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몸값 1

<인간의 몸값 1>
이제 소주 한 병에도 취한다. 몇 년 동안 노가다와 노숙으로 몸을 함부로 굴렸다. 이제 그 후유증이 슬슬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야외에서 자면 몸이 너무 축난다. 막노동 일이라도 있을 때는 만 오천원 짜리 쪽방에서 잔다. 오늘 같은 날이다.
공사판 함바집에서 밥을 사먹으며 하루 두 끼로 버틴다. 그러나, 아끼고 아껴도 노가다로 받는 일당으로는 돈 모을 틈이 없다.
몇 년 전 회사에서 짤렸다. 몇 가지 조그만 사업을 해봤으나, 3년도 안 되어 모두 들어먹었다. 내가 무능력해 지니 모두가 등을 돌린다.
친구 뿐만 아니라, 최후의 보루라 생각했던 마누라까지도 그랬다.
집에서 몇 개월을 무위도식 하다 결국 집을 나왔다. 모두의 눈초리가 가시 방석이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 전에는 집에 안 들어갈 작정이다.
기어이 소주 한 병을 더 깠다. 새우깡 안주로 먹는 소주는 취기가 더 오른다. 이제 내 나이도 50 대로 접어들었다.
벽은 회색빛이다. 겨우 다리 뻗을 이 방이 더 좁아보인다.
* * *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아무리 싸구려 쪽방이지만, 여기는 내 공간이다. 그 누구도 이렇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서는 안된다.
"누구시오?"
당황과 노여움이 반반 섞인 목소리로 무뢰한을 질타했다. 그자는 자기 방에 들어온 듯한 태도로 내 말은개방귀로 흘려버렸다.
들어선 자는 의자를 내 앞에 놓고 그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너무도 자연스럽다. 의자를 갖고 다니는 자는 처음 보았다.
이상한 얼굴이다. 서양인 같기도 하고, 동양인 같기도 한 얼굴이다.
가느다란 눈이 상큼 올라간 것을 보니 주로 머리를 쓰는 종류의 사람인 듯하다.
코는 뾰족하며 길다. 콧수염을 가느다랗게 길러, 양끝 부분이 하늘을 향하도록 배배 꼬아서 세워 놓았다.
그림에서 본 서양 귀족 같은 느낌이다.
입은 옷이 엄청 고급스럽다. 디자인도 특이하다. 함부로 볼 사람 은 아닌 듯하다. 말투를 고쳐 다시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나? 나는 벨리알 공작이라고 하네.
- 공작? 현대 사회에서 공작이라구? 여기가 중세 시대인 줄 아나?
미친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어떤 위엄 같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되뇌이다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 벨리알'? '허위와 사기의 귀공자', '숨겨진 뇌물과 암살의 마신' 이라고 알려져 있는 악마 벨리알?
나는 대학 때 전공이 사학이다. 지금은 전혀 써먹지 못하는 지식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사학도였다.
어떤 커리큘럼에서 고대의 악마에 대해 배운 기억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벨리알은 고대의 악마로써 '무가치한 자', '야비한 자', '악을이루는 자', '사악한 자'라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당대의 현학자 밀트온이 쓴 '낙원을 짓밟은 존재들' 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의하면, 벨리알은 고대 악마들 중에서도 가장 음란하고 사악하며, 폭력적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벨리알은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으며 간악한 지혜에 능하다고도 씌어져 있다.
이 자가 진짜 벨리알이라면, 나는 지금 전설의 악마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는 진짜 벨리알이다>
근거 없는 확신이 왔다. 자꾸만 쪼그라붙는 내 마음과, 그에게 경배하려는 내 세포가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자는 지상과 지하에 걸쳐 최상위 포식자다. 나 같은 것은 상대도 안 된다. 그는 왕처럼 내게 명령했다.
"아무 생각이나 해 봐라"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머리 속에 갑자기 위스키 '발렌타인 30 년'이 생각났다. 엊그제 리쿼 샵 앞을 지나가다 본 것이다.
예전 잘 나갈 때, 접대차 몇 번 마셔본 술이다. 어제 쇼윈도우를 들여다 보며 잠시 옛 생각을 했었다.
벨리알의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받았다.
- 아, 발렌타인 30 년.
그는 자신이 절대적 존재라는 것을 이것 하나로 단번에 증명했다.
그는 잔까지 꺼내 주었다. 공손히 두 손으로 한 잔을 부어 올리고, 나도 한 잔 마셨다.
"탄식의 냄새가 심하게 나서 들어와 봤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냄새지. 원하는 것을 말하라. 서로가 필요로 하는 것이 있으면 교환하자"
- 대박이다. 신이건 악마건 나를 이 수렁에서 건져줄 수만 있다면 내겐 구세주다.
뛸듯이 기뻤다. 이게 꿈일까? 신화 속 얘기가 내게 찾아 오다니. 이제 이 처참한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다.
- 그럼, 무엇을 원할까? 그래. 돈이다. 내가 부자로만 살 수 있으면 다른 것은 다 필요 없다. 나와 교환을 한다고? 그런데, 내가 갖고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벨리알의 말이 귓전에 들려왔다.
"네게는 아무 것도 없구나. 능력도, 의지도, 고고한 영혼도 없어. 그저 새빨간 몸뚱이 하나뿐이로구나. 그렇다면 내가 거래할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다"
그는 수술을 앞둔 의사가 내 몸을 살피듯 찬찬히 들여다 보다가 말을 이었다.
"네게 선택권을 준다. 네 몸에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내게 말하라. 내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너와 거래하마. 물론, 가격은 공정하게 지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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