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지 않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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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GUE
그림/삽화
NUGUE
작품등록일 :
2024.11.01 20:31
최근연재일 :
2025.01.10 00:58
연재수 :
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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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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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0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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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Prologue Ep.1 시작 (5)

DUMMY

끊어졌던 감각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붕 뜨는 듯한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


죽은건가?


내 육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때, 희미한 근육의 떨림이 느껴졌다.

나는 이제 막 걸음마를 땐 아이처럼 느껴지는 근육의 떨림을 간신히 잡아챘다.


"......"


살며시 열리는 눈꺼풀이 완전히 들리자, 맨살 위로 하얀 천이 감싸져있었다.


"어?"


말했다. 심지어 두 눈과 귀로 보고 들었다.

몸과의 감동적인 재회도 잠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여기는..."


죽기 전 나에게 종교를 믿느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믿지 않는 쪽이었다. 보지도 못한 걸 믿는 것만큼 이해 안되는 행동은 없었으니.


그런데 이런 사후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다니.


"말도안돼..."


짧은 감탄도 잠시.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사후세계가 보통 이런 식인가?"


그럴 일 없겠지만. 만약, 내 눈앞의 이것을 텍스트로 설명할 수 있고 그리하여 글이 써졌다면 아마 이런 문장이 완성 돼 있을 것이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까먹게 할 정도로 아득한 어둠이 사방을 감싸고 있었다.


"숨막히네."


아무래도 이곳은 천국이나 연옥같은 터울 좋은 공간은 아닌 모양이다. 눈부신 백색 계단도, 미소로 환영해주는 날개 달린 천사가 없었으니. 그렇다면 생각되는 곳은 '지옥’인데, 아무리 봐도 평소 알고 지내던 지옥의 모습이 아니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뭐하냐, 나."


바뀐 건 없었다. 알아낸 것도 없었고.

사실 뭘 해도 의미 없는 짓이었다. 뭐가 됐든 난 죽은 게 확실하니까. 칠흙 같은 어둠을 마주하며 점차 사고가 하나의 감상으로 몰렸다.


'무섭다.'


느껴지는 아득함에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변이 생긴 것은 그때였다.


"고개를 숙여라, 하등한 것들아."


숨막히는 정적을 뚫고 들려 온 낯설지 않은 목소리.

눈을 떠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자, 그곳에는 한 사내가 서있었다.


[인물, '신지석'이 '강제집행 Lv.7'을 발동합니다.]


거만한 걸음으로 무너진 도심을 걷는 짙은 눈썹의 사내.

사내의 손짓 하나하나에 시민들은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9번째 메인 에피소드 시작까지 1분 남았습니다.]


인파의 중앙에 선 사내는 그 메시지를 보며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듣거라, 내가 이 세계의 새로운 질서이니 내가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사내는 주변을 빠르게 흝고는 피가 끈적하게 굳은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두려워 하지마라, 물러서지 말고 지켜내라. 너희들의 하찮은 목숨을 바쳐서 이 세계의 질서를."

"우와아아아아!!!"

"우어어어어!!!"


일제히 고개를 들어 환호를 외치는 인간들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들의 포효는 승리를 다짐한 각오가 아닌, 구원을 바라는 절규에 가까워 보였다.


"...내가 뭘 보고 있는거야."


새어나온 피눈물이 상처입은 얼굴을 따라 흐르는 풍경.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에는 비릿한 혈 향과 매케한 먼지가 깃들어있었다.


[Episode.9 무너지는 질서 (2)의 '다시보기'를 종료합니다.]


팟.


상영이 끝난 영화관 스크린 마냥 암전된 시야.

엔딩 크레딧이 떠오르듯 검은 바탕에 새하얀 글씨가 생겨났다.


『이 이야기는 거대한 착각에 빠진 집행자의 이야기이다.』


"......"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집행자...?"


죽은 줄 알았던 내가 도심 어딘가에 서있었던 것도.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본 것도.


허나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기도 전에 괴현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스스스슷.


조그마한 알갱이 같은 것이 내 볼을 스쳐 지나갔다.


"읏..."


뒤 이어 피부를 지지는 뜨거운 태양열이 느껴졌다.

고운 알갱이가 발을 덮었다.


"...모래잖아?"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 위에 서있었다.

하늘을 바라보자 커다란 두개의 태양과 눈이 맞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상황을 전부 이해하기도 전에 눈부신 빛에 의해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이 이야기는 신기루를 쫓은 허망의 이야기이다.』


솨아아아아


시원하게 울려퍼지는 비소리.

비릿한 물냄새가 공기를 타고 그 존재감을 뿜어댔다.

빗물에 젖어가는 셔츠를 바라봤다.


“···비?”


이번에 내가 서있는 곳은 비가 내리는 우림이었다.

차가운 빗방울이 살짝 열감이 도는 피부를 적셨다.


『이 이야기는 끝낼 수 없던 여정을 시작한 자의 이야기이다.』


"...하, 뭐야 이건."


또 다시 암전된 시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괴현상은 내가 눈을 감았다 뜰때마다 계속됐다.


푸른 들판.

끝을 모르는 낭떠러지.

어둠으로 가득 찬 동굴.

인파로 가득 찬 광장.

화려한 금빛 궁전.

서울을 연상시키는 도심.


계속해서 전환되는 장면 속, 내 손에는 피 묻은 검이. 부러진 활이. 작은 아이의 손이. 따뜻한 여인의 손이. 혹은 차갑게 굳은 사내의 손이 잡혀 있었다.


"......"


솔직히 처음 몇 번은 신기함과 당혹감이 공존했었다.

그러나, 끝없이 계속되는 괴현상은 이내 조금씩 커져가던 당혹감을 공포와 절망으로 바꾸었다.


“...그만해."


억지로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허튼 짓이었다.

눈을 감지 않아도 주변의 환경은 쉴 새 없이 바뀌었다.

두서 없이 뒤섞이는 장면들이 만들어내는 공포가 극에 다다르자, 그것을 뚫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그러나 결코 막을 수 없는 감정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ㅡ기사님! 제발···

ㅡ하하, 여기예요~

ㅡ안된다··· 안돼···

ㅡ헤헤, 아빠~

ㅡ영웅님, 부디···

ㅡ널 죽이겠다.


목소리는 언뜻 행복해 보였다. 불행해 보이기도 했고,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그만하라고···."


나를 마주한 수많은 얼굴들은 내 눈앞에서 울고, 웃고, 최후에는 죽어갔다.


고통스럽다.


긍정과 부정이 끝없이 교차하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무엇인가 천천히 부서져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차려라."


무질서한 소음을 뚫고 들려 온 선명한 목소리.


"이것이 네가 버텨야 할 이야기다."


주변의 소음이 가라앉으며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아들었나?"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다, 말하는 듯한 감정없는 목소리.

순간 욱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닥쳐. 뭘 다 안다는 듯이 지껄이는거야. 애초에 내가 왜 이딴 걸 버텨야하는데."

"안다. 그 고통."


잔인할 만큼 차갑고 무뚝뚝한 문장.


"나 역시 수없이 느껴봤으니."


닥치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침과 함께 삼켜질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만, 기억해라."


저 목소리가 건네는 말이 조금은 슬프게 들렸기 때문일까.


"이것은 저주이기 이전에 기회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지.


"부디, 너의 꿈을 이루어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왜 내가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잠깐만!"


하지만, 동시에 궁금했다.


"그럼 알려줘, 내가 본 건 대체 뭐야."


어둠을 향해 뱉어진 문장이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하지만 그 길이 너무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했기 때문일까, 돌아온 것은 방금 들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전용 특성의 개화 조건을 모두 충족하였습니다.]


어딘가 익숙한 기계음.

멈췄던 배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읏!"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무서웠다. 그것들을 또 다시 보게 될 까봐. 하지만 무언가 달랐다.


츠즈즈즈즛!


나를 향해 있지만, 나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검은 형체들. 얼굴도 표정도 없는 마네킹 같은 비주얼이었지만, 겉치레나 디테일한 생김새는 전부 달랐다.

가령, 저기 있는 마네킹의 각진 어깨선은 마치 갑옷을 입고 있는 듯 보였다.


이해가 안된다.


알려달라고 부탁했더니 돌아 온 대답이 이딴거라니.

농락도 이런 농락이 없다, 생각한 순간 검은 형체들이 하나의 점을 향해 모였다.

점은 새하얀 빛이 만들어낸 흰바탕에 무엇인가 적기 시작했다.


『ㅇ』


『이』


『이 ㅇ』


한 획, 한 획. 정직하게 완성되어 가는 자음과 모음의 조화.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하나의 문장이 완성됐다.


『이 이야기는 정의에 배신 당한 한 성기사의 이야기이다.』


"...성기사?"


의아했다. 뜬금없는 건 물론이고.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백마탄 왕자님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토벌 당한 사냥꾼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신세계의 희생양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피의 전장에 선 간호사의 이야기이다.』


비슷한 종류의 문장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 밖에 특이점이라면 높고 낮은 목소리가 순서없이 울리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


『@!&야!&&@내가&^!먼저』

『다물%!₩%라!&₩순서!%』


목소리는 눈 앞의 텍스크와 비례해서 그 수가 늘어났다.

처음에야 놀랬지만,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점에 금방 안심했다.


"...씨ㅡ"


물론 저 소음은 별개의 문제였다.


"좀 조용히 해... 시끄럽다고!!"


홧김에 나온 말인데 주변은 금새 조용해졌다.


"......"


폭력적인 침묵이었다.


"...내 말이 들려... 요?"


『잘 들린다.』


위엄이 느껴지는 묵직한 중저음. 조금 놀랐다.


"...아, 미안해요. 근데 그렇게 한번에 말하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그랬을 거예요. 아마..."


돌아오는 말소리는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말할거면 한명씩 말해 달라는...... 저기요?"


화가 난거라면 나도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다고 말하려는 찰나, 통통 튀는 목소리가 텍스트와 함께 떠올랐다.


『그럼 내가 먼저 말해도 될까?』


뭘 말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거절하면 방금 전 상황이 반복될 것 같은 느낌이라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 다른 분들이 괜찮다면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말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바로 앞에서 텍스트가 떠올랐다.


『히히, 허락받았어! 그럼 시작해볼까.』


"잠시만요."


『응?』


겨우 말이 통하는 상대를 만났다.

비록 보이지도 않고, 수상한 점 투성이지만.

저 목소리에 깃든 감정은 분명 '호의'다.

분명 이 상황과 공간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것이다.


"적어도 무슨 상황인지는 설명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음... 틀린 말은 아닌데, 솔직히 말하면 우리도 잘 모르겠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말하면 안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느낌이 그래!』


가물가물? 느낌? 이렇게 무책임한 단어 선정이 또 어디 있을까.


『아무튼!』


형체 없는 무게감이 내 입술을 꾸욱 눌렀다.


『잘 들어, 분명 도움이 될테니까.』


무언가 말하려던 내 입을 재차 막은 것은 뒤따른 서두였다.


『모든 건 '공백'이 나타나면서 시작됐어.』


그 이야기의 시작은 내가 알던 것과 비슷했다.


『참, 넌 아직 공백에 대해 잘 모르겠구나? 내가 설명해줄게.』


.

.

.


『여기까지가 프롤로그였어. 후, 프롤로그도 정말 쉽지 않았지!』


일방적인 대화. 질문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불친절함을 내가 가만히 듣고 있는데는 한가지 이유가 있었다.


닮았다.


『한때는 궁금했어.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는걸까. 이게 살아있는 게 맞을까?』


그녀는 나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고, 평범하게 청춘을 즐겼다. 다만, 어느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니게됐다.


『그때 알았어, 코스모스와 성약좌들을 믿으면 안됐다는 걸.』


'코스모스', '성약좌'


그 밖에도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로 이루어진 난잡한 이야기. 잠시 동안 말이 없던 목소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쉬는 시간이라면 궁금한게 있는데요."


『응! 말해봐, 내가 아는 범위 안에서는 얼마든지 대답해줄게.』


"나한테 도움이 될 거라는 게 무슨 소린가 해서요. 아무리 들어도 그냥 다 죽고 끝나는 막장 스토리인데."


『...음, 글쎄. 느낌?』


내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 굳이 따지자면... 우리들이...』


"우리들?"


대충 얼버부린 그녀는 여전히 통통 튀는 목소리와 어올리지 않는 잔혹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가만히 듣는 와중에 조금 의아했다.


본인은 모르는 건가?


처음 말을 시작할 때만 해도 눈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서 들려오기만 했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지금은 흐릿한 실루엣 너머, 입에서 시작되는 것이 보였다.

상대가 너무 집중해서 말하는 바람에 말을 걸 타이밍을 놓쳐버린 참이라 그러려니하고 듣고 있는 중이다.

흰 바탕을 채우는 텍스트가 쌓일 수록 그녀의 실루엣은 점차 선명해졌다.


"그래서 이 다음은 어떻게 되는거죠?"


『유쾌한 이야기는 아닐텐데, 그래도 궁금해?』


"......아마도?"


『히히, 그럴 줄 알았어.』


*


『여기까지! 후아, 이 긴 이야기를 용케 다 들었네!』


긴 머리칼을 흩날리는 그녀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인 건 여전하지만.


"...뭐, 흥미로운 점이 있어서요. 이미 죽어버려서 쓸데는 없겠지만."


『글쎄, 그건 모르는 일 아닐ㄲ...엑!』

『비켜라.』


귀를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


『다음은 나다.』


.

.

.


『여기까지다. 집중력이 좋군.』


"예, 뭐..."


언뜻봐도 거대한 덩치의 남자. 갑옷 같은 걸 입고 있는 것인지 각진 모서리들이 보였다.


『헤헤, 기사 아저씨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이제보니까 몸도 꽤 좋네?』

『만지지 마라.』


닮은 듯, 닮지 않은 이야기.

대충 들어도 이 남자의 세계가 내가 살던 그곳이 아니라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다.

복장이나, 생김새만 봐도 이국적인걸 넘어 이차원적이다.

같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도 충분히 말이 안되지만...


나와 눈이 맞은 기사는 부릅 뜨더니 말했다.


『명심해라, 코스모스는 잔인한 존재다. 에피소드에서 살아남으려면 육체의 단련은 절대 멈춰선 안된다.』


"...알겠어요. 제발 그만 말해요."


그때 앳된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나야!』

『야, 순서 지키라고!』


나는 반쯤 포기하고 말했다.


"싸우지마, 어디 못가니까."


.

.

.


『고마워, 예쁜 언니!』

『헤헤, 고마워 누나!』


4명.


『...이번에는 내가 해도 될까요?』


이제는 나도 될대로 되라는 식이다.


"어서오세요, 손님."


8번째 손님을 받고 있는 그때, 나는 순간 든 의문에 질문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린 서로를 '그람자'라고 부를 뿐이다.』


잘 어올리는 호칭이라 생각한 동시에 미묘한 씁쓸함을 느꼈다.


『아해여, 소감이 어떠하냐.』


"...음, 좀 슬프네요."


20명.


『난 여기까지예요.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요.』


"뭘요, 다음 손님은 누구죠?"


30명.


이 공간에도 시간이란 개념이 존재했다면, 나는 이곳에서 꽤나 긴 시간동안 그림자들이 건내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팔자에도 없는 노릇을 하고 있는 거였지만, 힘들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록 무언가 채워지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10번째 메인 에피소드는 정말 쉽지 않았어. 그때 우리가 맞이한 건 신의 잔재나 다름 없었거든.』


'에피소드'


이들이 건내는 이야기에는 공통된 부분이 많았고, 저것은 그 중 하나였다. 내가 그러했듯, 이들 또한 '에피소드'란 것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던 사람들이었다. 신기했다, 내가 얼마 전 겪은 비극이 이들에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과거로 남았다는 것이.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41번째 그림자가 이야기를 마친 시점이었다.


『고생많았다. 우리의 역할은 이걸로 끝났다.』


"...뭐예요. 갑자기?"


『이별은 그런 것이다. 덕분에 후환은 없군. 먼저 떠난 그림자 모두 고마워할 것이다.』


실제로 둘러 본 주변에는 눈 앞의 그림자를 제외한 다른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걸까? 기척이 느껴진 등 뒤편에는 목소리와 함께 떠오르던 검은 텍스트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걱정마라, 우리는 다른 형태로 함께할 것이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르거라. 그럼 부디 살아나서도 우릴 잊지 말아다오.』


"...살아난다고요? 아니, 그보다 다들 어디 간... 아?"


죽은 몸도 피로가 쌓일 수 있던 것일까, 순간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듯 하더니 눈꺼풀이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저, 저기요. 나 몸이 좀 이상해요."


마지막 그림자가 눈 앞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완전히 눈이 감기기 전, 유색 형체의 무언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살아나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소망(消忘)'을 퇴장합니다.]


.

.

.


아스팔트의 딱딱한 감촉이 뺨에 느껴졌다. 흐릿한 감각. 일어선 나는 피부에 닿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손을 쥐었다 폈다.


"뭐야..."


나는 서있었다. 언젠가 내가 처참이 찢어진 그곳에.


"진짜 살아났다고?"


['코스모스'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코스모스'가 당신의 존재에 의문을 표합니다.]


꿈을 꾼 것일까? 그렇다면 어느 쪽이 현실이고, 꿈인 것일까. 모르겠다. 뭐가됐든 전부 생생하게 기억나니까.


"...피냄새."


확실한 건 나는 죽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항상 불행하고 비극적인 세상을 노래하던 그림자들과 같이, 나는 죽었다.


ㅡ그래도 항상 불행하기만 했던 건 아니야.


13번째 그림자가 했던 말. 사실 대부분의 그림자가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렇기에 나는 매번 질문했다.


ㅡ다시 한 번 기회가 생긴다면?


자신을 죽이고, 소중한 것을 앗아간 세계를 다시 살아간다. 그 의미를 함부로 단정 지을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그들의 긴 침묵을 이해했다.


ㅡ우리는 잘 모르겠어.


[전용 특성이 개화합니다.]


ㅡ하지만 너는 다를거야.


그때는 그냥 헛소린 줄 알았는데.


"크아아아악!!!"


나를 발견한 붉은 눈들이 끔찍한 비명을 토했다. 눈들의 중심에는 오만함으로 가득찬 검은 눈동자가 떠있었다.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 리 없는데?"


그래, 너가 있었지. 사람이 죽고 가장 오래 남아있는 감각이 청각이라고 했나? 기분 더럽게도 정설인 모양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히 기억난다.


"지랄하네, 반반한 게 네 타입이라고?"


오만한 눈이 가늘게 떠졌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내의 손짓에 따라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 붉은 눈들이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뭡니까 당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인물 '신지석'이 '강제집행 Lv.1'을 발동합니다.]

[오류, '강제집행'의 대상을 특정하지 못하였습니다.]


"...뭐야..."


'신지석.'


그림자들이 들려준 이야기에는 저 남자에 대한 것도 있었다. 상대를 알고 있다는 여유 덕분에 나는 조금 건방지게 말해보기로 했다.


"뭐야 너. 뭔데 내 스킬을..."

"...니야, 넌."

"...뭐라고?"

"아니라고, 넌."


살짝 찡그린 눈썹이 쏘아 올리듯 물었다.


"뭐가 아니라는 겁니까?"

"미안하지만, 넌 주인공이 아니야."

"하?"


심하게 일그러진 얼굴.


"우습군요. 당신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는 선택받았습니다. 못 들었습니까? 난는 이 세계의 주인공ㅡ"

"풉."

"...뭡니까?"


차갑게 쏘아지는 눈빛을 무시하고 말했다.


"신지석, 30세. 운이 좋네, 무려 열 번째 에피소드까지 살아남다니. 과연, '집행자'라는 이름 값은 하는 모양이야."

"...그게 무슨 말ㅡ"

"하지만 딱 거기까지야."


작게 벌어진 입이 멍청하게 뻐끔거렸다.


"넌 주인공 감이 아니거든."


짧은 침묵 후, 신지석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이윽고 웃음을 멈춘 특유의 오만한 눈이 다시금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신지석의 손 끝을 따라 주변에 있던 붉은 눈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키에에엑!"

"으아아아!"


도저히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

저들이 또다시 나에게 도달한다면, 그 뒤 상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분명 온 몸이 뜯어져,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 그러니 내가 다음으로 해야 할 행동은 이미 정해진 셈이다.


도망쳐야 한다.


"......"


그러나,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전용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나 좀 도와줄래요?"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전용 스킬, '몽영(夢影) Lv.1'이 발동합니다.]

[현재 사용 가능한 그림자 옵션은 '다시보기'입니다.]

['다시보기'를 사용합니다.]

['다시보기'가 가능한 그림자 목록을 불러옵니다.]


눈앞에 떠오른 몇몇 선택지들.

솔직히 나도 이게 정확히 뭔지 설명할 자신이 없다.

더불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도.

하지만 적어도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크에에에엑!!!"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붉은 눈이 내 목을 노리려는 순간.


[987번 그림자 - '정의에 배신 당한 성기사'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Episode.4 핏빛 정의 (1)'를 열람합니다.]


푸슈우웃!


여인의 심장에 무엇인가 박히며 피가 솟아났다.

검붉은 핏방울이 흩날리자, 망막 위로 그림자들을 통해 듣고, 본 것들이 떠올랐다.

차곡차곡 쌓이는 검은 텍스트들.


『나의 검은 끝을 강제하기 위해 태어난 검이 아니었다.』


“끄, 아아아ㅡ”


그것은 한 기사의 이야기였다.


『기사의 손에 흐르는 피는 고결하고 순고했다. 어떠한 시련 앞에서도, 그의 검은 소중한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울었기 때문이다.』


그 기사는 검을 아주 잘썼다.

그런 그가 내게 말했다.


자신은 등 뒤에서 달려오는 마수를 보지도 않고 베어냈다고.


촤아아악!


심장에서 뽑혀 나온 검이 허공에 떠올랐다.

잠시 하늘에 머물던 검은 내 등 뒤에서 달려오던 붉은 눈에 머리를 베어냈다.


푸슈우웃!


허공에 뿌려지는 선혈.

잘려 나간 머리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았다.

이어서 손등 위로 생겨난 검은 아우라는 양팔을 감싸는 은갑옷을 만들어냈다.


"...무슨..."


『잃지 않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그의 검은 영원토록 빛날 것이다.』


오만하던 눈에 당혹감이 물씬 깃들었다.

달라진 것은 신지석의 반응 뿐만이 아니었다.


'가볍다'


실제로 양팔을 감싸는 갑옷과 묵직한 검의 무게는 시간이 지날 수록 가벼워졌다. 정확히는 스치듯 지나가는 문장의 수가 늘어날 때마다 힘이 솟아났다.


[인물, '조유진'이 사망하였습니다.]

[인물, '백종선'이 사망하였습니다.]


심장의 고동도. 바람에 흔들리는 옷깃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도신을 따라 흐른 피가 빛을 앗아가자 침묵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어째서, 너희가 나를...]


낮게 깔리는 위엄있는 중저음.

내게 고맙다고 말하던 목소리가 고통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가... 가라고! 전부 가서 죽여버려!"


신지석의 당황한 두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키아아아악!!!"


물밀 듯 몰려오는 붉은 눈들을 마주하자 속이 울렁하며 낯선 목소리가 이어졌다.


[용서 할 수 없다.]


한 획, 한 획 느껴진다.


이것은 소중한 것에 배신 당한 자의, 가장 원초적인 슬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은 자책이 되었고, 자책은 곧 분노로 이어졌다.


『새로운 시작을 축복하기 위해 빛나던 은빛 안광이, 지금 이 순간 하염없이 피눈물을 토했다.』


분노에 눈 먼 검이 내 의사와 상관없이 사람들을 겨냥했다.


파슷!


검이 움직인 것인지, 내 손이 움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손 끝에 남은 인간의 살을 찢고 뼈를 부수는 감각뿐. 그 섬뜩한 감각은 그 뒤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스슷. 스걱. 촤아악!


하나, 둘 주저앉는 시민들의 수가 늘어날 수록 신지석의 표정이 바뀌어 갔다.


"마, 말도안돼..."


한 발자국.


"오, 오지마..."


그리고 또 한 발자국.


"오지말라고 시이발!!"


두 다리는 착실히 앞을 향해 나아갔다. 걸음 뒤로는 시체들이 쌓였다. 그렇게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내딛였을 때, 그곳에는 실금하는 신지석이 있었다.


『그 순간, 핏빛 안광이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뭐냐."


조소하듯 들썩이던 신지석의 어깨가 분하다는 듯 떨려왔다.


"하, 하하... 마지막이라고? 웃기지마. 나는 선택받았어!"


신지석이 검날을 잡아챘다.


[인물 '신지석'이 '강제집행 Lv.1'을 발동합니다.]

[오류, '강제집행'의 대상을 특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인물 '신지석'이 '강제집행 Lv.1'을 발동합니다.]

[오류, '강제집행'의 대상을 특정하지 못하였습니다.]

[인물 '신지석'이 '강제집행 Lv.1'을 발동합니다.]

[오류, '강제집행'의 대상을 특정하지 못하였습니다.]

.

.

.


계속되는 메시지와 주먹을 따라 흐르는 피에도 칼을 쥔 신지석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점차 일그러지는 신지석의 눈가로 무엇인가 흘렀다.


"시발... 진짜 지랄하지마."


단순히 분노해서 흐르는 눈물이 아니었다.


"왜 하필 또 너 같은 게 나타난거야. 나도 좀 빛나고 싶다고! 왜 매번 너희들만ㅡ"


스킬 발동 메시지가 멈춘 순간, 온 힘을 짜낸 주먹이 내게 쏘아졌다.


"으아아아! 제발 죽어! 이번에는 내가 주인ㅡ!"


슷!


신지석의 주먹은 닿지 못했다.

검은 어느새 하늘을 향해 기상해 있었다.

아직 피가 흐르지 않은 검날에 내 얼굴이 비췄다.


"......"


그것은 분명 나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얼굴에게 묻고 싶었다.


『그 너머에 있는 너는, 내가 맞느냐고.』


귀가 당겨오는 통증과 동시에 사위가 흔들렸다.

그 순간, 도신을 따라 흐른 선혈에 의해 얼굴의 중앙이 지워졌다.

달싹거리는 입술만이 남은 피상이 내게 묻기 시작한 그때, 한 문장이 눈앞에 떠올랐다.


『이 이야기는 정의에 배신당한 한 성기사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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