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구 낀 소녀
안내인은 레이와 여자를 번갈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같은 일행이라··· 이 녀석은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여자는 당황한 듯 레이를 향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간절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레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안내인은 그런 그녀를 비웃듯이 바라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게다가, 기사라니? ‘기사’라는 단어를 그렇게 쉽게 입에 담는 게 아니야, 애송아.”
그 말을 마친 뒤, 그는 마치 더 이상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여자를 완전히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의뢰서를 하나하나 정리하며 다시 자신의 업무에 집중하는 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여자는 레이를 향해 눈짓을 보내며 재빨리 속삭였다.
“제발, 그냥 도와줘요. 이 기회 놓치면 큰일 나요.”
레이는 혼란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같은 일행이라고 할 수 있죠.”
안내인이 레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증명할 수 있는 거라도 있나?"
레이는 속으로 '벌써 이걸 써야 하나···' 하고 생각하며 율리크가 준 은색 기사패를 꺼내 내밀었다. 반짝이는 기사패를 본 순간, 안내인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
안내인은 레이가 내민 은색 기사패를 손에 들고 유심히 살폈다. 눈길이 기사패의 표면을 스치다가 그 위에 새겨진 단장의 각인을 발견하자 그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 단장의 각인까지 새겨진 진짜라고?"
안내인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기사패를 돌려주었다.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노르헤임 방패단 단장의 각인이 새겨진 기사패라니···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겠군.”
그의 목소리에는 존경과 당혹이 섞여 있었다. 옆에서 일행이라며 우기던 투구 쓴 여자도 그 말을 듣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안내인의 말에 레이는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뜻밖의 주목에 약간의 당혹을 느꼈다.
노르헤임도 아니고 수도인 발칸에서 기사패가 이렇게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줄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옆에 있던 투구 쓴 여자는 주저주저하다가 레이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이번 일은 성사될 것 같네요."
레이는 그녀의 감사를 받아들였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어쩌다 이런 무모한 상황에 처했는지 궁금해졌다. 대답 대신 레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여자는 곧 이어질 의뢰를 위해 자세를 가다듬었다.
안내인은 남은 의뢰서 몇 장을 간단히 정리한 후, 레이와 여자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이제 됐네. 자네들이 의뢰를 제대로 처리할 능력이 있다는 건 충분히 확인했으니, 이걸 맡겨도 되겠군."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곳 발칸에서는 한 번 맺은 신뢰를 무겁게 여기는 법이네. 기대에 부응해 주길 바라지."
레이와 여자는 의뢰서를 건네받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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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뢰 서 -
의뢰 등급: B급 (중상)
지역: 북부 수도 발칸 외각숲
목표 몬스터: 서리송곳 그리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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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뢰 내용
발칸 외각숲에 출현한 서리송곳 그리즐리로 인해 주민과 행인들의 피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서리송곳 그리즐리는 평소 두 발로 이동하며, 앞발에는 두꺼운 얼음 아대가 덮여 있고 발톱 끝에는 강력한 냉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 몬스터는 공격 시 네 발로 빠르게 돌진하여 날카로운 얼음 발톱과 강력한 충격으로 피해를 입히며, 그 위협은 상위급 용병도 1대1로 대적하기 어려운 중상급 수준입니다.
의뢰자는 서리송곳 그리즐리의 제거 또는 인근 지역으로의 격퇴를 요청합니다.
이에 따라 고위험 작업이 예상되므로 접근 시 주의가 필요하며, 특히 방어 장비와 원거리 지원을 갖춘 일행이 추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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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사항
1. 서리송곳 그리즐리는 네 발로 돌진 시 더욱 빠르고 위협적인 공격을 펼칩니다. 두꺼운 얼음 건틀릿과 발톱에 주의하십시오.
2. 공격 중 발생하는 냉기와 눈보라는 시야를 차단하며, 체온을 빠르게 저하시킬 수 있습니다.
내열 장비 착용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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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상
- 기본 보상: 3000 골드
- 추가 보상: 서리송곳 그리즐리의 주요 부위 (얼음 발톱, 아대 등)를 회수하여 제출 시 추가 보너스 지급
* 북부 수도 발칸 외각숲의 고위험 작업을 포함하므로 충분히 준비된 모험가들의 도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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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는 의뢰서를 찬찬히 훑어보던 중, 의뢰 등급과 보상 조건을 보고 크게 놀랐다.
"이게··· B급 의뢰라고?"
그는 잠시 의뢰서를 놓고 숨을 고르며 다시 한번 읽어봤다. 3000 골드라는 금액은 물론이고, 몬스터의 주요 부위를 회수했을 때 추가 보너스까지 약속된 고위험 의뢰였다.
서리송곳 그리즐리가 얼마나 강한 상대인지 의뢰서에서 설명한 부분을 보고 그는 살짝 긴장하면서도 흥미가 생겼다.
“이 정도면 중상급 중에서도 꽤나 까다로운 편이잖아···"
레이는 의뢰서를 다시금 쳐다보며 옆에 서 있는 투구 쓴 여자를 곁눈질했다. 의뢰 내용의 난이도를 떠올리며, 자신도 모르게 못 미덥다는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였다. 이걸 느낀 여자가 발끈하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왜요? 내가 못할 것 같아 보여요?”
레이는 당황한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 그게 아니라··· 이 정도 의뢰면 꽤 위험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냥, 확실히 준비가 돼 있나 싶어서.”
그러자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투구 너머로 레이를 노려보았다.
“괜한 걱정은 사양할게요. 나도 나름대로 경험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 서리송곳 그리즐리,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 가능해요.”
레이는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말에 가볍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 가능하다라···”
“내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않은 건가요? 방금까지 의뢰서의 보상에 놀라는 것 같던데, 괜히 겁난 거 아니죠?”
레이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겁난 건 아니고, 그냥 예상보다 보상이 커서 잠깐 놀랐을 뿐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난이도의 몬스터를 혼자 상대할 수 있을 정도라면 정말 실력자라는 건데···”
여자는 그의 반응에 살짝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나중에 보면 알겠죠. 기대하셔도 좋으니까요.”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하며 여자가 레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그쪽은 반말이에요?”
레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여자를 보며 불쑥 말했다.
“너도 반말 쓰던지.”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너가 아니라 아르벨이에요. 전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은 쓰지 않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
레이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계속 그렇게 예의 바르게 굴어, 아르벨 씨.”
아르벨은 살짝 입을 삐죽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처음 본 사람한테 반말 쓰는 것도 모자라 이름도 안 알려주는, 참 예의 없는 분이시네요···”
레이는 그 말을 듣고 한껏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돌아봤다.
“하하! 예의 바른 아르벨 씨께 미리 알려드리지 않았네. 레이야. 이제 됐어?”
아르벨은 팔짱을 끼며 여전히 못 미덥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네, 레이 님. 조금은 덜 예의 없는 분 같아 보이네요, 이제야.”
레이는 그런 아르벨의 반응에 여유롭게 웃으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길드를 나서며 둘은 투닥거리듯 가벼운 신경전을 이어갔다. 발칸의 외각숲으로 향하는 길은 아침 햇살에 길게 드리운 나무 그림자로 둘러싸여 있었고, 주변의 짙은 숲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걷던 중 아르벨이 잠시 레이를 힐끔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기사 맞아요?”
“왜, 아니라면 실망할 거야?”
아르벨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기사패가 진짜처럼 보였는데··· 기사 같지 않은 느낌이 들어서요.”
레이는 걸음을 멈추고 아르벨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기사 같은 느낌이 뭔데?"
아르벨은 조금 당황한 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음, 그러니까··· 기사는 왠지 더 엄격하고 고고한 느낌이랄까요. 정해진 규칙에 따라 움직이고, 말 한마디에서도 그런 품격이 묻어나는···”
레이는 아르벨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툭 내뱉었다.
“사실, 기사 아니야.”
아르벨은 놀란 얼굴로 레이를 쳐다보았다.
“정말요? 그럼, 그 기사패는···”
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떻게 보면 맞고, 어떻게 보면 아니지. 정식으로 임명된 건 아니거든."
아르벨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중얼거렸다.
“사기꾼···”
레이는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에이, 그 정도는 아니지. 적어도 실력은 진짜니까.”
아르벨은 의뢰서를 받은 후, 자신을 못 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레이의 그 시선 그대로 그를 바라보았다.
레이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아르벨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혼자서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면서, 뭐야 그 눈빛은?"
아르벨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이를 쏘아보더니 말투를 낮추며 말했다.
“슬슬 다 와가니까··· 긴장이나 좀 하세요.”
어느새 주변에 서리송곳 그리즐리의 흔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깊고 큼지막한 발자국들이 찍혀 있었고, 그 발자국 끝자락에는 땅이 얼어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얼어붙은 자국은 발톱 자국마다 미세한 균열을 만들어 눈처럼 흩어져 있었다.
그 발톱이 지나간 자리에는 무거운 무언가가 지나갔다는 듯 잔가지들이 부러지고, 주변의 풀이 모두 시들어 있었다.
마치 냉기가 스쳐 지나간 자리마다 생명이 얼어붙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근처 나무의 껍질에도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살짝 휘어진 나무의 표면에는 날카로운 얼음 발톱이 그어간 것처럼 껍질이 부서져 있었고, 그 안쪽 나무가 하얗게 얼어 있었다.
그리즐리가 앞발로 힘껏 내리친 흔적인 듯, 한눈에 봐도 단단한 나무가 견디기 어려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이는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얼어붙은 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에 닿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손끝으로 퍼져왔고, 그는 아르벨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이 흔적들··· 상상 이상인데?”
아르벨도 눈썹을 찌푸리며 흔적을 살폈다.
“주변 환경에 흔적이 남을 정도라니, 만만치 않은 상대겠어요.”
레이는 얼어붙은 가지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이 정도로 강력한 냉기를 남길 수 있는 거야? 흔적까지 이렇게 차가운가?"
아르벨은 주위를 살피며 약간 경계하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서리송곳 그리즐리가 강한 건 맞지만, 이런 식으로 주위까지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에요. 흔적이 남더라도 이렇게까지 냉기가 남아 있건 본 적이 없는데..."
그녀는 깊은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된 냉기의 흔적을 살폈다.
"뭔가 이상해요. 이 정도로 강한 냉기는··· 혹시 이 그리즐리가 변종이거나 특별한 개체일지도 모르겠네요."
"변종이라···"
발칸 가던 길에 만났던 그 돌연변이 서리늑대가 생각났다.
'등에 깃든 불길한 붉은 기운부터가 심상치 않았지. 보통 하급 서리늑대랑은 차원이 달랐어··· 분신을 만들어내질 않나, 그걸 또 터뜨려서 주변을 얼려버리질 않나.'
혹시 이 서리송곳 그리즐리에게도 그 이상한 기운이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르벨의 말처럼, 일반적인 그리즐리라면 주위까지 얼릴 정도는 아니니 더욱 의심스러웠다.
만약 이 녀석도 변종이라면, 이번 의뢰가 단순한 B급을 넘어서 위험해질 가능성이 컸다.
입꼬리를 올리며 생각했다.
‘보수··· 더 받아야겠는걸.’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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