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구경(2)
하늘빛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머리칼은 세월의 흔적조차 빛을 잃게 만들 듯 반듯하게 빛났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얼굴은 피로와 고뇌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코스 벨사리스. 서부의 영웅이라 불리며 황금연맹의 수장이 된 사내였다.
잘생긴 이목구비는 여전히 강인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표정은 어딘가 무겁고 퀭했다.
지쳐 보이는 눈빛은 창밖의 어두운 도시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
사람들은 그 불빛을 보며 오늘도 평화를 노래하고 있겠지.
그의 눈엔 그것이 언제 꺼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망루처럼 보였다.
한 손으로 창틀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영웅이라... 웃기지도 않지."
낮게 내뱉은 그의 목소리는 방 안의 고요를 깨뜨리며 멀리 번졌다.
책상 위에 손을 올리며 흩어진 서류들을 천천히 훑었다.
그중 하나, 레오니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손끝이 그 위를 스쳤다.
"레오니드... 네가 지금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안다."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대륙 최고의 상업국으로 만들어준다 했던 약속은 어디 갔냐고? 네 희생이 여기서 멈출 게 아니라고? 그래...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서류가 흩어졌다.
"네 희생으로 겨우 붙잡은 이 안정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단순히 겁쟁이라서가 아니야. 실패를 반복할 수 없으니까."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달빛 아래 서부의 거리들이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서부는 한때 대륙을 삼킬 듯한 위세를 자랑했지. 인간국과 이종족의 교역을 장악하고, 경쟁자들을 압도하며 모든 것을 손에 쥐었어. 그런데 그 욕심이 결국 모든 걸 부쉈다."
고개를 저으며 낮게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안에서는 길드들이 서로 물어뜯고, 밖에서는 제국이 목을 조이고... 결국엔 무너졌다. 그게 서부의 몰락이었다."
손을 뻗어 서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황금연맹? 그래, 그걸로 서부를 다시 세웠다. 네 가문이 모든 걸 희생했기에 가능했지. 하지만..."
손이 떨렸다.
"네게 약속했던 대륙 최고의 상업국? 지금처럼 안정만 붙잡고 있는 건, 그 약속을 잊어서가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야."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내가 답답했겠지. 그래서 반마르코스파에 들어가 나 대신 서부를 다시 대륙의 중심으로 올리겠다고 나선 거겠지."
고개를 젓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넌 모른다. 제국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목소리가 낮아졌다.
"제국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들의 힘을 빌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고. 하지만, 제국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들을 이용한다고 믿는 순간,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거다."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국은 기다리고 있어. 스스로 목을 매달기를."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이 이어졌다.
"그걸 막아야 해. 네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야 하고, 틀리지 않았다는 것도 보여줘야지. 쉽지 않겠지만..."
다시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레오니드, 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가문을 잃고, 서부마저 잃을까 두려운 거겠지. 네가 나서서 제국과 손을 잡는 건 서부를 위해서라고 믿었을 거야."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네 선택이 서부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면, 반드시 그걸 막을 것이다."
창밖을 다시 바라봤다. 빛나는 도시, 그러나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안한 불빛들.
"서부는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다. 그 누구도 다시 희생되지 않아."
결단이 가슴속에서 울렸다.
"제국을 막고, 서부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안정만으론 부족하지만, 무모한 도약도 아니다. 반드시 서부를 지킬 것이다."
고개를 들어 단호히 속삭였다.
"제국은 절대 서부를 넘볼 수 없다. 내가 있는 한."
***
레지오의 방 안
레지오는 달빛이 비치는 창문 옆 작은 테이블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붉은 와인이 잔 속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그의 입가엔 얕은 미소가 떠올랐다.
얼마 전 마르코스가 연설한 내용 중 자신이 있는 한 제국은 절대 서부를 침법 하지 못할 거라 말한 게 생각이 났다.
"한 사람이 제국을 막겠다고? 정말 어이가 없군, 마르코스."
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무너지는 댐을 손으로 막으려 드는 건가. 네가 아무리 서부의 영웅이라 불려도, 결국 외줄 위에서 춤추는 광대일 뿐이야."
테이블 위의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헤르메스 운송업은 이미 마그노르를 좀먹고 있어. 남은 건 헤르디안 물류창고의 자원과 자금. 그걸 마지막으로 조이면 서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죽어갈 수밖에 없어."
그는 눈을 감고 머릿속 그림을 그렸다.
"마그노르가 무너지면 수도까지는 시간문제야. 그다음은? 서부 전역이 우리 발밑으로 떨어지겠지. 서부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서부의 영웅? 허울 좋은 이름이 제국 앞에서 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잠시 멈췄다.
"그나저나 황금연맹의 딸을 죽이는 계획이 실패한 게 제일 아쉽군. 망할 라시엘의 변덕만 아니었다면 친마르코스파와 반마르코스파가 서로 물어뜯으며 더 빨리 망가졌을 텐데."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 방법이 아니더라도 길은 많다. 서부는 이미 무너지고 있는 중이니까."
와인잔을 다시 들려던 순간,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낮게 내뱉으며 의자를 뒤로 젖혔다. 문이 열리자 부하가 숨을 고르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레지오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레지오는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문제라니...?"
다급한 부하의 표정을 보자마자 여유롭던 미소가 사리 지며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헤르디안 물류창고에 불이 났습니다."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와인잔이 흔들리며 붉은 액체가 테이블 위로 흘러내렸다.
"불...? 헤르디안에 물류창고에 불이 났다니? 거긴··· 그럴 리가 없는데. 오벨은? 제국 10강인 오벨은 뭐 하고 있는거야!"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 왔다.
"오벨이 그곳을 맡고 있는데도 불이 났다고? 한심하기 짝이 없군. 제국 10강이라는 이름값을 이리도 못할 줄이야. 라시엘이나 오벨이나..."
분노로 떨리는 손으로 책상을 쳤다.
"헤르디안으로 직접 가서 확인한다."
테이블에 번져 흐르는 붉은 와인처럼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방 안을 채웠다.
황금연맹의 딸 암살 실패에 이어, 헤르디안 물류창고의 붕괴까지.
레지오는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에 예상치 못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느꼈다.
***
물류창고 안
깔끔하게 반쪽이 난 오벨의 시체를 넘으며 물류창고로 들어섰다.
내부는 압도적이었다. 정갈하게 분류된 자원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곡물의 산, 반짝이는 금화 상자, 광석 더미까지. 그 규모는 이 도시가 제국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었다.
일레아나는 잠시 멈춰 섰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가 생각했던 거보다 훨씬 심각하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놀라움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레이는 금화 상자 하나를 손으로 툭 쳤다.
"이제 이곳, 헤르디안 물류창고를 없애야겠다는 감이 오죠?"
일레아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는 물량과 재화만으로 마그노르의 경제를 주물러댈 수 있겠어요. 제국이 원하는 게 바로 이거였군요."
레이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인 건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라 다행이죠."
그는 뒤돌아 루시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루시. 잘 부탁할게."
루시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쉬며 곡물이 쌓여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니, 엘프한테 불 좀 질러달라는 말을 이렇게 당연하게 하는 사람은 대륙에 당신밖에 없을걸요."
그녀는 중얼거리며 손을 들었다.
"불량인 에델리안의 잎사귀를 찾다가 서부 상업국에서 불을 지르게 되다니..."
손끝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났다. 불꽃은 순식간에 커져 곡물 더미를 강타했다.
건조한 곡물에 불이 붙자마자 화염은 기다렸다는 듯 퍼지기 시작했다. 창고가 서서히 뜨거운 열기와 불길로 휩싸였다.
레이는 불길을 잠시 바라보다가 일행 쪽으로 돌아섰다.
"좋아, 이제 나가자. 불구경은 원래 시원한 맥주 마시면서 해야 제맛이라던데, 갑자기 맥주가 땡기네."
그의 말은 가볍게 들렸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차가웠다.
헤르디안 거리
창고를 빠져나와 거리로 나섰다. 처음 들어왔을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슬슬 하루를 마무리하는 분위기로 보였다.
시간이 많이 늦어서 인지 사람들은 대부분 정리 중이었고, 가게들은 하나둘 불을 끄고 있었다.
"뭔가... 타는 냄새나지 않아?"
"그러게. 어디서 불 난 거 아니야?"
지나가던 사람들의 소리가 들렸다. 루시는 그 말을 듣고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타는 냄새가... 벌써?"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레이는 그런 그녀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에이, 그냥 저녁 준비하다가 음식 태운 냄새겠지."
그는 태연하게 말하며 그녀의 등을 살짝 밀었다.
"괜히 얼굴에 다 써놓지 말고 빨리 가자. 우리가 했다고 광고라도 할 거야?"
숙소로 향하던 길, 멀리서 치솟는 불길이 보였다. 처음에는 작은 불씨처럼 보이던 것이 삽시간에 헤르디안 외곽 숲까지 번지고 있었다.
불길은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점점 커져갔다.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소리를 질렀다.
"불이다! 숲에 불이 났어!"
"저 불길, 저거 어디야?!"
레이는 멀리 번져가는 불길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 제국도 곧 반응하겠지. 반마르코스파든 제국이든 수도 바로 옆 도시에 이런 화재가 발생하면 가만히 있기도 힘들 거야."
그는 고개를 돌려 루시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루시 넌 여기서 그만 빠져나가야겠다. 이미 할 만큼 했고, 더 엮이면 골치 아파질 거야."
루시는 그의 말에 눈을 좁혔다.
"왜죠? 이렇게 된 거 끝까지 도와준다 했는데,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아니면 그냥 귀찮아서인가요?"
레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둘 다. 네가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우리 모두를 위해 좋아. 어차피 제국은 황금연맹의 딸을 먼저 노릴 테니까. 잠시 교역하러 온 엘프는 신경도 안 쓸 거야."
그는 일레아나와 아르엔을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오늘은 숙소에서 깔끔하게 쉬고, 내일 공식 일정대로 변종 몬스터에게 부상을 당한 기사단 치료를 위해 수도로 갑시다."
아르엔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레이, 정말 이렇게 가는 거 괜찮은 거예요? 지금 이 상태로?"
레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멀리 타오르는 불길을 보았다.
"글쎄... 그건 수도로 가면, 정확히 알게 되겠지."
그는 짧게 대답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도 보이는 헤르디안 외각숲 불길은 하늘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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