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흔한 이야기였다.
시골 청년들이 큰돈을 벌어보겠단 꿈을 꾸며 용병 업계에 몸을 담고, 온갖 고생 끝에 한 사람 몫은 하는 용병으로 성장하게 되었지만, 불나방 같은 용병의 삶에 회의감을 느껴 고향으로 돌아온. 그렇게 돌아온 고향이 도적들에 의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그런 흔한 이야기였다.
“저희는 복수를 맹세했습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저희가 마을에서 사고만 치고 다니던 한량들이었지만···마을 사람들은, 그들은. 우리들의 가족이며, 친구였습니다.”
도적들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놈들은 대담하게도 도시 바로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복수에 눈이 먼 저희는 곧장 놈들을 습격했습니다. 멍청한 일이었지요. 상대의 전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복수심에 눈이 멀어 무작정 덤벼들었으니 결과야 뻔했습니다. 그날···많은 동료들을 잃었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지 한냐가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로렌초는 그런 한냐의 눈치를 보다 슬쩍-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또 끼어들어서 죄송한데요. 영주. 그러니까, 크레멘 남작에게 지원을 요청해 보진 않았나요? 도시 위치상 수운을 통한 세금이 적잖을 텐데 그걸 도적들이 차지하고 있으면 요청하지 않았어도 알아서 처리하려고 애를 썼을 텐데요?”
“···경비 대장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제가 도적 출신이라고 말씀드렸었지요? 도적 출신이 어떻게 경비 대장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설마, 영주도 한패인가요?”
“아닙니다.”
“그럼 왜···”
“전 영주를 비롯한 그 일가는 살해당했고, 현 영주는 도적 대장이 꽂아 넣은 전 영주의 먼 친척입니다. 한패가 아니라 도적 대장의 수하이지요.”
“으···흡!”
한냐의 충격적인 발언에 로렌초가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숨을 집어삼켰다.
“그러니까, 현재 크레멘은 그 도적 대장이라는 놈의 영지나 마찬가지란 소리로군? 주변 영주들은 이 꼴을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나? 한번 손을 뻗어 볼 만도 할 텐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요한이 대화에 끼어들며 묻자, 한냐가 코웃음을 쳤다.
“하! 그 욕심만 많고 무능하기 그지없는 놈들이요? 예. 그러긴 했습니다. 처음에 몇 번 시답잖은 명분으로 쳐들어오긴 하더군요. 그리곤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놈들 영지가 불타올랐지 뭡니까. 흐흐. 혹시 크레멘 영지 근처에서부터 유독 도적들과 마주치는 일이 잦아지지 않으셨습니까?”
“엇!”
로렌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한을 바라보았다. 기존에 계획했던 경로를 틀어 크레멘으로 향한 이유가 저것 때문이 아니던가.
“그 도적들도 그럼···”
“놈의 부하들이지요. 크레멘을 비롯해 인근 영지까지 죄다 놈의 영향권 안입니다. 덕분에 도적놈들만 살판났지요.”
“아이고. 도적놈들 피해서 배를 타러 왔더니 또 도적놈들이라니!”
로렌초가 자리에 주저앉아 한탄을 내뱉자, 한냐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놈들의 수법입니다. 규모가 작은 집단은 육지에 풀어 둔 도적들이 잡아먹게 두고, 일정 규모 이상의 집단은 크레멘에서 배를 타는 것이 안전하겠단 생각이 들도록 유도하여, 하류에 있는 본거지에서 해치우는. 아주 영악한 놈들이지요.”
“아니! 그러면 이대로 움직여도 되는 겁니까? 이 배의 전력으로 도적들의 검문을 뚫고 갈 수 있겠냐고요.”
로렌초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묻자 한냐가 눈을 감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규모가 크거나, 유명한 집단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은 가진 짐들을 모두 빼앗거나 심하면 사람들을 잡아 노예로 삼아버리는 놈들입니다. 이리 급하게 출발하게 되지만 않았어도, 미리 상황을 설명해 드리고 충분한 준비를 했겠습니다만···”
“아이고. 아이고. 망할 경비대장 놈 때문에 사자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게 생겼네. 아이고오.”
로렌초가 갑판을 손으로 두드리며, 경비대장을 욕했다. 로렌초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이쪽을 주시하는 요한을 번갈아 바라본 한냐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그때였다. 요한이 움직인 것은.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겨 다가오기 시작하자, 하소연하던 로렌초가 고개를 치켜들고 요한을 바라보았다.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심상찮은 분위기가 느껴져 로렌초가 황급히 뒤로 물러난 순간.
챙─
창날이 한냐의 목을 겨누었다.
“한냐 용병단의 사연. 크레멘 영지를 비롯한 그 일대의 정황. 그리고 우리 일행이 처한 현재 상황까지. 알려주는 건 좋네. 좋은데. 자네가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 이유. 한냐 용병단이 헐값의 의뢰금을 제안했던 이유에 대해선 언제 말해 줄 텐가? 내가 보기엔 그게 가장 중요한 정보 같은데.”
...
로렌초가 그놈이 사고 칠 줄 알았다고 말했던 것처럼, 경비 대장이 욕심을 부려 병사들을 이끌고 배로 향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는 직접 겪어봤기에 여기까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요한이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로렌초와 한냐, 두 사람과 함께 항구로 향할 때부터였다.
분명 한냐가 말하길 경비 대장은 스무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왔다고 했다. 그리고 다툼이 커져 싸움으로 번졌다고 이야기했다. 이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항구로 향하는 내내 거리가 조용한 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병사 스물과 용병 열 명이 맞부딪쳤다. 이는 자연스레 큰 소란으로 번질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싸우는 소리 때문만이 아니라, 싸움이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따라 경비 대장 측에서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요한이 항구로 향하는 동안 어땠는가? 무척이나 조용했다.
이는 한냐 용병단이 경비 대장 측을 실력으로 압도하여 스무 명의 병사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고 단숨에 제거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면접 당시, 요한이 직접 손을 섞어 본 결과 한냐 용병단의 실력이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상한 점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로렌초.”
요한의 부름에 눈동자만 데굴데굴 굴려 가며 요한과 한냐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렌초가 황급히 대답했다.
“예, 예! 요한 경!”
“자네 혹시. 경비대장이나 경비병들의 시신을 본 적 있나?”
“어···없는 것 같습니다.”
“그럼, 부두나 배에서 전투의 흔적을 본 적은?”
“그것도···없네요. 어!?”
“이상하지 않나? 스무 명이나 되는 병사와 부딪쳤는데 시신도, 전투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판단했을 때, 한냐는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요한에게로 달려왔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을 보고하고 요한과 함께 항구로 향했을 터.
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일이었고 그 짧은 시간 동안 전투의 흔적을 말끔히 지운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이 이 정도로 벌어졌으면 전투의 흔적을 지우는 일 보단 떠날 준비를 하며 혹시 모를 적의 지원을 경계하고 있어야 함이 옳기 때문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지. 스물이나 되는 병사들과 부딪쳤다면, 필연적으로 사망자든, 부상자든 사상자가 발생했어야 했는데 한냐 단장이 이것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던가?”
만약 사상자가 발생했다면, 시시콜콜한 사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사상자에 대해 보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냐는 사상자에 대해 한마디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사상자가 없단 뜻인데,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마지막으로 항구 관리인. 암만 뇌물을 먹였어도 너무 순순하게 통과시켜준 것 같지 않던가?”
다른 곳도 아니고, 항구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그렇다면 항구 관리인이 아무리 게으른 사람이라도 소란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고, 그가 탐욕스럽다 한들 소란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확인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한데, 항구 관리인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혹은 소란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듯이 뇌물을 받고 배를 출항시켜주었다.
이 모든 의심이 해소되려면 한 가지 전제만 바꾸면 되는 일이었다. 바로.
“애당초 경비 대장이 배에 찾아온 일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이 모든 의문이 해결되지.”
도시가 조용했던 것도.
전투의 흔적이 없던 것도.
사상자가 없는 것도.
항구 관리인이 너무 순순히 보내준 것도.
전투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경비 대장이 병사들을 이끌고 찾아온 적이 없었다면. 그렇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물론, 이것이 요한의 과대망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번 싹틔운 의심은 해결하지 않는다면 마음을 좀먹을 뿐이었다. 그러니 지금 기회가 있을 때. 돌이킬 수 있을 때. 의심을 모두 털어내는 것이 옳았다.
“이제 슬슬 답해주지 않겠나? 대체 어디까지가 거짓이고,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그리고 자네의 목적이 무엇인지.”
한냐의 목에 바짝 들이 밀어진 창날에 붉은 핏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여기서 요한이 조금만 힘을 준다면, 창날은 그대로 한냐의 목을 파고들 터였다. 그러나 한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요한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확신하십니까?”
“만약 이것이 내 망상에 불과하다면 정중히 사과하겠네. 하지만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참으로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아닌가. 그러니 이참에 털고 가세. 장시간 함께해야 할 사이인데 서로 믿지는 못해도 최소한 뒤통수는 맞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어야지 않겠나.”
요한의 흔들림 없는 태도에 한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 좋습니다. 일단···짐작하신 대로 경비 대장 건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쿠웅─
배가 무언가와 충돌한 듯, 굉음과 함께 거칠게 흔들렸다. 덕분에 갑판은 난장판이 되었다. 요한은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으며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그러는 사이, 배가 한 쪽 측면으로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더니 일정한 각도에 이르자 멈추었다.
갑판을 미끄럼 타듯 미끄러져 배의 난간을 발판 삼아 선 요한은 저 멀리서 배를 향해 달려오는 횃불을 발견하곤 헛웃음을 지었다.
“하. 이 새끼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요한이 한냐의 명줄을 끊어버리기 위해 그를 찾았지만, 한냐는 이미 제 동료들과 함께 배에서 뛰어내려 다가오는 횃불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
“아이고, 이게 무슨 난리람.”
운 좋게도 배에서 떨어져 내리지 않고, 난간에 엎어져 있던 로렌초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앓는 소리를 냈다.
“로렌초.”
“요한 경?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랍니까?”
“짐작일 뿐이지만, 한냐. 그놈이 배를 도적들의 본거지인 섬에 들이박은 듯하네.”
요한의 말에 로렌초가 화들짝 놀라더니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예!? 그럼, 큰일 아닙니까? 아이고, 배가 이래서 도망칠 수도 없고···이를 어쩐답니까?”
“···어쩔 수 없지. 선택지가 없으니 일단은 한냐의 의도대로 놀아나는 수밖에.”
“싸우시게요?”
“자넨 인부들이 괜찮은지 확인하고 배에 숨어있게. 싸움이 꽤나 거칠 것 같으니.”
로렌초에게 지시를 내린 요한이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첨벙─
맨바닥이 아니라 충격은 적었으며, 수심이 깊지 않아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휘적- 휘적- 물을 가르며 맨땅에 도착한 요한은 엄지와 검지를 입에 넣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레아가 요한을 향해 달려왔다.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원체 건강한 덕분인지 레아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고, 요한은 레아의 위에 올라탔다.
푸르르르─
레아가 뭔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거칠게 휘저으며 투레질을 했다.
“그래. 너도 지금 상황이 짜증 나지? 나도 그래. 그래도 좀만 참자.”
요한은 레아의 목을 토닥이며 전장을 주시했다. 도적들은 경계병들만 몰려온 듯 숫자가 적었고, 한냐 용병단에 의해 빠른 속도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초전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적의 본대가 몰려온다면 한냐 용병단이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한냐 용병단에게 다른 숨겨둔 수단이 없는 이상에야 내가 손 놓고 방관한다면 그렇게 일이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그렇게 되면 결국 나 혼자서 도적들을 상대해야 할 테지.’
그런 상황은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그러니, 한냐가 자신을 속인 것에 대한 분노는 잠시 잊어야 했다. 요한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냐가 날 자신들의 전력에 포함한 것인지 아닌지가 문제인데···’
만약 포함하지 않았다면 다행이었다. 이는 한냐 용병단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일을 벌인 것이 아닌 이상에야 자신들의 전력만으로도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테니까.
문제는 포함했을 경우였다. 요한이 자신들의 적으로 돌아서는 변수를 감수하면서까지 끌어들일 만큼 변수를 요구하는 상황이란 뜻이었다.
‘일단···포함했을 경우를 가정하고 움직여야겠지.’
상황을 낙관하다가 괜히 일이 잘못되어 손도 쓰지 못할 상황에 이르는 것보다야,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어떻게든 이기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요한은 말을 몰아 물가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도적들의 약점은 결속력이 약하다는 점이지.’
상황이 조금만 불리해지면 쉽게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이 도적들의 습성이었다. 그러니 요한이 할 수 있는 최상의 변수 창출은 정해져 있었다.
‘적의 대장을 잡는 것.’
도적 무리의 대장.
놈을 잡기 위해 요한이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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