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기원 I (1)

<신의 기원 I (1)>
맥문동의 보라빛은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효능이 있다. 집 주변 곳곳에 피어 있는 맥문동 꽃을 하나하나 찾으며 산책한다.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걷는 것도 정신 이완에 좋다. 재수가 좋으면, 흔들리는 밀밭 사이 사이에 스며든 야생의 토끼 귀를 찾을 수도 있다.
모두 일상과 떨어진 사소한 소일꺼리이다. 이런 것들에 집중하고 있으면, 항상 조여있던 마음의 끈이 한결 느슨해 진다.
기인 겨울 추위처럼 뭉쳐 있던 마음을 풀어버려야 한다. 그는 크게 심호흡하며 벌판으로 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피어 있는 맥문동 지역을 지나 눈 앞에 펼쳐진 밀밭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은은한 낱알과 입사귀 냄새. 행복이 스며드는 원초적인 느낌이다.
그가 코를 벌름거리다 습관적으로 뒷주머니를 만졌다.
'아차, 깜박 잊었다' 항상 뒷주머니에 찌르고 다니던 포켓 양주병, 힙 플라스크가 만져지지 않는다. 긴 한숨이 터져 나온다.
잔뜩 경직된 마음을 어루만지는데 알코올의 힘은 크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바람에 일렁이는 밀밭을 바라 보면서 '러셀 리저브 15' 를 홀짝이는 것. 그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고 사치인지, 요즘 들어 새삼 느끼고 있다.
알코올의 힘을 빌려 수만 가닥 거미줄에 꽁꽁 묶여 있던 자신의 마음을 이 들판에 자유롭게 풀어 놓고 싶었다.
요즘 들어 정신이 자꾸 오락가락 한다.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지만 이침의 비타민 알약처럼 자꾸만 일상을 건너뛴다. 지금 내 뒷주머니에 없는 알코올 문제는 잠시 잊기로 했다.
그 대신 춤추는 Dark Yellow 의 물결, 뒤로는 무리지어 있는 Violet 무리. 이것들을 눈 속에 가득 넣기로 했다.
자신의 몸에서 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씻고 또 씻어도 피냄내는 가시지 않는다. 머리 속에는 악마가 사는 것 같았다. 뇌를 꺼내 마구 빨래판에 문지르고 싶었다.
- 그건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다. 내 목숨을 살리기 위한 정당 방위였다. 동료의 죽음에 대한 합당한 복수 방법이었다.
아무리 이렇게 자위해도 소용 없었다. 당시의 상황이 머리 속에 들어간 파리처럼 계속 '윙윙'거리고 날아다녔다.
결론은 하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 집단 학살이다. 자기의 손으로 저지른 것이다.
시대와 인종을 달리하는 상대라 해도 자기가 홀로 코스트 집행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어떤 획기적인 계기가 없으면, 그는 일생을 이 악몽의 지옥 속을 헤매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는 모든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자기 혐오와 혼란 그리고, 세상에서의 도피. 무려 열두 달이 넘게 그런 세월을 보냈다.
그는 매일매일 그런 평화로운 전원의 광경을 대했다. 구름을 보고 익어가는 밀밭을 거닐었다. 보라색 맥문동 속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평화로운 전원 생활이 계속되자 약간의 차도는 있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성난 고슴도치 털처럼 곤두서 있던 신경이 차츰 안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갈구하던 마음의 안정이 조금은 온 듯했다.
* * *
콘라드 대령이 전원에 내려온 지도 거의 1 년이 다 되어간다. 지난 해, 그는 20 여 년 가까운 군 생활을 마치고 자원 예편했다.
복무 가능 기간도 한참 남았고, 진급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을 부리다시피 해서 군을 떠났다.
그의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어떤 기억이, 도저히 그가 군생활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가 누볐던 푸르른 하늘이 사라졌다. 그가 숨쉬던 넓은 세상도 사라졌다. 예전과 다르게 세상이 회색빛으로만 보였다.
모든 것이 허탈했다. 그가 믿고 있던 세상이 사라진 듯한 박탈감.
또 한 편으로는, 세상의 정점에 오롯이 서 있는 존재감도 찾아왔다. 이 두 가지가 마구 뒤섞이며 그를 현실 세계 밖으로 밀어냈다.
비행기 조종사였던 그는 더 이상 비행기를 띄울 수가 없었다. 비행기에 탑승만 하면,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의 직분을 다하지 못 하는 군인은 이미 군인이 아니다. 군에서도 그의 정신적 문제점을 인정하고 예편을 허락했다.
군에서 나오고 나서,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내려왔다. 맨 처음에는 주로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군에서 다져진 그의 강인한 정신력은, 그러한 자신의 방탕을 오래도록 용인하지 못했다.
이렇게 쓰러질 수는 없다. 그는 마인드의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 이건 일생 처음으로 찾아온 휴식의 시간이다. 어떤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런 귀한 시간을 자조와 후회로 물처럼 흘려 보낼 수는 없다.
그는 방탕을 접고 이 황금 시간을 적극 활용하려고 마음 먹었다.
우선은 자신의 피폐해진 정신을 다독이는 것부터 시작했다. 술을 줄이고, 자연에 대한 동화와 독서가 그 방법이었다.
그에게 급한 일은 마음과 정신의 안정이었다. 앞으로의 인생 진로에 대한 계획은 비틀거리는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나서의 일이다.
충격 그 자체였던 자신의 기억을 정화 시켜야 한다. 그 일환으로, 그는 주위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일몰이 주는 평화로움, 새벽 안개의 안온함, 일렁이는 밀밭에서 전해져오는 생명의 약동. 그는 이런 것들 속으로 매일매일 걸어 들어갔다.
과거가 없이 현재만 있는 사람처럼 그는 매 시간의 자신에 집중했다.
- 작가의말
새로운 에피소드 <신의 기원 I>을 재미있게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