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으아아아악!”
요한이 비명을 내지르며, 튀어 오르듯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줄줄 흐르고, 입고 있는 옷 역시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허억···허억···대체 뭐였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요한은 차근차근 기억을 더듬었다.
콜차크가 배들을 회수한 후, 셀렘브리아를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이후, 요한은 못다 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고 잠에 빠져들었는데···
“꿈을 꾸었지. 그래. 맞아. 꿈을 꾸긴 했는데···”
자신이 타인이 되는 꿈을 꾸었더랬다.
“한냐. 맞아. 분명 날 한냐라고 불렀어.”
꿈속의 아비란 작자가 자신을 한냐라 불렀던 것을 기억해낸 요한은 깨달았다. 자신이 꾼 꿈이 한냐의 일생이었음을.
단순히 악몽이라고 치부하기엔 꿈의 내용도, 꿈속에서 느꼈던 감정도 여전히 생생했다.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고민하던 요한은 문득, 이것이 혼병에 영혼들을 집어넣음으로써 발생한 일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바실리사라면 답을 알고 있을 거야.”
요한이 짐가방을 뒤져 주술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주술서 위에 손을 올리곤, 가상 공간으로 진입했다.
...
체감상 오랜만에 가상 공간에 방문했지만, 그 풍경은 여전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으며, 주변은 들풀이 무성히 자란 새파란 초원이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바실리사.”
요한이 바실리사를 부르자, 허공에서 불꽃이 타오르는가 싶더니 불타는 듯한 진한 붉은 머리칼에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꼬마. 안색이 좋지 않은데? 무슨 일 있었니?”
바실리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꿈을 꿨어요.”
“꿈? 혹시 악몽이라도 꾸었니?”
“악몽···어떻게 보면 악몽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혼병의 파수꾼 삼았던 영혼, 기억해요?”
“아. 그 동글동글한 얼굴의?”
“네. 한냐라는 녀석인데, 제가 녀석이 되어선 녀석의 삶을 사는 꿈을 꾸었어요. 그런데···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 기억이,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너무 생생한 거예요. 혹시 이게···”
“그 한냐라는 녀석을 파수꾼으로 삼은 것과 관련이 있느냐?”
“네. 바실리사라면 이유를 알 것 같아서요.”
요한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던 바실리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의자 두 개와 테이블이 나타났다.
의자에 앉은 바실리사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잔을 요한 쪽으로 밀었다. 그러자, 잔 속에 검은 액체가 차오르더니, 찰랑거리며 물결쳤다.
“일단, 마시렴.”
바실리사의 말에 요한이 의자에 앉으며 잔 속에 담긴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액체는 따듯하면서도 달콤했다. 몹시 익숙한 맛이었다.
“코코아···?”
“좀 진정이 되는 것 같니?”
바실리사의 물음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따듯하고 단 것이 위장에 들어가니 절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파수꾼 녀석의 영향이 맞아. 혼병에 수집한 영혼들과 다르게 파수꾼처럼 네가 복속시킨 영혼들은 네 영혼과 연결이 되거든? 그 탓에 놈들의 영향을 받기 쉬워져서 네가 겪은 것처럼 악몽을 꾸는 일이 종종 발생하곤 해. 이게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네 정신이 쇠약해지게 되고 끝내는 너 자신을 잃게 되지. 그래서 강령술이 위험한 것이란다.”
“그런 위험성이 있다면 진작 경고해 주셨어야죠!”
요한이 항의하자 바실리사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했다.
“악몽을 몇 번 꾸는 정도로는 별문제 없어. 그냥 기분만 뒤숭숭해질 뿐이지. 그리고 악몽을 꾸는 것이 꼭 나쁜 일인 것도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요한의 물음에 바실리사가 검지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정신력, 저항력, 정신 방벽. 표현이야 제각각이지만 이것이 약해지는 순간은 보통 네가 잠들 때나, 의식을 잃었을 때처럼 네가 무의식 상태에 빠졌을 때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추상적인 능력을 무의식 상태에서도 유지할 수 있을까?”
“···주술을 이용해서?”
“그것도 한 방법이긴 한데, 본질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어.”
“음···반복된 경험. 아니, 훈련을 통해서?”
요한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말하자, 바실리사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정답이야. 추상적이든 아니든. 무언가를 배우는 것엔 반복 훈련만 한 것이 없지. 그렇다면 어떻게 훈련을 해야 할까?”
“설마, 악몽을 꾸는 게 훈련법이에요?”
“그냥 악몽은 안되고 네가 복속시킨 영혼들에 의해 발생하는 악몽만 가능해.”
“그럼 그냥 이대로 지내야 하는 건가요?”
요한은 악몽에서 깨어났을 당시의 불쾌했던 기억이 떠올라 진절머리를 냈다.
“오. 그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말했잖니. 네게 복속시킨 영혼에 의해 꾸는 악몽이 반복되다 보면 조금씩 네 정신이 쇠약해지게 되고 끝내는 너 자신을 잃게 된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악몽을 꿔도 위험하고, 안 꾸면 훈련이 되질 않고. 뭐, 가상 공간은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여기서 악몽이라도 꿔야 하는 건가요?”
요한은 말을 내뱉고도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정답!’하고 기쁘게 외치는 바실리사가 수인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 잠···”
요한이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달라며, 애원하기도 전에 바실리사의 수인은 완성되었고, 곧 주술이 발동하며 요한의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기 시작했다.
“네가 복속시킨 영혼들과의 연결을 강화하는 주술과 수면에 드는 주술이란다. 악몽을 꾸지 않게 될 때까지 재워줄 테니 힘내보렴.”
희미해져 가는 의식 속.
바실리사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
“으아아악!”
요한이 비명을 내지르며, 악몽에서 깨어났다.
이번엔 하르쵸프라는 사내가 되는 꿈을 꾼 요한은 제발 이 빌어먹을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은 없냐고 물으려 했지만 바실리사는 가차 없었다.
“벌써 깼니? 잘 다녀오렴.”
어김없이 주술을 발동하자, 무어라 외치려던 요한이 픽- 하고 쓰러졌다.
잠든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실리사는 이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을 찾지 않았음에도 신의 흔적과 접촉하는 것을 보면 역시 넌, 별들이 속삭인 내 비망을 이뤄줄 존재라는 뜻이겠지.”
아직 요한이 알기엔 이르다고 판단하여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지만, 영혼을 오염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그 말인즉, 요한이 상대했던 흑기사 드락시스는 신에 의해 영혼이 오염되었다는 뜻이었다.
신의 기운을 느낀 바실리사는 무리를 해 가며 현실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었고, 아니나 다를까 드락시스의 본거지에는 신상神像을 모셔둔 간이 제단이 있었다.
요한에겐 부정한 것의 흔적이라며 얼버무렸지만, 사실 그것은 신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악신의 흔적.
“하필 처음 만나는 신의 흔적이 악신이라니. 운명의 잔혹함이란. 쯧.”
일전에 언급했듯이 신과의 계약은 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그 신을 믿음으로써 성립된다.
신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 이는 자신이 신을 인지하는 동시에 신 역시 자신을 인지한다는 위험성이 존재했다.
여기서, 신이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 왜 위험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서 언급했듯 신이란 기본적으로 필멸자들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위험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또다시 의문이 들 것이다.
호의란 사전적 의미로 친절한 마음씨 또는 좋게 생각하여 주는 마음을 뜻하니 신이 호의를 가져주면 좋은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말이다.
물론, 좋은 것은 맞다.
문제는 이 호의란 것이 베푸는 자와 받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선신들의 호의마저 때로는 시련으로 느껴질때가 많은데 하물며 악신들의 호의는 어떠하겠는가.
그들의 호의는 필멸자들의 입장에선 악의나 마찬가지였다.
요한에게 제대로 정보를 주지 않은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만약 네가 본격적으로 신을 찾아다니게 되면 어떠한 일을 겪게 될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가 됐을 때 현재와 비교해 능력이 크게 성장하지 않았다면, 요한은 제 목숨 하나 부지하는 것도 힘들 것이란 점이었다.
물론 그러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주술서가, 바실리사가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백귀야행 정도면 최소한 죽을 걱정은 없을 텐데 말이야.”
백귀야행百鬼夜行.
군집체를 이룬 영혼들이 짧은 순간이나마 신에 필적하는 힘을 발휘하게 하는 강력한 주술로, 이 주술을 발동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 혼병에 일백 마리의 원귀와 악귀를 모으는 것이었다.
“뭐, 당장은 세상을 여행하는 것에 정신이 팔린 것 같으니 기회가 생길 때마다 수집하고 다니면 신을 찾기 시작할 무렵엔 백귀야행을 완성할 수도 있겠지.”
수집하는 영혼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요한의 영혼에 가해지는 부담도 점점 커질 것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단 하나. 정신력을 기르는 것뿐이었다.
“내가 널 위해서 이렇게나 고심하는 것을 너는 알려나 모르겠네.”
잠든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실리사는 이번엔 깨어나는 것과 동시에 주술을 발동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언제라도 수인을 맺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요한이 보았다면 기겁하며 도망칠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악몽에 빠진 상태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
“으아아아악!”
야심한 어느 새벽.
물결치는 소리와 서늘한 바람 소리가 어울려 고요함을 노래해야만 하는 이 순간.
너무나도 처절한, 그래서 너무나도 소름 끼치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불침번을 서던 선원들은 몸을 흠칫 떨며 한 곳을 주시했고, 이는 새벽 일찍 일어난 콜차크와 로렌초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보시오, 로렌초. 요한 경께선 언제까지 방안에만 머무실 생각이신 거요?”
항해하는 동안 로렌초와 제법 친밀해진 콜차크가 친숙하게 말을 걸자,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요한이 들어가 있는 선장실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로렌초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스스로 밖으로 나오실 때까진 선장실 근처엔 얼씬도 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으니 그걸 따르는 수밖에요. 아. 그러고 보니 선원 몇이 또 선장실 근처를 기웃거렸다면서요?”
“그 머저리들? 말도 마시오. 무슨 귀신을 봤네, 어쨌네 호들갑을 떨면서 물로 뛰어들려는 것을 말리느라 선원 여럿이 다쳤소.”
요한이 선장실에 틀어박힌 이후.
간헐적으로 튀어나오는 비명과 함께 선원들 사이에선 기묘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밤이 찾아오면, 선장실 앞에 귀신들이 경비를 선다는 해괴한 소문이었다.
처음엔 미신에 취약한 뱃사람 특유의 허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귀신을 목격한 이들이 하나둘씩 늘어가고, 최근엔 발작까지 일으키는 놈들이 발생하니 헛소문으로만 치부하기엔 영 꺼림칙했다.
“지금까지야 말 안 듣는 멍청이들만 혼쭐이 났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냥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소. 사기 문제도 있고 또···”
“반란의 우려도 있고요?”
“···그렇소.”
배의 선원들은 요한에게 항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도적들이었다. 당장이야 요한이 보여주었던 압도적인 무용과 신비로운 마법 탓에 잠잠하지만, 이렇게 뒤숭숭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다른 마음을 먹는 녀석들이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는, 요한으로부터 선원들의 통제 임무를 부여받은 콜차크로서는 결코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내일이면 방에 들어가신 지 딱 열흘째지요? 그때까지만 기다려 보시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한번 여쭤보기라도 할 테니까요.”
“오! 그래 주시겠소? 정말 고맙소.”
“뭘요. 애초에 그걸 바라고 선원들의 사기를 거론하신 거잖아요?”
로렌초의 날카로운 지적에 콜차크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맘 같아서야 내가 직접 여쭤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항복한 지 얼마 안 된 입장에서 지시를 어기기가 어려워서 말이오. 그리고, 자고로 이런 일은 신뢰하는 측근이 맡아야 하는 일 아니겠소?”
“신뢰하는 측근이요? 제가요?”
“요한 경께서 영지를 벗어난 이후 처음 거둔 부하가 로렌초, 그대가 아니오? 그동안 함께한 시간과 겪은 일들이 있으니 요한 경께서도 은연중 로렌초 그대를 신뢰하는 측근으로 여기고 계시지 않으시겠소? 그러니, 지시를 그대 입을 통해 전달했겠지.”
콜차크가 은연중 아부하며, 로렌초의 기분을 띄워주려 했지만 로렌초는 회의적이었다.
“요한 경은 사람을 잘 믿지 않으십니다. 항상 주변을 의심하시죠. 그러니 신뢰하는 측근이란 표현은 틀렸습니다. 쓸모있는 동행인 정도라면 모를까요.”
“에이.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 아니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앞으로 요한 경을 한번 잘 관찰해보세요. 그럼 제 말에 동의하시게 될 테니까요.”
첫 만남에서 로렌초를 만났을 때도 그랬으며.
본인이 직접 면접을 보고 고용한 한냐 용병단을 대할 때도 그러했다.
그가 살아온 환경의 영향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요한의 행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는 사람을 잘 믿지 않았고 항상 의심하고 경계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선명히 드러내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것참···달갑지 않은 말이오. 까다로운 상관을 모시게 되었단 말이니.”
“대신 그만큼 능력이 있으신 분이잖아요. 무엇보다 자신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상을 아끼시지 않기도 하고요.”
“보상을 아끼지 않는다 라. 그나마 이건 좀 듣기 좋소.”
로렌초와 콜차크가 잡담을 주고받는 사이. 어느새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 해가 수평선 너머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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