?”
심상찮은 명칭에 이반이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로렌초가 낄낄 웃으며 답했다.
“아하핫. 도적 연합이란 건 일종의···비유 같은 겁니다. 인신매매나 마약매매 같은 대륙에서라면 불법인 일들이 공국 연합에선 합법이거든요.”
“···그 말은 치안이 불안한 곳이란 말로 들리네만?”
“실제로 그렇긴 합니다. 제가 괜히 세 국가 중 샹뤼달로 행선지를 고른 것이 아니거든요. 누가 문명 세계의 변방 아니랄까 봐 샹뤼달 왕국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야만적이기 그지없는 국가들이거든요.”
“그런 곳으로 가도 괜찮은 건가?”
“뭐···저도 가고 싶진 않습니다만, 말씀드렸다시피 선택지가 거기뿐이라서요. 그렇다고 품목을 바꾸자니 지금쯤 전쟁 상인들이 싹 다 선점했을 테니 어쩔 수 없지요. 그리고 기사님이 계시니 어지간해선 괜찮을 겁니다.”
로렌초가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앞으로 함께할 사이인데, 이제부턴 이반이라고 부르게.”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로렌초가 씨익- 웃어 보였다.
“중부식으론 요한 경이시군요.”
“···요한?”
“예. 동부식으론 이반, 중부식으론 요한. 옛날에 유명했던 성자의 이름이죠. 자식들에게 성자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많이들 짓는 이름이기도 하죠.”
로렌초의 이야기에 이반은 여행 다니는 동안은 자신의 이름을 요한으로 바꾸는 것이 어떨지에 대해 고민했다. 이반은 아무래도 촌스러운 감이 없잖았으니 말이다.
“자넨 아는 것도 많군.”
“흐흐. 이래저래 돌아다니는 일이 잦다 보니 그만큼 귀동냥으로 듣는 이야기들도 많거든요.”
“요한. 요한이라···”
“이름을 바꾸시는 것도 나쁘진 않으실 겁니다. 이반이란 이름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동부에 대한 인식이 썩 좋은 편은 아니라서요.”
로렌초의 권유에 이반은 결정했다. 여행 동안은 요한이란 이름을 쓰기로. 어차피 동부식이냐. 중부식이냐의 차이만 있지,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이기에 결정은 쉬웠다. 더불어 좀 덜 촌스럽기도 했고 말이다.
‘위장 신분에, 가짜 이름이라. 흥미진진하네.’
새로운 이름에 적응이라도 하려는 듯 요한이란 두 글자를 중얼거리던 이반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물었다.
“그런데 우리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인가? 공국 연합은 네 공국이 연합한 국가라고 했잖나.”
이반, 아니. 요한의 물음에 로렌초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답했다.
“트베니르. 트베니르 공국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동부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이 있는 곳이거든요.”
그렇게 일행은 트베니르 공국으로 향하는 여행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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