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왕 발타자르(3)
아르엔은 대련장 가장자리에서 멍하니 둘의 대련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련 속에서 레이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시야에 또렷이 들어왔다.
아버지, ‘권왕’이라 불리는 발타자르에게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당당해 보였다.
'저 사람··· 도대체 뭐지?'
주위의 환호와 압도적인 긴장감 속에서, 그의 검끝에서 흔들림 없이 뻗어 나오는 기운을 보며 아르엔의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아버지에게 저렇게까지 도전할 수 있다니.'
레이의 검이 아버지의 옷깃에 닿는 순간, 아버지의 주먹이 하늘을 가르며 뻗어 나갔고, 그 주먹이 지나간 길을 따라 하늘이 갈라지고 구름이 터져 나갔다.
폭발하듯 뻗어 나가는 그 광경에, 아르엔은 저도 모르게 손에 땀이 맺혔다.
레이는 지친 얼굴에도 묘하게 개운한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수 잘 배웠습니다.”
대련이 끝났다는 신호였을까. 아르엔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와 발타자르는 대련이 끝난 후에도 잠시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발타자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젓더니, 문득 시선을 돌려 대련장 가장자리에 서 있는 아르엔을 바라보았다.
“아르엔! 할 말 없느냐?”
아르엔은 깜짝 놀라며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
레이는 아르엔이 깜짝 놀라 발타자르를 쳐다보는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그를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변종 몬스터에 대해 따로 드릴 말씀드릴 게 있어요. 아르엔도 변종 그리즐리를 함께 잡았으니, 같이 이야기를 하는 걸로 하죠. 아! 이왕이면, 율리크님도 함께요.”
발타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들어 기사들의 환호를 진정시켰다. 잠시 후 대련장의 소음이 차츰 가라앉았다.
“대련은 여기서 끝이다.”
그의 한 마디에 대련장이 고요해지자 레이, 아르엔, 그리고 율리크를 불러 함께 이동했다.
거대한 대련장을 벗어나 성 안쪽 조용한 복도를 지나며 넷은 이윽고 변경백의 방 앞에 도착했다. 발타자르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레이와 아르엔, 율리크도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방 안은 깔끔한 분위기를 풍겼다. 넓은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이 공간을 밝히고, 벽에는 북부 전역을 담은 대형 지도가 걸려 있었다.
단출한 가구와 묵직한 나무 책상, 서가에 정돈된 책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간결함이 오히려 발타자르의 존재감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는 방 한가운데 의자에 앉으며 레이를 향해 말했다.
“그래, 말해보게.”
"우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있어요." 레이가 말을 꺼냈다. "아르엔이 투구를 쓴 이유는 이제 확실히 알겠고··· 그런데 왜 하필 서리송곳 그리즐리를 고집했는지···?"
그 말에 아르엔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자 옆에서 발타자르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건 말이지, 내기를 했기 때문이네.”
"내기라니요?" 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B급에서 중상급 의뢰를 혼자서 완수하는 것. 그 정도를 해내고 신용패와 증거물을 가져오면, 충분히 한 사람 몫을 인정받을 수 있지. 그런 사람이면 최근 자주 발생하는 몬스터 토벌에도 함께할 자격이 주어진다네.”
그는 레이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더하며 덧붙였다.
“물론, ‘혼자서’ 해내야 하는 내기였지. B급 이상의 의뢰를 혼자서 완수하고 증거를 가져와야 하는 거니까, 그만큼 스스로 싸울 수 있는 실력을 증명하는 셈 아니겠나.”
레이가 아르엔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웃음을 지었다.
"오호, 혼자서라?"
아르엔은 당황한 듯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얼굴에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그 모습을 본 율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혼자서 그리즐리를 상대하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칭찬의 말에 아르엔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고,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시선을 슬며시 돌렸다.
레이는 이제야 모든 상황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서 그때 신용패와 얼음송곳만 있으면 된다고 했던 거였구나."
율리크는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듯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엇? 변종 그리즐리 말하는 거였나?"
발타자르는 율리크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 무턱대고 혼자 사라져서는 게일이 찾아 헤매다 결국 찾지 못하고 회의 도중 나에게 보고하러 온 거지. 딸이 사라졌는데 가만히 있을 아비가 어디 있겠나."
그는 잠시 레이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레이 자네가 제일 잘 알겠지만, 아르엔이 그리즐리를 잡았다고 증거로 신용패와 얼음송곳을 들고 왔지."
레이는 웃으며 말했다.
“그 들고 온 얼음송곳이 일반 그리즐리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컸던 거죠?”
"그렇지. 변종 그리즐리라는 소문이 계속 들려오던 참이었으니, 확신할 수밖에. 하지만 아르엔의 실력은 내가 제일 잘 알아. 혼자서 그 변종 그리즐리를 처리하기엔 아직 무리였을 텐데 떡하니 증거물을 내놓으니···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네."
그는 이제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진 아르엔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한 기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더군. 노르헤임 기사단장의 각인이 있는 기사패를 지닌 젊은 기사한테. 그 얘길 듣고 생각했네. ‘재밌는 녀석이 발칸으로 왔구나···’ 하고 말이지.”
발타자르는 고개를 돌려 율리크를 쳐다 본 후 다시 레이에게 시선을 두며 말을 이었다.
"노르헤임의 기사단장이 이곳에 있는데, 젊은 기사라? 그렇다면 회의를 다시 열 때 자네와 그 젊은 기사가 함께 올 거라 생각했네. 그래서 회의실로 들어올 때 레이 자네에게 장난을 좀 쳐봤네. 변종 그리즐리를 잡은 장본인일 테니까."
“그래서, 장난은 만족스러웠나요?”
“몹시. 대련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만족이었다. 자네는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의 눈빛을 가지고 있더군.”
발타자르의 말을 들은 레이는 순간 대전쟁의 기억이 스쳐 지나가며 잠시 침묵에 잠겼다. 이윽고 눈빛을 가다듬고 짧게 대답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요."
"흠···? 그건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지. 그래, 그럼 변종 몬스터에 대해 할 말이 뭐지?"
레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그놈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어요?"
발타자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고만 받았을 뿐이지. 그런 변종들이 나타난 건 불과 며칠 전부터였으니까."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사실··· 율리크님께는 따로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발칸으로 오는 길에 들렀던 마을에서 서리늑대 무리를 처리 후 이상한 낌새가 느껴져서 역추적을 해봤더니, 변종 서리늑대가 숨어있더군요."
그 말을 들은 율리크가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아! 그래서 처리할 일이 생겼다고 했던 게 바로 그 녀석 때문이었군."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변종 서리늑대는 우리가 알고 있던 서리늑대랑은 완전히 달랐어요. 속도나 힘도 월등히 강했고··· 그뿐만이 아니라, 분신 능력을 사용하더군요."
발타자르는 눈썹을 모으며 물었다.
"분신이라? 그건 또 무슨 능력이지?"
"분신을 만들어 상대를 속이고, 그 분신이 빙결 폭발을 일으키는 겁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이라 처음엔 굉장히 당황했죠."
레이는 이어서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에 만난 변종 서리송곳 그리즐리. 아르엔은 직접 상대해봐서 알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그리즐리랑 전혀 달랐어요. 원래 서리송곳 그리즐리는 팔에 아대만 있는 형태였는데, 이 녀석은 거의 온몸이 얼음 갑옷으로 덮여 있었고, 손에 얼음 건틀릿까지 차고 있었어요. 보통 기사는 1대 1로 상대하기 쉽지 않았을 걸요?"
발타자르는 잠시 말없이 레이의 이야기를 곱씹더니,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결국 기존 몬스터에 비해 월등히 강해진 것도 모자라, 복잡한 전술까지 사용할 줄 아는 것들이지. 북부가 가뜩이나 험난한 환경인데, 이런 변종들이 더 자주 출몰한다면···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은 위험할 수밖에 없겠군."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요? 변종이 나타나는 이유라든가··· 노르헤임 쪽에 상급 몬스터 출현이 잦은 이유 같은 거요."
발타자르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직은 없다네."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뭔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율리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율리크님, 서리늑대 무리를 처리한 뒤에 뭐 느껴지는 거 없으셨어요?"
율리크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음? 별다른 건 없었다만?"
레이는 잠시 고민하다가 아르엔에게 물었다.
"아르엔도? 그리즐리가 나오기 전에 내가 뭐가 느껴진다고 말했잖아. 근데 넌 뭐가 안 느껴진다고 했었지?"
아르엔이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네, 저는 그때 따로 뭔가 느껴지던 게 없었어요."
"그럼 혹시나 해서 묻는데, 그리즐리 이마에서 어떤 이상한 기운 같은 건 못 느꼈어?"
아르엔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네. 그런 게 있었나요?"
발타자르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레이에게 물었다.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나?"
레이가 천천히 대답했다.
"음··· 서리늑대도 그렇고, 그리즐리도 그렇고, 둘 다 몸에 뭔가가 박혀 있었어요. 약간 검붉은 조각 같은 건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조각이라기보다는 어떤 ‘결정’에 더 가까웠던 것 같아요. 위험할 것 같아서 부셔버렸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보관이라도 해볼 걸 그랬나 싶네요."
"율리크와 아르엔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레이 자네만 그걸 보고 느꼈다라···"
레이도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저도 그게 좀 이상하긴 하네요."
"그렇다면 변종 몬스터와 그 검붉은 결정체의 관계를 좀 더 확실히 밝혀야겠군. 지금으로선 자네만 그 기운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으니, 다음에 또 변종 몬스터를 보게 된다면 그 결정을 보관할 수 있겠나?"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가지고 와서 보여드릴게요."
발타자르는 다시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순간,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일스입니다."
발타자르는 눈길을 돌리며 말했다.
"들어오게."
문이 열리자, 단정하고 인자한 인상의 60대 남성이 들어섰다. 그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말했다.
"서부 상업국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발타자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장사치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바일스는 허허 웃으며 머리를 가볍게 저었다.
"알게 모르게 북부에 많은 도움을 주는 게 서부 상업국입니다. 너무 싫어하는 티를 내지 마시지요."
발타자르는 자리에서 일어서기 전에 율리크를 향해 물었다.
"율리크, 자네는 노르헤임으로 언제 돌아갈 생각인가?"
율리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방어선이 걱정되어 내일 바로 떠날 예정입니다, 변경백 님."
발타자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그럼 지원군을 준비해 두겠네. 내일 함께 가도록 하지."
율리크는 감사의 뜻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변경백 님."
그런 다음 발타자르는 레이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 자네도 노르헤임으로 돌아갈 건가?"
레이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애초에 기사패만 받았을 뿐, 정식 기사가 아니라서, 발칸에 남아 길드 의뢰를 하면서 변종 몬스터의 흔적을 좀 더 찾아보려고요."
발타자르는 고개를 끄덕였다가, 옆에 있던 아르엔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르엔, 너도 레이와 같이 다니면서 경험을 좀 쌓아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아르엔은 아버지의 말에 잠시 놀란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발타자르는 미소를 지으며 딸의 어깨에 잠시 손을 얹었다.
"그럼, 난 응접실로 손님을 맞으러 가야겠다. 잘해보거라."
그는 차분한 얼굴로 복도를 걸어 나갔고, 바일스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발타자르는 문을 열고 응접실로 들어서며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놀람 없이, 그러나 약간의 흥미를 띤 목소리로 물었다.
"서부 상업길드의 최고 권위자의 딸인 그대가··· 왜 직접 북부까지 온 거지?"
그녀는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변경백님, 일레아나 벨사리스입니다. 개인적으로 거래를 하고 싶은데요."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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