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플레이어블 캐릭터
"기사단이다!! 정기 순찰 중 사악한 모험가들이 연약한 남성을 희롱하고 폭력을 가한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모두 무기를 내려..."
모험가 길드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판금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가장 먼저 들어와 투항할 것을 요구한 기사의 시선이 빅토르를, 정확히는 빅토르의 손에 들려 있는 야구 배트로 향했다.
"연약..한...? 남자...?"
이게 아닌데. 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난색을 표하는 기사. 예상외의 현장에 얼타고 있는 기사들을 보며 빅토르는 생각했다.
'좆됐다.'
지금 모습만 보면 마치 그가 아무 죄 없는 여성들에게 폭행을 휘두른 거 같지 않은가!! 사실은 다 정당방위(?)인 것을.
벽에 꽂아버린다던가 녹인 쇳물을 붓는다던가 여러 일이 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연약한(?) 남성을 상대로 여러 명이서 덤볐으니 정당방위인 것이다.
-철컹, 철컹, 철컹.
차가운 금속끼리 부딪쳐 나는 무거운 소리가 조용해진 모험가 길드에 퍼져나갔다.
그 무거운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전신을 무장한 한 명의 기사.
-쉬익...쉬이익...
그 기사의 투구에서는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보통의 기사들과는 겉에서부터 느껴지는 갑옷의 무게나 생김새부터 달랐기에 기사단의 직위에 대해 알지 못하는 그가 보기에도 강해 보였고, 그 소름 끼치는 숨소리와 존재만으로도 중압감을 주는 그 외형은 반항적인 기색을 보이는 모험가들을 투항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사단에서 좀 높은 사람인 건가? 뭐야. 분석 스킬로 방어력 측정이 안 된다고? 무슨 갑옷이길래..'
빅토르가 직위가 높아 보이는 기사의 무장 수준이라도 파악하기 위해 스킬을 써 보았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단장님! 모험가들은 전부 투항시켰습니다!! 그런데... 착오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끝을 흘리는 부하 기사의 말에 단장이라고 불린 기사가 투구를 쓴 육중한 머리를 갸우뚱 기울였다.
단장이라고 불리면서, 아니 그 전에 그렇게 무서운 투구를 쓰고서 그런 귀여운 몸짓하지 말라고...!
하키마스크를 쓴 살인마가 동요에 맞춰 율동을 추는 것을 보는 느낌이었다...!
'잠깐만, 단장? 단장이라고? 그러면 쟤가 기사단장이야? 게다가 저 육중한 장비까지..'
'형이, 아니 누나가 왜 거기서 나와?'
빅토르는 흔치 않게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게 그녀는..
'또 다른 플레이어블 캐릭이니까.'
그녀는 게임 [레전드 오브 마스터리]의 플레이어블 캐릭 8명 중 하나, 기사단장 캐릭터인 것이다.
'아니 뭐... 용사도 있으니까 다른 캐릭터들도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빅토르가 감회에 젖어 있는 동안 부하 기사는 기사단장이 뭐라 뭐라 작게 얘기하는 것을 듣더니 그에게 외쳤다.
"거기 붉은 머리 남성분! 보아하나 마나 사용자이신 것 같은데, 마나 사용 신고는 하셨습니까? 저희 단장님께서는 이 왕국 내에 있는 모든 마나 사용자의 얼굴을 외우고 계시지만 그쪽 분의 얼굴은 처음 뵙는다고 하시는군요."
마나 사용 신고? 그딴 걸 빅토르, 아니 한승리가 알 턱이 있나. 이 세계에 떨어진 지 한 달도 안 된 사람에게 그런 걸 물어 봤자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뇨. 한 적 없는 거 같습니다. 다만 고의는 아니었어요. 신청을 해야 하는 줄 몰랐습니다."
-세상에!! 비신고자라니!!생각보다 더 위험한 청년이었군 그래.
-그동안 저 마느냐로 강화된 육봉으로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정기를 빨아먹었을지!!
-인큐버스 킹께 그런 하찮은 인간들의 법률을 들이밀지 말아라!!!
'정기 안 빨아먹는다고 미친년들아. 그리고 마지막 년은 또 누구야?'
숭배 대상인 빅토르는 인큐버스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신도들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가는 인큐버스 교단이었다.
"..마나의 불법 사용에, 마나를 이용한 특수폭행까지... 일단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
-타악!!
빅토르를 연행하려는 기사의 손목을 쳐 낸 아이리스가 말했다.
"빅토르님께 손대지 마세요."
"..최근 새롭게 각성하신 아이리스님이시군요. 이러시면 아이리스님께서도 공무집행을 방해한 죄로 끌려가실 수도 있습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빅토르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체포 될 각오를 한 채 자신을 지켜 주는 아이리스의 멋진 모습에 반해서?
그럴 리가.
"아, 아이리스...!"
"걱정하지 마세요 빅토르님!!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 테니까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왜 마나 사용 신고한다고 얘기를 안 했냐...?"
부하 기사의 말을 보아하니 아이리스는 이미 마나 사용 신고를 한 모양. 그렇다는 건?
"네가 하러 간다고 말만 했어도 이런 일은 없던 거잖아...!!"
"..."
왜 꼭 말해야 하는 건 말 안 하고 혼자 하냐고!!!
"걱정하지 마세요 빅토르님!!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 테니까!!"
"아니 그냥 네가 얘기만 했.."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걱정!!!!!!!"
그래. 니가 알아서 해라.
"마지막 경고입니다 아이리스님. 물러나 주십시오."
임전 태세를 취하며 말하는 기사에게 아이리스가 답했다.
"하! 어차피 여기에 출동한 것도 신고 때문이 아니라 모험가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인 주제에 말이 많네요!!"
"망발은 삼가해주십시오!! 저희는 자랑스러운 왕국의 기사단입니다!!"
"네네. 그러시겠죠. 자~~랑스러운 기사단. 그런데 그게 아세요? 기사단이 모험가들을 좋지 않게 보는 건 동네 꼬마아이들도 알아요."
"그게 무슨.."
"기사단 당신네들이 정말로 온 나라를 보호할 수 있다면 모험가들은 존재 이유가 없으니까요. 반대로 말하자면 모험가들의 존재 자체가 왕실과 왕실 기사단이 완벽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셈이니.."
"그만!! 그 이상은 왕실을 모욕하는 겁니다!! 왕실 모독죄는 엄벌로 다스리는걸 모르십니... 단장님?"
두 사람의 언쟁이 거세지자, 아니 두 사람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저 기사 양반은 일방적으로 맞았으니까.
아무튼, 언쟁이 거세지자 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쉬익..쉬이익...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흘러나오는 투구 속에서, 이번에는 숨소리가 아닌,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왕실을 모욕한 자. 죽을 각오는 되어 있나."
-오싹!!
온몸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황금빛 마나를 내뿜으며 자신의 검을 발검하는 아이리스. 그녀의 검을 부술 기세로 기사단장의 할버드(halberd)가 검에 직격했다.
-챙!!
"크읏...!"
크게 밀려나는 아이리스였으나, 기사단장은 거리를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할버드는 거리를 유지한 채 싸우는 게 유리할 텐데 어째서...? 아..!!!"
게임 속 기사단장 캐릭터의 주 무기를 떠올린 빅토르가 소리쳤다.
"아이리스!! 막지 말고 피해!!"
그 말을 들은 아이리스가 즉시 방어 태세를 취소하고 회피 기동을 취했다.
보통의 모험가였다면 하지 못했겠지만, 빅토르를 자신보다 더 신뢰하는 아이리스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
-콰앙!!!!
아이리스가 있던 자리를 직격하는 기사단장의 공격, 하지만 아이리스가 회피를 한 까닭에 애꿎은 바닥만 박살 나 먼지만 일으킬 뿐이었다.
먼지가 가라앉자 나타난 것은 땅에 박힌 할버드가 아닌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긴 네일배트(nail bat,야구 배트에 못이나 철 스파이크 같은 걸 박아 놓은 둔기)였다.
다만 그 크기가 평범한 야구방망이의 4배는 족히 된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이겠지.
"무기가... 바뀌었어?" 아이리스는 살짝 겁에 질린 듯이 말했다.
만약 자신이 빅토르의 말을 듣지 못했다면? 아이리스가 /이리스가 되었을 거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진짜 미친 위력이네. 뭐, 기사단장이 똑같이 검을 든다면 아이리스가 끝내 이기겠지만.'
기사단장의 주 무기, 그것은 모든 무기였다. 웨폰 마스터, 그것이 기사단장을 칭하는 또 다른 칭호였기에.
한 가지 무기만을 사용하는 고수의 그것보다는 실력이 좀 떨어지지만,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그녀는 충분히 사기적인 캐릭터였다. 아마 게임을 어려워하는 뉴비들을 위한 캐릭이었겠지.
빅토르는 생각했다. 그녀들을 둘 다 살릴 방법을. 왜냐고?
용사가 있다는 건 마왕도 필시 있을 터, 마왕이 깨어나서 발광하다가 인류가 멸망이라도 하면, 자신도 역시 죽는 게 아닌가!! 그렇기에 저런 주요 전력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려 둬야했다.
'아이리스야 뭐.. 내 말 한마디면 알겠다고 할 텐데, 쟤는 어떻게 말린담?'
빅토르는 기사단장을 바라보며 고뇌했다. 번쩍번쩍 빛나는 육중한 갑옷이 참으로 얄미워 보였..
'어???'
'말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빠르게 생각을 마친 빅토르가 음흉하게 웃으며 그녀들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이리스. 그만해."
"그치만!!"
"그치만이고 뭐고. 이건 내 잘못이 맞잖아?"
"그리고 기사님들이 수사하시면 내가 진짜 신고를 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도 밝혀질 거고, 모험가들을 때린 것도 어느 정도 정당방위라는 게 밝혀질 거야. 그러면 형벌이 그렇게 크지는 않을걸? 그쵸오~ 기사님?"
빅토르는 살짝 애교를 부리며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음. 투구를 쓰고 있어서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네. 없는 거면 상당히 쪽팔릴 것 같은..'
"마,마마맞,맞다."
'응. 너도 속이 시커멓구나. 그나저나 나도 이제 꽤 여우짓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됐네. 이러다가 정말 이 세계 남자처럼 되면 어떡하지? 에이 설마.'
"하지만." 기사단장이 말했다.
"그건 당신의 경우지. 아이리스 저자는 왕실을 모욕했다. 이는 엄벌로 다스려야 하는 중대한.."
"기사님." 빅토르가 기사단장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다.
"저도 순순히 투항하고, 아이리스도 투항시켰습니다. 얘가 저에 대한 충성심이 깊어서 뭘 모르고 그런 것이니 한 번만 용서해주실 수는 없나요?"
"흠.. 뭘 착각하는 것 같은데..." 기사단장이 할버드를 소환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투항하지 않았어도 어차피 그대들은 다 잡혔을 거다. 설령 나를 쓰러트렸다 해도. 이곳에는 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기사단!!!!"
기사단장의 외침과 동시에 칼을 꺼내는 기사단원들.
그 용맹한 모습은 설령 용사라 해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아직 완벽한 용사가 되지 못한 아이리스였다면 빠져나가지 못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들이 마주한 것은 대장장이. 그것도 마스터 대장장이였다.
대장장이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글쎄요? 이 정도면 안 잡힐 거 같은데?"
"비,빅토르님?! 정신을 놓아버리시면 안 돼요!!"
"...넌 나중에 보자. 흠흠!! 아무튼 기사단장님? 내기 하나 해 보죠."
"내기?"
"제가 여기 있는 기사단 분들을 1분 이내에 무력화 시켜볼게요. 아 물론 재판은 받을 거예요. 대신, 만약 제가 이기면 단장님이 저를 최대한 변호해주실 것. 어때요?"
빅토르의 제안을 듣고 먼저 반응한 것은 단장이 아닌 단원들이었다.
-풉...
-킥....
-푸하하하하!!!!
-저 남자 좀 봐. 얼굴은 잘생겼는데 하는 짓은 완전 병신이네? 하하하!!
-너무 무서워서 정신이 나가 버린 거 아니야? 크크큭!!
"모두 조용. 좋다. 그러면 내가 이겼을 때의 조건도 얘기해야겠지?"
"네 그럼요."
"내가 이긴다면, 저 아이리스라는 여자는 참수한다. 그리고..."
"그리고?"
"ㄴ,너,너너너는!! 나랑 혼인해라!!"
말을 엄청나게 더듬으며 충격적인 고백을 하는 기사단장. 곧바로 기사단원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우와아아아아!!!!
-단장님 여자다운 모습이십니다!!!
-단장님 결혼 축하드립니다!!
-나는 단장님의 남편을 빼앗을 거다!!!
-방금 어떤 새끼야!! 꼴잘알 인정한다!!
-단장님!! 미친년들 두 명 잡았습니다!!
..기사단도 정상은 아니구나. 하긴 저기는 진짜 군부대니까...
"예..뭐... 어차피 제가 이실 테니까 그렇게 하죠."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수락하며, 빅토르는 아이리스에게 다가갔다.
"빅토르님... 죄송해요. 제가 약해서..." 추욱 늘어진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아이리스.
'사고 친 강아지 같네.'
그 모습이 꽤 귀여워 보인 빅토르는 아이리스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말했다.
"금방 다녀올게. 기다려."
"..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기사단장이 팔짱을 끼고 말했다.
"흠..저 아이리스라는 여자랑은 무슨 관계이지? 설마 애인인가? 참수해야 할 이유가 더 늘었군."
"애인은 무슨, 빨리 내기나 시작하죠?"
"언제든지 준비가 되면 시작하도록. 어차피 우리가 질 일은 없을 테니."
"다시 한번 묻는 건데. 진짜 무르기 없기입니다? 약속 지켜야 해요?"
"흥, 당연한 소리. 왕실 기사단장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내가 만약 이 내기에서 지면 널 책임지고 변호하지."
"오... 여기 있는 사람 다 들었습니다? 이젠 발뺌도 못 해요."
"알겠으니 빨리 시작하도록."
"넵~ 그러면 시작!!"
시작을 외치는 빅토르의 신호와 함께 달려드는 기사단장과 그 부하들.
"하하하! 우리가 먼저 공격하지 말라는 조항은 없었지!!!" 자랑스럽다는 듯이 외치는 기사단장. 니가 그러고도 기사냐?
'기사란 것들이 기사도 정신이 없네.'
빅토르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저 웃으며, 한 마디의 단어를 내뱉을 뿐이었다.
"단조(鍛造)"
그 한마디에 모든 기사들이, 거짓말처럼 얼어붙었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