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우, 머리야.”
요한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진짜 독하다 독해. 어휴.”
주위를 둘러본 요한은 자신이 현실 세계에 있음을 확인하곤 혀를 내둘렀다.
바실리사의 특훈이 시작된 이후로, 요한은 수백, 수천 번의 악몽을 겪었고 그 탓에 몇 번 정도는 죽음에 이르는 충격이 찾아오기까지 했다.
덕분에 잠시나마 그 지옥 같았던 가상 공간에서 탈출할 수 있긴 했지만, 바실리사는 탈주한 죄수를 쫓는 간수처럼 순식간에 요한을 가상 공간으로 잡아들였다.
지옥이 실존한다면, 바로 이곳이 지옥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가상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끔찍했고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를 특훈, 아니. 고문은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무렵. 바실리사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요한을 현실 세계로 쫓아내었고, 그게 바로 지금 이었다.
“대체 얼마나 들어가 있었던 거야···”
엄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지압하며, 선장실 문을 열어젖힌 요한은 따사로운 햇살이 마중해주자 눈살을 찌푸렸다.
“요한 경. 일어나셨습니까?”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로렌초가 재빠르게 다가와 인사말을 건넸다.
“로렌초로군. 내가 안에서 얼마나 있었나?”
“오늘로 딱 열흘째입니다.”
“···빌어먹게도 오래 틀어박혀 있었군.”
요한이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이를 듣지 못한 듯 로렌초가 의아하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요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닐세. 그동안 별일은 없었나?”
“작은 소란을 제외하면 따로 일은 없었습니다.”
“작은 소란?”
“문제까진 아니고, 말 그대로 작은 소란이었습니다만···”
로렌초가 힐끗- 요한의 눈치를 한번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요한 경께서 선장실에 들어가신 이후로 새벽마다 선장실 앞에 귀신들이 경비를 선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실제로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몇몇 생겼습니다. 그 탓에 선원들 분위기가 조금 뒤숭숭했습니다.”
로렌초의 이야기에 요한은 선장실 문틀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점 두 개가 문틀의 좌우에 하나씩 찍혀 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요한 자신이 가상 공간에 머무는 동안 선장실에 침입하는 사람이 발생할 경우를 대비해 설치한 주술이었다.
‘어쩐지. 주술을 알려줄 때 목소리에 장난끼가 가득하더라니···’
사람을 물리는 주술이라더니, 귀신이 경계를 서게 만드는 주술이었을 줄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던 요한은 바실리사의 장난에 고생했을 선원들에게 애도를 표했다.
“고생이 많았겠군.”
“고생이랄 것까지야 있나요. 그냥 분위기가 그랬던 것뿐인데요. 뭐···콜차크 선장은 맘고생을 조금 한 듯하지만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쪽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콜차크가 슬쩍 끼어들며 요한을 향해 경례했다.
“보고드리겠습니다. 저희 선단은 지난 10일간 무사 항해 중이며, 앞으로 3시간 후 헤르손에 정박하여 하루 동안 휴식 및 보급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혹시 궁금한 점 있으십니까?”
“그 헤르손이란 곳. 문제는 없겠나?”
“문제라 하심은···?”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해도 문제가 생기지 않겠냔 말일세.”
그동안 겪은 것들이 있다 보니 요한의 마음속 평가지에서 샹뤼달 왕국은 신뢰도가 0점을 넘어 마이너스에 도달한 상태였다.
당연히 샹뤼달 왕국의 영토에 속한 헤르손에서도 무언가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왜 그런 걱정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만, 크레멘은 극히 예외에 속한 경우입니다. 빈말로도 치안이 좋다고 하긴 그렇지만 그렇다고 샹뤼달 왕국 전역이 크레멘 같지는 않습니다.”
말하면서, 콜차크는 특히 헤르손에선 치안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자신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헤르손은 드네프르강의 끝자락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내해로 진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급받을 수 있는 거점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탓에 헤르손은 군사적 요충지에 해당하여 샹뤼달 왕국 해군이 상시 주둔 중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왕국에서 쳐들어오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치안 문제가 생길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콜차크의 주장이었다.
“그렇군.”
요한은 겉으로 수긍하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물론, 요한 본인도 이것이 과한 반응이라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샹뤼달 왕국의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는 이러한 태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믿지못할 동네였다. 샹뤼달 왕국은.
...
요한이 경계하건 말건, 선단은 헤르손의 항구에 정박하였고 항구 관리인과 경비대가 검문을 위해 찾아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갑판 위로 올라오는 그 일련의 행동은 헤르손이 군사적 요충지임을 간접적으로나마 증명해주고 있었다.
“헤르손에 방문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방문 목적과 체류 예정일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절도 있는 태도로 경례를 한 항구 관리인이 몹시도 딱딱한 어조로 묻자 로렌초가 나서며 답했다.
“보급을 위해 방문하였고, 내일 바로 출항할 예정입니다.”
“적재 중인 화물 중에 마약, 노예 같은 불법 취급 물이 있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문 중에 적발될 시 가중 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고지 드립니다.”
“없습니다.”
“좋습니다. 지금부터 검문을 시작하겠습니다.”
항구 관리인이 고갯짓하자, 경비병들이 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차례 검문이 끝나고, 나머지 코그선 3척에 대한 검문이 진행되었는데 다행히 별문제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코그선 3척 모두 이상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정박료는 금화 3개입니다.”
정박료가 제법 비싸긴 하지만 못 낼 정도는 아니었기에 로렌초는 흔쾌히 지불하였고, 그제야 딱딱하던 항구 관리인의 얼굴에도 한 줄기 여유가 맴돌았다.
“여기, 이 확인 증서를 잘 가지고 계시기 바랍니다. 출항시 한 번 더 검문이 있을 예정이니 숙지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잠시만요. 질문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처음과 달리 한결 부드러운 태도로 인사하는 항구 관리인을 로렌초가 붙잡으며 물었다. 이에 항구 관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하십시오.”
“혹시 이스트 하이페리온의 최근 정세에 대해 들려온 소문 같은 것은 없습니까?”
로렌초의 질문에 항구 관리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것이 왜 궁금하십니까?”
항구 관리인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담겨있자 로렌초가 두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변명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에 벌어지는 불라타 독립 전쟁에 전쟁 상인으로 참전해볼 생각인데, 계획이 틀어져서 식량을 확보하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스트 하이페리온의 최근 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냐에 따라 다른 물자를 구할지, 아니면 처음 계획대로 식량을 확보할지 고민 중이거든요.”
“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니 불라타 측에 물자를 공급할 계획이셨나 봅니다.”
항구 관리인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눈치가 빠른 로렌초는 그의 태도와 말에서 그가 불라타 측을 지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기야, 이스트 하이페리온이 주변국들에게 민폐를 끼쳐온 역사를 생각한다면 항구 관리인이 불라타를 지지하는 것이 썩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저 같은 일개 상인이 언제 또 이스트 하이페리온에 한 방 먹여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요. 전쟁이 길어질수록 곤란해지는 것은 짐승···실례. 이스트 하이페리온이니까요.”
방금 항구 관리인이 얼버무린 단어는 ‘짐승 제국’임이 분명했다. 짐승 제국이란 단어는 이스트 하이페리온을 혐오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멸칭이었다.
“질문에 답변을 드리자면, 최근 이스트 하이페리온 측에서 불라타 측에 보낼 협상단을 꾸리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최대한 전쟁을 피해 보겠단 판단 같은데 협상에 실패할 경우 곧장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더군요.”
“아. 시간이 촉박하단 뜻이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리고···흠. 식량을 구해볼 생각이 변하지 않으셨다면, 제가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항구 관리인이 양피지에 글을 끄적이는가 싶더니, 로렌초에게 건넸다.
“이걸 들고 ‘황금 밀’ 상점으로 가시면 어느 정도 식량을 확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오! 이렇게 친절하실 수가!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이거, 제가 너무 감사해서 그런데···”
로렌초가 슬쩍, 돈주머니를 건네려 하자 항구 관리인이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이런 것을 바라고 도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럼.”
짧게 묵례한 항구 관리인이 경비병들을 이끌고 떠나갔다.
...
“흐흥~”
항구 관리인이 준 ‘추천서’를 통해 좋은 가격에 다량의 식량을 확보한 이후, 로렌초는 연신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좋으시오?”
함께 걷던 콜차크가 불쑥- 묻자 로렌초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좋다마다요~ 기분 좀 맞춰 준 걸로 다량의 식량을 싼값에 구했는데 좋지 않을 수가 없죠~ 이 정도면 이스트 하이페리온이나 불라타가 아니라 셀렘브리아에 갖다 팔아도 그 차익이 제법 쏠쏠할걸요?”
“그 정도요?”
“그럼요. 이스트 하이페리온의 내전이 확실시 되고 있는 지금이 한창 물가가 뛸 때거든요. 병장기든, 식량이든. 전쟁과 관련된 물자는 값도 값이지만 확보하는 것도 힘들 시기인데···흐흐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로렌초가 배실배실- 웃어 대었다.
“그러면, 굳이 셀렘브리아로 갈 것 없이 곧장 이스트 하이페리온이나, 불라타로 향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
로렌초와 콜차크의 대화를 지켜보던 요한이 끼어들어 물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만, 용병을 구하려면 아무래도 셀렘브리아를 거쳐야 할 듯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소? 우리 애들만 해도 500명인데? 그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겠소?”
콜차크의 물음에 로렌초가 검지를 까딱- 까딱- 흔들며 반박했다.
“에이. 배를 운용하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할 예비 병력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숫자는 200명 정도잖아요. 물론, 요한 경의 실력이라면 공을 세우는 것에 문제는 없겠지만, 많은 병력을 이끌고 참전할수록 얻을 수 있는 기회의 횟수와 크기가 달라지니 추가로 용병을 고용해서 숫자를 늘려야지요.”
로렌초가 왜 셀렘브리아를 거쳐 가야 하는지에 대해 여러 이유를 들며 이야기하는데, 돌연 일단의 무리가 요한 일행의 앞을 막아섰다.
푸른 실로 달과 활이 수놓아져 있는 새하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는 그들은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루, 루아테르 교단!?”
로렌초가 이들의 정체를 알아보곤 깜짝 놀라 소리를 내지르자, 무리 중 한 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을 걸어왔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가냘픈 미성과 함께, 머리에 뒤집어쓴 로브가 뒤로 젖혀졌다.
하늘색 머리칼이 물결치듯 흘러내리고, 마찬가지로 하늘빛 눈동자가 요한을 빤히 응시했다.
...
요한은 여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는 그녀의 미모 때문이 아닌, 하늘색 머리칼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기다란 귀 때문이었다.
‘에, 엘프? 엘프 맞지?’
엘프는 드워프와 함께 판타지 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숲의 일족으로 이들의 특징으론 아름다운 외모와 인간보다 월등히 긴 수명 등이 있겠지만, 대표적인 특징 하나를 손꼽으라면 단연 뾰족하고 기다란 귀였다.
‘확실해. 엘프야. 진짜 엘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접하게 된 이종족의 등장에 요한은 넋을 놓고 눈앞의 엘프를 빤히 바라보았다.
“루아테르 교단의 이단심문관. 이자리스 하이벨이라고 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엘프, 이자리스의 물음에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이단심문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자리스가 작게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사제로 추정되는 이들이 요한 일행을 포위했다.
“히익!”
“당신들 뭐야!”
로렌초가 기겁하며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 콜차크는 재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사제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요한 일행을 향해 겨누었다.
한편, 눈앞의 엘프에 정신이 팔려있던 요한은 이 갑작스런 사태에 정신을 차리곤 이자리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요한의 날 선 태도에도 이자리스는 표정 변화 없이 요한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는데, 그 모습이 영혼 없는 인형을 보는듯했다. 한참의 대치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이자리스였다.
“말씀드렸다시피 이단심문 중입니다.”
“···이단? 내가 이단이란 말인가?”
요한의 물음에 이자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단이십니까?”
“나랑 지금 말장난하자는 건가?”
엘프고 뭐고 당장이라도 이자리스의 멱살을 잡을 것처럼 요한이 사납게 으르렁대는 순간이었다.
요한의 목덜미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 지나갔는데, 몹시도 서늘하여 마치 칼날이 목에 겨눠진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제가 당신을 이단이라 확정 지었습니까?”
이자리스가 한걸음 다가왔다. 동시에 요한의 목덜미에 맴돌던 바람이 한층 더 강해졌다. 이것이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닌 무언가 특별한 힘이 작용한 것임을 직감한 요한이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단심문이란 거. 오래 걸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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